아키모토 야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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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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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도 메구로구 출신의 방송 작가, 작사가, 각본가, 영화 감독, 만화 원작자, 소설가, 공연 연출가, 교수, 아이돌 프로듀서.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아이돌 그룹인 AKB48의 프로듀서로 더 유명하다.
별명은 아키부타(가을돼지), 팔짱곰이 있다. 인터뷰를 할 때 보면 항상 팔짱을 끼고 말을 하는데, 이 때문에 '아키P는 팔짱을 끼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거냐'는 농담도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긴 별명이 '팔짱곰'. 오냥코클럽 멤버들에게는 '앗키'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AKB48 멤버들은 SM 소속 아이돌들이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를 '선생님'이라 부르듯 '아키모토 센세'로 호칭이 고정돼 있다고(...).
흔히 오냥코클럽의 프로듀서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단독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오냥코클럽을 실질적으로 프로듀스한 것은 이시다 히로시를 비롯한 당시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의 작가진이었고, 아키모토는 그 작가진 중 한 명이었다.
AKB48를 비롯한 자매그룹, 거기에서 파생된 유닛이나 솔로곡, 극장공연 곡,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의 '''모든 작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작사 뿐 아니라 종합 프로듀서로서 그룹이 나아갈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감독하고 있다.
아이돌 업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SM의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와 비교되고는 한다. 하지만 가수였고 음악 산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수만과, 방송 작가 출신에 방송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키모토 야스시를 그대로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이수만은 차라리 층쿠와 비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2.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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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츄오 대학 부속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1973년 겨울, 수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니혼 TV의 '센다 미츠오의 일수로 2일 대진격!'을 듣던 중, '이 정도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서 수험 공부용으로 준비했던 노트 스무 페이지 정도에 걸쳐 센다를 주인공으로 한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패러디를 작성한다. 같은 반 친구들의 칭찬을 듣고 그 노트를 닛폰 방송에 보냈더니 당시 닛폰 방송 사원이었던 카메부치 아키노부와 오쿠야마 테루노부의 눈에 들어 재능이 발굴되었다. 이리하여 닛폰 방송에 찾아올 수 있게 되어, 출입하는 동안 오쿠야마의 제자가 되어 방송 작가 그룹에 소속되게 된다. 당시 17세의 고등학생이면서 방송 작가로서 활동을 개시한 것이 업계에 들어온 계기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주오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지만, 방송 작가로서의 활동은 계속해서 대학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결국 방송 작가로서 살기로 결의하고 대학을 중퇴한다. 당초엔 방송 작가 활동을 단순한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받은 수입은 당시 샐러리 맨의 4배 가까운 액수였다. 본인은 이것을 '악전(あぶく銭)'[4] 이라고 생각했다고.
그 후, 방송 작가로서 부족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중 카메부치로부터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의 아사츠마 이치로를 소개받은 것으로부터 작사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문에 작사가로서는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과 계약되어 있다. 1981년, The Alfee의 곡인 '通り雨(소나기)'의 B면에 수록된 곡을 작사할 기회를 얻어 '言葉にしたくない天気(말로 하고 싶지 않은 날씨)'로 작사가 데뷔를 이뤘다. 이를 계기로 작사가로서도 활동을 시작한다. 방송 작가, 작사가가 된 계기나 일화에 대해서는 1988년 발간된 자전 소설 '안녕, 메르세데스'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온 일이고 특별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라서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川の流れのように(흐르는 강물처럼)'[5] 을 작사한 후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이자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가 자신이 작사한 곡을 불러주었으므로 '나도 이제 프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도 직함을 작사가로 하고 있다고 한다.
3. 업적
방송 작가로서는 '올나잇 후지', '유우야케 냥냥', '우타방',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더 베스트 텐' 등 전설급 프로그램에 관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작사가로서는 코이즈미 쿄코의'なんてったってアイドル(뭐라해도 아이돌)', 톤네루즈의 '雨の西麻布(비내리는 서쪽 아자부)'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였으며 오냥코클럽, AKB48 등 다수의 아티스트의 곡의 작사에 손을 대는 한편, 작가나 영화 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사 말고도 TV 각본이나 애니메이션 각본, 심지어 영화 각본도 쓰는데 착신아리와 아즈키쨩, 리리카SOS가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또한 AKB48을 모델로 한 코믹스인 AKB49 ~연애금지조례~와 애니메이션 AKB0048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코끼리의 등, 아드레날린의 밤, 사랑공장, 후에 이 소설들을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AKB48 멤버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밖에도 자기계발서또한 집필했다. 또한 공연 연출가로서 '이병헌의 20주년 기념 공연' 등의 기획을 맡기도 했다.[6]
