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 성

 

1. 개요
2. 연혁
2.1. 전국시대 이전
2.2. 오다와라 전투
2.3. 에도시대
2.4. 근대
3. 답사 정보
4. 미디어에서의 묘사


1. 개요


오다와라성은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오다와라시(小田原市)에 있는 이다. 일본의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실상 일본 천하통일의 종지부를 찍는 오다와라성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2. 연혁



2.1. 전국시대 이전


오다와라 성은 호조 소운(北條早雲) 이하 후호조씨(後北條氏)의 본거지로 유명한데, 호조씨 이전에는 오모리(大森)씨의 거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여러 차례 다른 세력과 맞서 공방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후호조의 3대 호조 우지야스(氏康)의 시대에는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공격을 버텨내어 난공불락의 성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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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 성의 구조도.

2.2. 오다와라 전투


이 성을 배경으로 한 전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5대 호조 우지나오(氏直 다만 실권은 은거중이던 4대 우지마사가 쥐고 있었다) 때인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오다와라 전투이다. 호조 세력이 히데요시 휘하의 군단을 상대로 벌였던 농성전으로(히데요시 입장에서는 공성전) 히데요시는 난공불락의 오다와라성을 공략하기 위해 오다와라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 6만 명을 동원, 동서 550미터 남북 300미터 규모의 이시가키성(石垣城)을 80일의 단기간에 축성한다.
한 달이면 식량이 떨어져서 퇴각할 것이라고 기대한 우지마사는 2달이 지나도록 적군이 물러나지 않아서 당황한다. 당시에는 전쟁이 나면 병사들이 자신들이 먹을 쌀(약 한 달 분)을 짊어지고 참전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히데요시는 따로 병량 담당 부대를 만들어서, 식량을 조달했다. 이 무렵 6월 5일 다테 마사무네도 히데요시의 위세에 그에게 복종하기로 한다. 동맹관계였고 원군을 바랬던 다테의 배반은 호조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1590년 6월 25일 성을 가리고 있던 주변의 나무를 잘라내리고 명령하자, 하룻밤만에 출현한 이시카키성[1]을 보고 우지마사는 농성을 단념하고 7월 5일 항복하고 만다. 이것으로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의 꿈은 사실상 완성되었다. 우지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할복했다.
이 전투의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대로 본거지였던 미카와에서 관동지역으로 이봉시켰는데, 이것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운명을 가르는 모멘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에 새로운 본거지를 만들었고 이것이 현재 도쿄의 시작이다.
오다와라성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가 이에야스에게 성(城)과 영지 4만 5000석을 받아 오다와라성의 성주가 된다.

2.3. 에도시대


오쿠보 타다요 사후에는 타다요의 아들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가 성주가 되고, 영지 2만석을 가증 받는다. 에도막부가 세워 짐에 따라 오쿠보 타다치카의 오다와라성과 6만 5000석의 영지는 오다와라번(小田原藩)이 된다. 이후 타다치카는 로슈(老中)가 되어 막부에 들어갔다가 다른 로슈인 혼다 마사노부 부자와의 권력 항쟁에서 패해 가이에키[2]를 당하고, 이때 막부는 가이에키와 동시에 오다와라성의 9km나 되는 외성을 허물어버린다.
이후 오다와라번은 아베 마사츠구의 아베 가문, 이나바 마사카츠[3]의 이나바 가문을 거치다 1686년 오쿠보 타다치카의 손자인 오쿠보 타다토모가 11만 3000석을 받고 다시 오다와라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오다와라번은 오쿠보 가문이 다스리며 막말까지 이어진다.

2.4. 근대


메이지 초기에 천수각 등 건물을 부수고 오쿠보 신사가 들어섰다. 이후 이 건물들은 천황의 별장으로 활용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시민들 사이에서 오다와라성 복원 움직임이 활발해져, 천수각, 동문 등이 차례차례 복원되었다. 2014년 현재 혼마루 일대를 비롯한 성의 기본적인 부분은 복원이 완료되었으며, 일본 100명성 중 23번째로 선정되기도 했다.

3. 답사 정보


오다와라 시내에는 오다와라 성 외에 구경거리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일반 JR을 이용시 도쿄에서 편도 2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도쿄 출발 시 6시간 이상 여유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코네의 출입구이기도 하므로 묶어서 관광하는 것도 추천.
오다와라역 정문 방향으로 나와 직진하면 오다와라성 정문으로 통하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혹은 역의 정문에서 우회전하면 오다와라성 북문에 도착할 수 있다. 정문 방면으로는 해자와 동문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혼마루 일대에는 매점과 수공예품 가게, 천수각 등이 있다. 매점 앞에는 식사가 가능한 테이블이 여럿 있는데, 오다와라역에서 에키벤을 사서 여기서 먹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오다와라 역에서 북문쪽으로 가는 길에 타이토 스테이션이 생겼다. 전 4층. 지방이라 그런지 붐비지는 않는 편이다.
성 자체 출입은 무료지만 천수각은 입장료를 받는데,[4] 박물관과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후호조씨 5대와 오다와라성을 둘러싼 몇 차례의 공방전, 전근대 오다와라 주민들의 생활유물, 성을 복원하는 과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망대에서는 오다와라 시내를 모두 볼 수 있고, 히데요시가 지었다는 이시가키성(이치야성) 유적의 방향도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맑은 날에는 천수각에서 후지산을 볼 수 있다.

4. 미디어에서의 묘사


오다와라성 전투가 전국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중대한 사건이라 직간접으로 언급된다. 상술한 히데요시의 오다와라성 공략과 이시가키성 축조는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의외로 한국 사극에서도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되었는데 징비록에서 오다와라성의 반란과 진압과정을 놓고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가 대립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성에서 유래한 속담도 있다. 오다와라 성 공방전 당시 예상치 못하게 궁지에 몰린 호조 측은 항복이냐 철저항전이냐를 놓고 아무 의미 없는[5] 전략회의(評定, 효조)를 거듭했는데, 이것을 비웃는 의미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질질 끌거나 무의미한 회의, 논의를 두고 '오다와라 효조(小田原評定, 오다와라 전략회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1] 그래서 하룻밤만에 쌓았다는 일명 이치야성(一夜城)[2] 영지를 몰수 당함[3]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 카스가노 츠보네의 아들[4] 2016년 기준 500엔[5] 빠르게, 곱게 항복할수록 조건이 유리해진다. 어차피 진 싸움에서 쓸데없는 회의로 시일을 끄는 것 자체가 불리한 측에게는 크나큰 손해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