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슈 후지와라
1. 개요
일본의 동북지방(도호쿠)을 뜻하는 '오슈'를 지배했던 후지와라 가문의 지방정권.
2. 상세
헤이안 시대 말기에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의 일부가 당시에 막 야마토의 영토가 된[1] 오슈 지방으로 낙향하여 재청관인(在廳官人)이 되었고, 오슈 전역을 휩쓴 '''전9년의 역과 후3년의 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가 오슈 후지와라씨의 초대 당주로써 히라이즈미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 일문을 발전시켰다.
히라이즈미의 기반을 닦고, 오슈 후지와라씨의 초대 당주가 된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이 없었다.
기요히라의 아버지이자 후지와라 12세손인 후지와라노 츠네키요(藤原經淸)는 무츠 고쿠가(國衙)에 속한 재청관인이었고, 동시에 무츠 지역의 오쿠 6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호족 무츠(오슈) 아베씨[2] 의 사위였는데, 고쿠시(國司, 국사)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3] 와 무츠(오슈) 아베씨 사이에 현지 지배권을 놓고 충돌이 발생하자('''전9년의 역''') 고민 끝에 휘하 800기를 거느리고 장인인 아베 가문에 가담했다. 츠네키요가 아베 가문에 붙어버리고 전쟁이 9년을 끌며 고착화될 지경에 이르자 요리요시는 데와의 또 다른 후슈 호족 데와 기요하라씨(出羽淸原氏)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었고, 후지와라노 츠네키요가 처형된 뒤에[4] 기요히라 역시 죽임을 당해야 했으나, 츠네키요의 아내 즉 기요히라의 어머니(아베씨의 딸)가 데와 기요하라씨의 당주 기요하라노 다케노리(淸原武則)의 맏아들 다케사다(武貞)의 아내로 넘겨져 목숨을 부지했다. 기요히라의 어머니는 그와의 사이에서 이에히라(家衡)라는 아이를 낳았다. 기요히라는 원복을 치른 뒤 양아버지 다케사다의 성과 기요하라 집안의 돌림자 '히라(衡)'를 사용해 기요하라노 기요히라(淸原淸衡)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기요하라노 다케사다에게는 차후 기요하라씨의 당주가 될 사네히라(眞衡)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네히라는 데와 기요하라씨를 헤이시나 겐지와 같은 당주 1인이 독재적으로 다스리는 체제로 개혁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요하라씨 가신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기요하라씨를 섬겨왔으나 사네히라와 사이가 나빴던 기미코노 히데타케는 자신을 치려는 사네히라에 맞서 그의 이복 형제인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를 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사네히라에 맞서게 했다. 이 분쟁에 당시의 무츠노카미(陸奧守)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5] 가 개입해 사네히라를 도와 기요히라·이에히라를 대패시키고, 형제는 도망치던 중에 결국 요시이에에게 항복했다. 이후 사네히라가 급서하면서 다시금 요시이에가 나서서 옛 기요하라 집안 소유의 영지를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중재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가 이부(異父) 형인 기요히라의 저택을 급습해 기요히라의 처자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후3년의 역'''). 목숨을 건져 도망친 기요히라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청하여 이에히라와 싸웠고, 최종적으로 이에히라를 죽이고 승자가 되었다.[6]
무츠 아베씨의 피를 이은 인물이자 데와 기요하라씨의 양자로써 무츠·데와 양 지역을 장악하게 된 기요히라는 아버지의 성인 후지와라를 회복해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이후 다른 지역의 고쿠시로 전출되면서 사실상 오슈 전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기요히라는 가호(嘉保) 연간(1094년 ~ 1095년) 즈음에 지금의 이와테현 히라이즈미(平泉)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 정치·문화의 중심도시를 건설하는 데 착수했다. 1108년에는 주손지(中尊寺)의 중창불사를 행했는데, 기요히라 자신이 지은 주손지 공양원문의 필사본에는 "'''다시는 이 땅에서 전란의 참상이 벌어져서도 안 되고, 나와 같은 불행을 겪는 이가 나와서도 안 된다'''", "'''적이든 아군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상관없다. 구원이 필요한 자는 누구든 오라. 다 함께 공평하게 극락정토로 인도한다'''"는 신념으로 히라이즈미를 불교의 도시로 건설해 나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기요히라의 유지를 받들어 이후 가문을 이어받은 모토히라나 히데히라 모두 중앙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 내의 문제를 단속하거나 모츠지(毛越寺), 무료코인(無量光院) 등 광대한 사찰을 짓고 불교계의 후원자로써 사찰을 경영하는 데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주손지의 금당격인 곤지키도(金色堂)의 낙성식이 있고 그 이듬해에 기요히라는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의 시신은 주손지 곤지키도의 수미단(불단) 아래에 미이라 처리되어 안치되었다. 이후 기요히라의 아들 모토히라와 손자 히데히라의 유해도 미이라 처리되어 수미단에 안치되었는데, 시신을 미이라로 처리하는 것은 일본 열도 내에서도 아이누들의 매장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기요히라 자신도 스스로를 '''아즈마에비스(東夷)의 원추(遠酋)''', '''부수(俘囚)의 우두머리(上頭)'''로 표현하였다.