일본의 뇌 과학자 모기 켄이치로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측두연합야라는 기억의 중추에 데이터가 굉장히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아이디어라고 접하는 것은 천개 중에 세 개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급했다. 프로그램 '정열대륙' 출연 때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도 아티스트도 예술가도 아니다. 피카소를 흉내내는 광고 회사원. 피카소가 되고싶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피카소는 될 수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작가 하야시 마리코는 "아키하바라에서 (AKB48)을 한다고 했을 때 아키모토 야스시도 빗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AKB의 성공을 보고) 이 사람은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하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일을 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안되겠네", "조금 빗나갔네", "시대에 안 맞네" 하고 반드시 이야기를 듣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굉장하다. 시대가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있다는 느낌, 시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아키모토도 사람인지라 실패나 추문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세가의 드림캐스트. 세가가 게임기 제작에서 철수한 결정적 원인은 드림캐스트 실패에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 또한 이 실패에 한몫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는 SEGA의 임원으로 드림캐스트 프로젝트의 프로모션 부분을 총괄하고 있었고,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세가와 후지TV의 후원으로 아이돌 그룹을 만들게 된다. 이 아이돌이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으로 불렸던 체킷코. 여기서 체킷코는 애당초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을 위한 프로젝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킷코의 여러 활동은 아키모토 개인의 사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들뿐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결과론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는 약 100억엔 정도를 프로모션 비용으로 날려먹고, 드림캐스트는 실패하게 되었으며, 체킷코도 대실패했다. 후에 아키모토 본인은 자신은 체킷코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망한 후에' 딱 잡아떼고 있지만, 체킷코용 프로그램인 "DAIBA테키!!"는 '드림캐스트 제공, 아키모토야스시 사무소 협력'이라고 명시된 바 있다. 이렇게 실패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아키모토 본인이 작가진 중 한 명 겸 작사가로 참여했을 뿐이지만 대성공한 오냥코클럽은 마치 자신이 전부 프로듀싱한 것인양 TV 등에서 그렇게 말하고 경력에 크게 집어넣는 것들을 전부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호리에 타카후미와 손잡고 라이브도어 계열의 컨텐츠회사 중역으로 취임했지만, 저 유명한 라이브도어 쇼크[7] 가 일어난 후 재빨리 사임하고 손을 턴다. 물론 지금 아키모토는 이것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저는 30년 간 여러 가지 모습을 봐왔지만 계속 변하지 않는 점은 '친절함'이네요. 대신에 모두가 모였을 때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왜 나한텐 안 가르쳐 준 거야!' 하고..."라고 언급했다.[8]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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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냥코클럽의 인기 멤버였던 '''타카이 마미코'''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부인이다. 오냥코 해체와 거의 동시에 당시 20살이던 타카이와 결혼하였고, 타카이는 그 즉시 연예계를 은퇴했다. 팬클럽이 창단한 직후였던데다가 워낙 팬이 많던 멤버라 팬덤이 박살날 만큼 그야말로 충공깽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고 타카이 마미코 쪽이 매우 적극적으로 대시했었다고 사이토 유키(배우)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다. 같은 위치에 있던 층쿠에게는 '''"마지막에 모닝구 무스메 멤버랑 결혼해"'''라고 귀뜸했다고(...)
여기서 재미있는 여담이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는 당시 타카이 마미코의 오냥코클럽 오디션의 심사위원중 한 명이었다. 오디션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가 타카이 마미코에게 "연예계 데뷔 하면 유혹이 많을텐데요. 작사가라든지 코메디언, 디렉터들한테요 그 유혹에 이길 자신은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타카이 마미코는 "물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3년 후에……. 이 모든 것은 유우야케 냥냥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고 동영상도 남아 있다.
2001년 3월에 장녀를 출산했다.
5. 활동
5.1. 작사가로서
작사 경력이 30년이 넘으며 싱글의 밀리언셀러 19회(2014년 10월 기준)를 비롯하여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무려 5,000곡에 다다른 곡들의 가사를 도맡아 써왔으며 그 중 AKB48에게 준 곡들은 700곡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에서 100곡이 넘는 작품이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싱글 총 매상은 2013년 2월 기준으로 총 506작품 6859.1만 매를 달성하고 여태까지 1위를 유지했던 전설의 작곡가 아쿠 유(꽃의 중3 트리오와 82년조의 3/4가 데뷔했던 스타 탄생의 프로듀서이자 핑크레이디의 상징)를 앞질러 역대 1위를 하였다. 그 3할은 AKB48와 자매 그룹 관련 작곡이며 매상은 1998.7만 매로, 악수권이라는 상술을 이용한 판매 방식이기 때문에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다. 이 모든 기록은 지금도 현재진행중.
덧붙이면 아키모토 야스시는 오냥코클럽에 관여했을 시절부터 팬미팅 참가권 등을 동봉하는 방식의 상술을 펼쳐왔다. 후술할 오냥코클럽의 기록은 그룹의 인기도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이러한 상술에 의해 만들어 진 부분도 있다.
20대에 이미 여러 히트작을 배출하며 인기 작사가로서 인정 받았으나 아이돌이나 기획물 전문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의 '강의 흐름처럼'을 작사한 후로는 이미지는 완전히 변해서 이른바 명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아키모토 자신이 프로듀스한 오냥코클럽, AKB48의 전곡과 솔로곡, 유닛곡의 가사는 전부 아키모토 본인이 쓰고 있으며 오냥코클럽의 곡들은 1986년 오리콘 차트 52주 중 36주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1987년은 납세액만 1억 61만 엔.