당시 동북 지방에서는 금과 명마가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를 조정과 셋칸케(攝關家)에 바치고, 오슈 후지와라씨는 번영을 누렸는데, 오슈의 중심지 히라이즈미는 교토에 버금가는 도시였다고 여겨진다.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아들인 2대 당주 '''모토히라(基衡)'''는 고지 2년(1143년)에 모로츠나의 후임으로 무츠노카미로 부임해 온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와 사돈을 맺고, 조정에 공물을 보내며 조정에서 파견해 오는 지방관을 대부분 받아들이는 등 겉으로는 복종하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현지 장원에 대한 검주(토지 조사)를 단행하려는 것을 무력시위까지 벌여서 막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무력시위의 선두에 섰던 가신 사토 모토하루를 구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딸과 아들 히데히라의 혼사도 조정으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지방관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 연줄을 통해 조정에 로비를 넣어서 조정에서 보내는 지방관들 거의가 오슈 후지와라씨와 혈연적으로 혹은 지연으로 엃혀있는 사람들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오슈 후지와라씨 또한 지방의 다른 무사들처럼 현지 셋칸케 소유의 장원을 관리하고, 독자적인 무사단을 키우며 반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였다. 히데히라의 시대에 오슈 후지와라씨의 군세는 무츠·데와 두 쿠니를 합쳐 '17만 기(騎)'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가 오슈 현지에 있던 셋칸케 소유의 장원 12곳 가운데 요리나가 자신이 상속받은 장원의 연공(年貢)을 늘릴 것을 요구해 온 것에 대해 5년 동안 공방을 벌인 끝에 당초 요리나가가 요구했던 양보다 대폭 줄인 연공만을 바치는 것으로 문제의 타결을 보는 데 성공했고, 요리나가는 이에 분개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자신의 일기 <다이키(台記)>에 이 사건을 기록하기를, 분개하는 요리나가 옆에서 가신이 "'''원래 흉노들은 예의를 모르는 족속들입니다. 마님께서 너그러이 넘어가시지요'''"라고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
3대 당주 '''히데히라'''의 대에 이르른 가오(嘉應) 2년(1170년) 5월 25일, 히데히라가 진주후쇼군(鎭守府將軍)의 지위를 얻으면서 오슈 후지와라 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후지와라노 히데히라가 진수부장군으로 임명된 것은 당시 교토를 장악하고 있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헤이케 정권이 오슈 후지와라씨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안배였고,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도고쿠 각지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등 카와치 겐지 세력이 거병하자 다시금 요와(養和) 원년(1181년) 8월 25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종5위상 무츠노카미로 서임했다.
당시 조정의 구교였던 쿠조 카네자네(九條兼實)는 히데히라에 대한 관직 임명을 두고, 자신의 일기 《교쿠요(玉葉)》에서 "'''오슈의 이적에게 북쪽의 이적(에미시)를 막는 진주후쇼군의 자리를 맡기다니, 난세의 시작이 될 일'''", "천하의 수치가 어디 이같을 수 있으랴, 슬프고도 슬프구나"라고 한탄하는 말을 남겼고, 산기(參議) 요시다 츠네후사(吉田經房)도 "사람으로서 한탄스러워 차마 기록할 수도 없다"고 자신의 일기 《깃키(吉記)》에 적었다. 가만 보면 기요히라에서 모토히라·히데히라 3대 당주 모두가 자칭·타칭 '이적'·'오랑캐' 등으로 칭해지고(혹은 지칭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오슈 후지와라씨가 그저 헤이케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어서, 겐페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슈 후지와라씨는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겐지를 견제하기 위해서 관위를 미끼로 자신들을 끌어들이려는 헤이케의 의도를 히데히라는 훤히 꿰뚫고 있었고, 헤이케의 감시를 받고 있던 샤나오(훗날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로 오자 그를 숨겨주었으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나 헤이케의 군사 동원 요청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구리가라 고개에서 헤이케에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게 축하한다면서 명마 두 필을 보내거나, 헤이케에 의해 불타버린 도다이지(東大寺)의 재건과 대불의 도금을 위해 벌인 모금에서 요리토모보다 다섯 배나 많은 황금 5천 냥을 기부하는 등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교토의 구라마데라에 구금되어 있다가 달아나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온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거두어 숨겨주고 헤이케로부터 보호해 준 것도 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뜻이었는데, 요리토모가 거병한 뒤에 히데히라 자신의 반대도 무릅쓰고 몰래 히라이즈미를 빠져나가려는 요시츠네를 어쩔 수 없이 보내 주면서도 자신의 가신인 사토 츠구노부·이에노부 형제를 붙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형 요리토모와 대립하게 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왔을 때도 그를 다시 한 번 받아주었고, 요리토모로부터 은닉해 주기까지 했다. 죽기 직전까지 야스히라 등 자신의 아들들에게 "'''절대로 요시츠네를 요리토모에게 넘겨주지 말고,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며 형제가 단합해 요리토모와 맞서 히라이즈미를 지켜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