2011년, 2012년도 JASRAC상에서 2년 연속 금,은,동 3관왕을 독점하였다. 이는 1995년 코무로 테츠야가 달성했던 기록으로 2년 연속 수상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유일하다.
가사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다. 히트곡의 경우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川の流れのように'(강의 흐름처럼)와 케야키자카46의 'サイレントマジョリティー'(사일런트 매저리티, Silent majority)와 같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 AKB48의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헤비 로테이션)과 같은 사랑 노래, 코이즈미 쿄코의 なんてだってアイドル(뭐라 해도 아이돌)과 같이 아이돌들의 이면을 다룬 노래 등등,[9] 폭넓은 주제의 가사를 다루고 있다.
노래 화자의 경우에도 남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연령대 또한 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하다. 가사 주제의 경우에도 이별, 추억, 삼각관계, 바람, 심지어는 동성애까지 다양하다.
어떻게 하면 화제를 모을지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 역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데, 좋을 때야 화제 모아서 판매량이나 주목도가 높지만, 아무래도 너무 수위가 센 경우가 많아서... 가사가 시궁창의 본좌급 중 하나로 불리는 오냥코클럽의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도 이 사람이 작사했다. 그리고 AKB48의 '교복이 방해 해'(원조교제), 'Dear My Teacher' (사제간의 사랑. 가사에 아예 '이 세상에는 남자, 여자, 게이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음 ) 등은 물론이고, 이동복도주행대7의 '자매덮밥' 등등...
작사는 평균 2시간 정도 걸리며 하루에 4곡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AKB48과 자매 그룹, 파생 유닛, 멤버 솔로, 극장 공연곡, 이벤트성 곡,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또는 졸업멤버의 솔로곡 까지 모두 작사를 혼자서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량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아키모토의 작사 방법은 멜로디를 들으면서 우선 엉터리로 가사를 붙인 다음 그걸 다듬으면서 만든다고 한다. 그 엉터리 가사라는 게 멜로디로부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나 감정이기 때문에 그걸 테마로 삼아서 가사를 쓴다는 것이다. 멤버들에게 "소근거리는 것처럼 불러줘"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창법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케팅뿐만 아니라 본직이 글쟁이인지라 가사도 상당히 잘 쓰는데, 아이돌 프로듀서다 보니 10대 취향의 감성적인 가사를 많이 쓰고, 또 잘 쓴다. '아키P는 여고생의 일기장을 훔쳐서 보관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돌 정도. 근데 이성의 화자 시점에서 가사를 쓰는 걸 좋아해서 모르고 들으면 백합 향기가 폴폴 나는 곡이 태반이다. 물론 노리고 쓰는 것일 확률이 100%(...).
의외로 1980년대~1990년대에 애니송의 작사도 한 적이 있어서 기동전사 건담 ZZ의 1기 오프닝 '애니메이션이 아냐' + 1기 엔딩 '시대가 울고 있어'와 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의 오프닝 '메로스처럼' + 1기 엔딩 '5분쯤의 버릇'의 가사를 썼고 최근에도 종종 내는 듯.
원체 자기 이름으로 나오는 곡이 많은데다, 그 중에는 같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의 여러 경향의 곡들이 있고, 프로듀스하는 그룹도 프로그램도 콘서트도 엄청 많은 까닭에, 유령 작가가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작가 중 한 명. 아예 작가진이 따로 존재한다는 루머마저 있다. 다만 단독으로 직접 겨냥된 경우는 없고, 대작 관련 사건이 일어나거나 다른 가수의 대작 의혹이 생길 때마다 곁다리로 이 사람의 이야기도 함께 나오는 정도. 리갈 하이의 고스트 라이터 관련 에피소드(1기 2화)가 아키모토를 겨냥했다는 썰이 돌아다닌다거나. 이 에피소드에서 피고에게 "지금까지 '세라복이 벗겨졌다'거나 '부르마 입는 걸 깜빡했다'거나 로리타 컴플렉스 그 자체인 노래밖에 만들지 않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 여담으로 이 드라마의 악역의 모티브라고 추정되는 실존 인물의 폭은 제법 다양하다.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라거나.
이런 주장에 대해 애초에 유령 작가가 있으면 뮤비 촬영이 밀리거나, 가사를 못 써서 극장 공연을 미루는 등의 일이 벌어질 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 또한 존재.
하나 특이한 것은 5,000곡이나 작사를 해왔음에도 자기 복제에 잘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고 나서는 사실상 곡도 자기가 선정해서 만드는 거니 어찌 보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AKB48만 보면 자기 복제에 빠져서 팬들에게 욕을 먹고 있지만 그룹의 유닛곡, 솔로곡, 극장곡들을 전부 들여다 보면 상당히 세련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처럼 새로운 그룹을 만들면 그 그룹에 맞는 색을 입히는 걸 정말 잘한다. 가사 내용이든 그 의미나 센스든 일본 최정상급의 작사가인 것만은 확실하다.
5.2.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오냥코클럽과 AKB48이라는 이름이 너무 커서 마치 신처럼 여겨지지만, 오냥코는 위에도 써있는 것처럼 작가진의 일원이자 작사가로 참여한 것이라 종합 프로듀서로 관여하는 AKB48과는 다르다. 아키모토 본인은 오냥코클럽은 공동 작업이며 자신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고쿠쇼 사유리는 "구성 작가였던 아키모토씨는 스태프의 일원이었고 좋은 의미로 다른 스태프들과 동급에 있었다"라고 얘기하였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스해서 말아먹은 그룹도 많은데 오냥코의 남자버전이었던 무슷코클럽, 초등학생으로 이루어진 네즈밋코 클럽, 2001년 '판치라 아이돌'이라는 해괴한 콘셉트를 들고 나온 추정소녀 등이 그것이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기획 성립에 큰 역할을 한 90년대 말의 체킷코도 쫄딱 망했다. 최근의 성공으로 이런 것들은 전혀 어필되지 않지만 그는 성공만큼이나 무수한 실패를 기록한 사람이다.
AKB48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2005년 직접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근거지를 두고 책임 프로듀서로써 역임, 전용극장을 만들어 '''매일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하였다. 당시의 아키하바라는 사회 현상을 불러 일으킨 서적 '전차남'에서 그려진 메이드 카페, 미소녀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 인지되어 AKB48을 아키바에서 통용될 '모에 아이돌로 키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AKB48의 지하 아이돌적인 상태는 장년 간 지속되었다. 마이너한 구성과 오타 성향의 걸그룹에 대중들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것. 하지만 2008년 싱글 '오오고에 다이아몬드'로 인기가 상승, 2010년이후로는 발매되는 CD마다 100만 장을 돌파하는 국민적인 아이돌이 되는 길을 이끌었다.(자세한 설명은 AKB48 문서 참조.) 2013년의 인터뷰엔 장래에 AKB48의 프로듀서에서 물러남을 시사하였다.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철학은 '다른 사람이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을 하자!'라고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에서 프로듀싱 능력은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여돌계의 끝판왕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는 "(아키모토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기획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면 좋은 게 있다면 흉내내고 싶어진다. 때문에 그다지 잘 알지 않도록 하고있다. 하지만 과거의 다양한 경험 위에서 이번을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기 떄문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런 분야를 만들어간달까. 점을 찍는다기보다는 자리를 만들었달까."라고 언급했다.
참고로 AKBINGO!에서 AKB 오리멘(1기생)들이 말하길, 만약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디션에 응모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이유는 뭔가 수상해서. 그리고 1기생 미네기시 미나미는 오디션 관련 정보지를 보다가 부모님이 AKB 오디션 광고의 아키모토 야스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굉장한 사람이야'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당시 어떤 그룹인지도 알 수 없었던 AKB48의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한다.
구글 플러스에서 AKB48 멤버들과 교류를 하고있는데 자기 자신을 '야스스'라고 부르며 절찬 개드립 중. 관련 정보를 말해 놓고는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같은 발설을 하지만 위에 나와있듯이 이 사람은 고교생때부터 방송계에서 일해온데다 나이도 60이 다되가는 베테랑이다. 그러므로 저런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는다. '''유키링이 직접 유출 좀 제발 그만하라고 구플에 쓸 정도면 말 다 했다.''' 구플에서는 카미7멤버들과 비견될 정도로 인기를 (...) 끌고 있는데, 멤버들과 장난을 치거나 멤버들 소식을 알려주거나 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팬들은 아키P에 대한 애증이 쌓이고 쌓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돼지라고 부르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아이돌 마케팅에는 도가 트인 사람은 맞다.
프로듀서로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대단히 엄하다고 한다. 스탭들이 아키모토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검사받으러 올 때는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고 할 정도이다. 어떤 공을 던져도 쳐버리는 타자를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싱글 자켓을 결정할 때는 스탭들이 20패턴의 아이디어를 들고 왔지만 전부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콘서트나 공연등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얄짤없이 쓴소리를 하는데 그 예로는 AKB48 및 자매 그룹의 '''노래 총선거'''라고 불리는 리퀘스트 아워가 2013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첫 날 영상을 보고 자신의 구글플러스에 이 영상이 '''최악'''이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강운 최강자를 뽑는 과정에서 선발된 카와에이 리나가 벌칙에 걸려[10] 스티로폼 공 같은 것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버라이어티의 정석인 흰 가루가 아니라는 것을 깠다. 왜 밀가루 대신 스티로폼이 나왔냐면 카와에이가 또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화장이 지워질까봐. 하지만 아키모토는 얼굴이 하얀 상태로, 그러니까 정말 아이돌 본연의 모습을 한 채로 노래를 불러도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체 각 부위에 만보계를 붙이고 몸을 떨어 그 횟수를 세는 경기는 낡았다고 깠다. 중간에 중계를 한 이치카와 미오리[11] 도 리퀘스트 아워랑 관계없다고 깠다. 근데 그래놓고 결론은 노래 총선거니까 노래를 더 보여달라고 했다.