헤이케를 멸망시킨 시점에서 이미 다른 상대가 없게 된 요리토모에게 거슬려 쫓기게 된, 중립을 유지하고 히라이즈미를 지키려는 히데히라에게 있어 아무 도움이 되기는 커녕 있어봐야 짐짝밖에 되지 않을 요시츠네를 받아준 것은 오히려 히데히라 자신이 그만큼 정세를 읽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안타깝게도 히데히라의 안목은 아들에게까지 전수되지 못했다). 겐페이 전쟁이 끝나고 헤이케가 몰락한 시점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눈은 어쩔 수 없이 가마쿠라의 배후에 위치한 오슈 후지와라 씨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점을 히데히라는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슈 후지와라씨는 도호쿠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무렵까지는 가마쿠라 막부도 간토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니 큰 차이는 없었던 셈. 진수부장군을 자칭하는 후지와라씨에 라이벌 의식을 느껴서 정이대장군의 지위를 요구하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히데히라가 죽은 뒤, 다음 당주가 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는 "요시츠네를 내놓든지 아니면 멸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굴복해, 끝내 아버지의 유언도 어기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급습해 살해하고 그 목을 보냈다. 하지만 요리토모는 "'''난 내놓으라고 했지, 죽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라며 곧 오슈를 공격했고, 요리토모가 지휘하는 20만 대군의 공격에 오슈는 초토화되고, 히라이즈미가 불바다가 되었다[7] . 요인들은 포로로 잡혀와서 참수되었고, 영지는 몰수당하는 참사를 겪으며 오슈 후지와라 씨의 영화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보호하고 숨겨준 것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인데, 이제 와서라도 당신의 명을 받들어 요시츠네를 처리한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라며 요리토모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가신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오슈 후지와라씨는 멸망하였다.
아라키 히로히코가 히라이즈미 홍보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가 존재한다.# 마침 히라이즈미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점이 동일본 대지진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이와테 현에서는 히라이즈미 건설의 이념을 동일본 대지진 피해의 재건에 투영하고자 한다는 결의로 '도호쿠 부흥 히라이즈미 선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아라키 선생에게[8] 해당 선언의 일러스트를 받았다고.
3. 기타
- 징기스칸 4에서는 1번 시나리오에서 가마쿠라 정권과 함께 일본땅에 있는 두 세력 중 하나로 나온다. 휘하에 최상급 장수인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가 있고 이들의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고려로 플레이하는 경우 최충헌으로 이 둘을 빼 오는 플레이가 고려 플레이의 필승법이다. 가만 놔두면 거의 가마쿠라 정권에게 망한다.
- 토탈 워: 쇼군2/사무라이의 태동에서 히라이즈미 후지와라라는 이름으로 미나모토, 다이라와 함께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1] 그 이전까지 오슈 지역은 일본과는 별개로 아이누계통의 종족들이 별개의 세력을 이루웠다.[2] 일본의 야마토 조정에 투항한 에미시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조정에 항복한 에미시를 '''후슈(俘囚)'''라고 했는데, 이들은 일본 각지에 사민되어 조세나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현지 군사력으로 동원되었다.[3] 무가 '''카와치 겐지'''의 초대 당주 요리노부(賴信)의 아들로 이 사람의 후손이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였다.[4] 후지와라노 츠네키요는 원래 무츠 고쿠가에 속한 재청관인이었으나 고쿠가를 배신하고 아베에 붙었다고 해서 일부러 이를 깬 칼로 톱질하듯이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5]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로 흔히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郞義家)'''로 알려진 인물이다.[6] 후3년의 역은 전9년의 역과는 달리 조정으로부터 공적인 전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시이에는 자신의 개인 연줄로 도고쿠 무사들을 동원해야 했고, 조정에서 후3년의 역이 요시이에 개인의 사적인 전투라 해서 은상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을 때 '''개인 사재를 털어서 무사들에게 은상을''' 주었기 때문에, 도고쿠 무사단 사이에서 요시이에와 겐지 일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7] 주손지 등의 사찰은 황실과도 연줄이 있다고 해서 요리토모가 특별히 보호를 명했으므로 무사했다.[8] 아라키 히로히코 역시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즉 도호쿠 지방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