보통 PV란 건 일단 그 곡의 내용에 따라 만드는 게 정석이라서 일단 곡이 한 달 전에 나오고 그걸 한 달 동안 생각해서 곡에 맞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AKB48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없다고(...) 보통 PV 촬영 '''열흘 전'''까지 미술, 의상, 촬영장소는 커녕 노래, 가사조차 완성되어 있지 않은게 허다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6일 전'''까지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PV촬영 각본은 감독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짠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대개 안무, 가사, 음원은 '''빠르면''' PV 촬영 '''전날''' 완성되고 상황이 나쁠 때는 촬영이 시작하고 오후 쯤에 가사가 올 때도 있고, 더더욱 나쁠 때는 아예 가사가 오지가 않아서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어 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아니다 싶으면 기한이고 뭐고 전부 뒤집어엎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촬영 중간에 가사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싱글의 타이틀 곡과 커플링 곡을 정할 때는 500곡에서 1000곡 정도를 듣는다고 한다. 주로 회의가 끝난 새벽 1, 2시 쯤까지 작업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원고를 쓰기 때문에 6, 7시는 되어야 하루가 끝난다고 한다.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본인은 '해야 할 때가 인생에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 필사적으로 할지, 일로서 이런 거겠지 하고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필사적으로 한다는 걸 추구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애들 프로듀스나 극장 공연 챙기지는 않고 뭐하는 짓이냐고 팬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중. 또한 이 사람이 조직위 이사를 담당한 것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AKB48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EXO와 CL의 출연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까지는 일간지 레벨의 루머지만,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은 올림픽에 AKB를 내보낼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노기+케야키+AKB으로 사카미치AKB의 재림... 관람객들 컬쳐쇼크 아시아는 아이돌 팔아먹기가 유행인가 보다--
여담이지만 그가 AKB48를 만들고 나서 단발성애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에다 아츠코가 시작이었는데 일본에서 『오캇파 머리』 라고 하는 마에다 아츠코의 초창기 머리스타일에 강하게 꽂혔다고 한다. 다행히 SKE48 마츠이 쥬리나는 그다지 단발이 아니었으나... NMB 2기생 죠 에리코 (그가 제2의 마에다라고 극찬했던 재능) , 노기자카 46의 이코마 리나 , 케야키자카46의 히라테 유리나 등 그가 밀었던 센터 멤버에는 단발멤버가 많았다. NGT48 첫 오리지널곡의 센터가 타카쿠라 모에카가 된 것으로 그것은 확정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이 부르는 멤버의 나잇대와는 동떨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10대 멤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48그룹 중에서는 대담하게 무릎에 앉아 입술로 초콜렛을 나눠먹는 노래 (口移しのチョコレート), 원나잇 (ダウンタウンホテル100号室), 원조교제 (Dear My Teacher, 制服が邪魔をする) 등과 같은 노래들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특히, Innocence가 수록된 手をつなぎながら 공연의 경우 가사가 너무 엄해서 나이가 어린 일부 멤버가 출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엔 2차원 아이돌 프로듀서를 맡는다.정보 2차원 아이돌 명칭은 '''22/7'''이다.#
2005년 시작된 AKB48가 13년차가 되면서 아키모토가 직접 관리하던 시절의 AKB의 멤버가 많이 졸업했다. 2017년 기준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사가 필요한 그룹이 AKB48 , SKE48, NMB48, HKT48, NGT48, STU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까지 1년에만해도 가볍게 150곡 넘게 써야한다.
예전 AKB는 유닛이나 극장곡으로 AKB만으로 1년에 100개의 곡을 만들어줬다. AKB에 주로 힘을 쏟고 자매그룹에도 일정의 퀄리티를 유지해주었다. 하지만 최근 AKB에는 AKB에만 힘을 줄 수도 없고, 잘 나가는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도 유닛이나 솔로곡도 챙겨줘야한다. 그야말로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
그로 인해서 AKB에만 온전히 힘을 쏟지 못하고 있고, 최근 AKB 팬들에게는 AKB에 주는 곡이 너무 안 좋다는 욕을 먹고 있다. 아키모토가 기계가 아닌 이상 몇천 곡을 만들었으니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하다. [12]
2017년 9월 BSP 100 년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 100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서 잠은 3시간밖에 못 잔다"고 한다. 이게 큰 문제인 게 본인도 지쳐서 문제이지만, 48그룹 쪽의 악곡 퀄리티는 최근 4~5년 동안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데 본인이 독점하니 문제다.
2010년 AKB48의 대히트로 시작된 아키모토 야스시발 아이돌 붐도 2020년대 들어 무너지는 중이다. 이미 인기가 다 빠져버린 AKB48과 그 자매그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기자카46은 팬덤과 대중 인지도는 크지만 히트곡은 없는 0곡갑 신세를 8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케야키자카46은 초기의 역대급 기세에도 불구하고 고질적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개명 및 재데뷔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히나타자카46도 기존 팬덤을 기반으로 할 뿐 대중적인 인지도는 아직 모자라다. 성우 아이돌 미디어믹스 프로젝트인 22/7은 그야말로 망했으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한 아이돌 라스트 아이돌과 선발제 걸즈밴드 더 코인로커즈도 별 반응이 없이 흐지부지 끝나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인간은 구차하게 있느니 그냥 이 바닥을 떠나야하는 게 답이라고 볼 수 있다.
6. 논란
1985년에 발매된 오냥코클럽의 데뷔곡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며 일부 방송국에서도 방송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IZ*ONE의 일본인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 야부키 나코의 친정으로 잘 알려진 HKT48의 '아인슈타인보다 디애나 애그론'(アインシュタインよりディアナ・アグロン)이라는 곡 가사에 '여자애란 귀엽지 않으면 안 되지. 학창 시절은 바보인 게 좋아'(女の子は可愛くなきゃね 学生時代はおバカでいい)라는 구절에, '여자는 바보라도 좋지만, 귀엽고 않으면 의미가 없는거야?' 라는 등의 구절이 있어서 일본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쇄도했다.
정작 다이애나 애그론은 성소수자 운동, 참전 용사 지원 운동, 난민 지원 운동 등 사회 참여를 꾸준히 하고 있는 편이다. 아키모토가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치만, 알고서 저런 내용의 가사에 이용했다면 애그론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두 그룹과 마찬가지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제작한 아이돌 그룹인 케야키자카46의 노래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어'(月曜日の朝、スカートを切られた)는 '불근신하다'며 동참을 모으는 인터넷 서명 운동이 일어나는 사태로까지 발전한 적이 있다.
이 곡은 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가사와 비슷한 일이 일본 뉴스에 보도된 바 있다. 서명을 호소한 여성은 실제로 교복 치마가 잘린 경험이 있다고 하며 '이 곡을 TV에서 소개하고 있을 때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 전차를 타는 것이 다시 두려웠습니다'라며 서명 사이트에서 불편한 심경을 토로해 8월 4일 기준으로 약 7,000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다만 이 노래 가사가 여성 비하를 옹호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가사를 잘 살펴보면 이 곡이 그러한 풍습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치마가 잘린 학생이 차별당하는 암담한 현실에 수긍하지 않고 반항한다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 출처
'월요일 아침, 스커트를 잘렸어'는 케야키자카46의 데뷔곡 사일런트 마조리티의 프리퀄 (전편) 역할을 하고 있는 곡인데 두 곡들을 나란히 들으면 소외받는 학생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한테 반항한다는 내용임을 알아챌 수 있다.
7. 평가
아키모토 야스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기존의 음반, 사진집, 콘서트 위주로만 돌아가던 일본 아이돌 시스템에 악수회, 총선거와 같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도입함으로서 일본 아이돌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성인이 훌쩍 지나면 아이돌을 은퇴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AKB48 이후에는 이러한 아이돌의 수명이 늘어났다. 당장 AKB48 최연장자 였던 시노다 마리코만 봐도 전성기 시절 연령이 20대 중반으로 한국 기준으로 봐도 꽤 높은 연령대를 보이고 있다. 현재 고참격인 카시와기 유키조차 91년생으로 연령이 꽤 높은 편.
반면 싫어하는 이들은 아예 '일본 가요계를 말아먹은 장본인'이라며 대놓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많다. 남자 아이돌은 쟈니스가 독점, 여자 아이돌은 아키모토가 독점이라는 식의 인식이 퍼져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는 인식도 있고 가수나 작곡가 등 전문음악인 출신이 아니어서 음악성이 낮다는 인식도 퍼져있다. 다소 뚱뚱한 걸 트집잡기도 한다. 아키모토가 기존의 CD 시장을 자기 아이돌의 투표 놀이의 장으로 전락시킴으로서 기존의 오리콘 차트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켰고, 안 그래도 심한 일본의 음반 상술을 더 부추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일본의 싱글 음반차트는 그냥 아이돌 가수들의 화력 뽐내기 말고는 의의를 찾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CD 시장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줄곧 하락세였고[13] 일본 가요계가 침체되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된 현상이다. AKB와 아키모토가 하나의 분기점이 된 것은 사실이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주었을 수 있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결정적으로 AKB 사단이 일본 대중들에게 먹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여자아이돌 시장을 독과점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타쿠용 아이돌이다, 실력이 없다고 폄하되지만 전성기의 AKB48은 사회현상 수준의 인기를 누렸고, 현재도 노기자카46등은 여전히 대중 영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결국 이런 아이돌들에게 관심을 준 건 일본인 본인들이고, 아키모토는 그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만드는 것 뿐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IZ*ONE의 팬인 WIZ*ONE에게도 애증의 대상이 된 모양이다. 이유는 '好きと言わせたい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고 싶어)' 'Buenos Aires' , 'Vampire' 등 IZ*ONE의 일본 활동곡은 전부 아키모토 야스시의 선택을 받은 노래들인데, 하나 같이 심할 정도로 AKB의 색이 진하게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떼창을 벗어난 적도 없을 뿐더러 랩까지 떼창을 시키는 터라 한국 팬들은 대부분 아키모토가 일본 활동곡에서 손을 떼고 제대로 된 작곡가들이 일본 활동곡을 맡아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일 무역 분쟁 등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와중인데도 불구하고 IZ*ONE은 샤베쿠리007 등 일본의 인기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출연했다. 아무리 한일 합작 걸그룹이라지만 12명 중 한국인 멤버가 무려 9명이나 되는 IZ*ONE이 이런 시기에 일본의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거의 빠지지 않다시피하며 출연할 수 있는 건 아키모토의 영향력 덕분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아키모토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한국 팬들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프로듀스 사태 여파로 IZ*ONE이 한국 방송이나 광고계에서 모조리 내쳐진 것과는 달리[14] 今夜、咲良の木の下で 등은 그대로 비워 둔 채 AKB 멤버들을 등장시켜 사쿠라와 IZ*ONE 멤버들이 돌아올 그 날만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던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물밑에서 활동 재개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고, 그 의사를 AKB 멤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했다는 추측이 많다.
8. 에피소드
- 방송작가로 데뷔한 이래 줄곧 프로필 나이를 1956년생으로 하고 있으나 1958년생이다. 이건 고2 때 각본 일을 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 라디오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요청받아 국에 상담했는데 "대학생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친구를 대학생으로 속이고 자신도 거기에 맞춘 게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거라고 한다. 지금 와서 고치는 것도 귀찮다고.
- 작사가 데뷔 때 상담을 위해 야시키 타카진[15] 에게 찾아갔으나 "완전히 틀렸어. 얘기도 안되고. 가지고 돌아가"라고 비난받았다. '평범한 문장이지 가사는 될 수 없다'는 평가였다고. 그 후 아키모토가 작사가로 성공하자 칭찬을 받았는데 아키모토는 "타카진씨는 고집이 강하니 납득할 수 있는 가사를 쓰는 건 너무나 어렵다"고 하였다. 그 후 30년이 지나 그에게 작사를 제공하였다.
- 유명인이 가게를 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1987년에 아오야마에 'うんこや'(직역하자면 똥가게(…))라는 일식 펍을 개점했었다. "음식과 배설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니까요…"라 하였으나 얼마 못 가 폐점. 이후에도 다른 요식점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경영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듯하다.
- 다른 여타 그룹보다 AKB48 초기 멤버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가령 SKE48, NMB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 후기에 히트시킨 멤버들과는 사적인 만남을 자주 갖지 않는다. 초기의 AKB48 시절에는 극장에서 살다시피 직접 멤버들을 지도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왔으니 감정이 남다른것이다. 반면 후대의 그룹들은 아키모토와 같이 스토리를 만들어온 게 아니라서 개인적 감정이 덜 느껴진다.
- 1년에 대략 170~180곡 정도를 작업하고 있다. AKB48가 인기를 끈 2010년도나 지금이나 총 곡수는 별 차이가 안 난다. 비록 2010년도에는 AKB와 SKE 정도만 작업했지만 AKB48의 극장공연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고, 멤버들의 솔로, 유닛 곡도 많이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경우는 담당하는 그룹이 10개 가까이 되면서 자연스레 곡 수가 유지되고 있는 것뿐이다. 어차피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사량은 한계가 있다.
- 최소 500억 이상의 자산가로 알려져 있다.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한데, 젊은 시절에 번 방송작가, 작사료만으로도 수십 억은 족히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2009년 이후 그가 히트시킨 아이돌 AKB48, SKE48, NMB48, HKT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의 제작자로써의 수익과 작사 수입은 못 잡아도 300억이 넘는다. 모든 작사를 독점하고 프로듀싱 명목으로도 돈을 받기 때문에 1싱글당 몇 억의 수입을 남긴다. 그런 싱글을 벌써 100개 가까이 만들었다. 앨범의 판매량 까지 고려하면 그냥 완전히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기계라고 봐야 한다. 특히 AKB48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노래방 인기 아이돌인데 이 노래방 관련 비용은 제작자와 원작자가 먹는 비율이 엄청 높은 컨텐츠다. 이외에도 악곡의 방송 사용료 까지 고려하면 그의 수익은 일반인이 짐작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 MV 감독들 사이에서는 아키모토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다.
>2018년 2월 9일 생방송 『バラいろダンディ』에서 용기를 내 불만을 말하는 코너에서 코바야시 유우키(小林勇貴)는 아키모토 야스시를 정면 비판했다. "저는 최근 NGT48라는 니이가타의 AKB의 뮤비 감독을 했는데요. 아키모토 야스시 이 멍청한 녀석이 당일 날 가사를 써오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열받았어요. 그리고 3월이라고 했던 주제에 2월에 만들어내라고 말하는 거 있죠.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멍청아. 나하고 승부하자! 아키모토 야스시.
개그식의 폭로이긴 했지만 AKB48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면 신기한 일이 아니다. 노래 가사를 하루 전에 써오거나 당일 날 2시간 전에 갖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일수를 못 맞춰서 안무를 즉석에서 외워야 하는 적도 많았다. 한 마디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혼자서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감당하다 보니 뮤비조차 제대로 준비도 안 되어서 찍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본 당시 니챤러들은 "아키모토 야스시 주변에는 YES맨밖에 없어서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면서 폭로를 칭찬해주었다. 당시 니챤 반응
개그식의 폭로이긴 했지만 AKB48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면 신기한 일이 아니다. 노래 가사를 하루 전에 써오거나 당일 날 2시간 전에 갖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일수를 못 맞춰서 안무를 즉석에서 외워야 하는 적도 많았다. 한 마디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혼자서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감당하다 보니 뮤비조차 제대로 준비도 안 되어서 찍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본 당시 니챤러들은 "아키모토 야스시 주변에는 YES맨밖에 없어서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면서 폭로를 칭찬해주었다. 당시 니챤 반응
-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닭한마리이다. 프로듀스48 첫 화에서 최종 데뷔조의 공동 프로듀싱을 맡기로 한 플레디스 한성수 대표와의 첫 대면에서 닭한마리로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 "K-POP이 프로야구라면, AKB는 한 단계 낮은 소년야구나 고교야구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16] 이는 AKB48 자체를 낮춰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K-POP과 달리 일본 아이돌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성장하는 유형이라는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일본은 프로야구, 고교야구 둘 다 인기가 있기 때문에 인기도와 흥행 포인트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발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키모토가 K-POP 자체를 낮춰보는 발언을 한 것도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음악계와 많은 교류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 우익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우리나라 인터넷상에서는 정설처럼 퍼져 있어 IZ*ONE의 안티들이 IZ*ONE을 비난할 때 단골 소재로 써먹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키모토가 우익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가장 큰 이유는 아베 총리와 대담을 여러 번 하고, 도쿄 올림픽 위원을 맡는 등 친정부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8/46 그룹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아키모토의 이런 행보에 대하여 '이 사람은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사업가라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48/46 그룹 팬들에게는 돈에 눈이 멀어서 멤버들을 그저 돈벌이용 도구로 본다고 욕을 먹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아베 총리와 대담을 한 것은 그냥 2019년 5월 2일 기준으로 일본의 정부 수장이 아베 총리이기 때문이고, 일본 정계는 2012년 노다에서 아베로의 정권교체 이후 자유민주당이 득세했기 때문이며, 친정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냥 돈벌이에 유리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아키모토 본인이 본인의 정치 성향이나 사상에 대해 뚜렷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낸 적이 없는 터라 이 사람이 정말로 일본 우익 사상을 내재화한 사람인지, 아니면 정치 성향과는 상관 없이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저런 행보를 보이는 것인지는 아키모토 본인만 알 것이다. 어쨌든 드러난 행보로만 봤을 때 본인의 정치 성향이 어떻든 간에 일본 우파 세력의 이익에 충실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7] . 거꾸로 돈 때문에 친정부 성향인 척할 뿐, 실제로는 진보 성향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사실 아키모토 본인이 본인의 정치 성향이나 사상에 대해 뚜렷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낸 적이 없는 터라 이 사람이 정말로 일본 우익 사상을 내재화한 사람인지, 아니면 정치 성향과는 상관 없이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저런 행보를 보이는 것인지는 아키모토 본인만 알 것이다. 어쨌든 드러난 행보로만 봤을 때 본인의 정치 성향이 어떻든 간에 일본 우파 세력의 이익에 충실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7] . 거꾸로 돈 때문에 친정부 성향인 척할 뿐, 실제로는 진보 성향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1]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아내 타카이 마미코가 감사를 맡고 있다.[2] 2016년쯤 아키모토가 요요기 학원에 이사장이 되었다고 기사가 떴다.[3] 이름의 秋(아키)=가을[4] 일하지 않고 부정하게 번 돈[5] 일본의 My Way를 만들자는 발상으로 탄생한 이 곡은 지금도 많은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영원한 명곡으로 불리고 있다.[6] 이병헌의 일본 싱글곡 작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싱글곡 뮤직비디오에 데뷔전 마츠이 쥬리나가 출연하기도 하였다.#[7] 인터넷포털 라이브도어의 분식회계와 주가파동과 관련하여 호리에 타카후미 前사장이 체포된 사건. 사건이 일어나자 라이브도어의 주가는 폭락하였고 피해 주주는 2만 명이 넘었다.[8] 2010.12.19 O.A TV 도쿄『ソロモン流(솔로몬류)』인터뷰[9] 이 노래는 특히나 기념비적인 의의를 지니는데, 당시에 잘 다뤄지지 않았던 아이돌들의 이성문제(스캔들)를 다룬 '''첫 번째'''노래이다. 역시 대히트했다.[10] 자신들 말로는 이 최강자가 총감독보다 높은 지위라고 한다(...)[11] 레몬을 뒤집어 쓰고 했다.[12] 일각에서는 AKB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 구린 곡을 주는게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다.[13]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니다. 역으로 일본 CD 싱글 시장이 그렇게 오래 유지되었던 것이 갈라파고스화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14] 단적인 예시로 사건이 터지자 마자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와 겟잇뷰티 등 모든 방송이 이들의 출연 예정분을 전부 날려버렸고, 이 중 마리텔과 아이돌룸은 팬들과 엄청난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G마켓과 스쿨룩스 등도 바로 광고를 내린 뒤 새 모델로 급히 교체했다. 활동 재개 이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손을 내밀고 있긴 하다.[15] 유명 싱어송라이터, 2014년 사망.[16]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분 774회 참조. 링크 [17] 물론 이것도 1960년대 이후로 1,2년 간의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일본의 정계를 우익들이 꽉 잡고있으니까 그런 것일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일본이 북유럽마냥 좌파 정당들의 독무대나 다를 바 없었다면, 돈 냄새 잘 맡는 아키모토의 성격 상, 이때도 역시 친정부적인 경향을 띄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