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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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島渚
Oshima Nagisa
(1932년 3월 31일 ~ 2013년 1월 15일)
쇼치쿠 입사 5년째인 27살 때 만든 청춘 잔혹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다룬 작품으로 "일본 영화계의 최전방, 누벨바그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쇼치쿠와 불화를 일으킨 후, ATG라는 제작사를 차려 일본 인디 영화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대표작은 《감각의 제국》[1] . 그 외에도 교사형이나 한국전쟁을 다룬 《윤복이의 일기》, 《일본의 밤과 안개》가 유명하다. 그 후로 뭔가 흑막이 있어보이면, '''안개''' 운운하는 게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
주로 성과 정치를 화두로 담았으며, 대표작인 《감각의 제국》은 그 과격한 묘사 때문에 꽤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감각의 제국》 이후 해외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아 《열정의 제국》은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Lawrence)> 역시 오시마 감독의 대표작. 이 영화에 사카모토와 더불어 데이비드 보위, 톰 콘티, 기타노 다케시 등이 출연. 빠방한 출연진이다.
감각의 제국을 기점으로 작품 세계가 달라지는 감독인데, 전반적으로 감각의 제국 이전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중적으로는 후기작이 잘 알려졌지만, 아무래도 전기랑 달리 독기가 빠졌다는 평가가 대세. 실제로 영화사 해산 이후 경색되어가는 일본 영화 제작 환경에 실망했는지, 후기엔 해외 합작으로 활동하는 과작 감독이 되버린다. 맥스 내 사랑은 아예 프랑스에서 만들었을 정도.
12년만에 쇼치쿠랑 만든 《고하토》 이후 반신 불수에 언어 장애까지 겹쳐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태였고, 13여 년간 투병생활 끝에 2013년 1월 15일에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정치적인 입장은 좌익으로, '우리들은 피해자(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아니다. 가해자다. 가해자, 범죄자의 입장에서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하는 질문을 추구했다. 그 원인에는 빈곤, 가난이 있었다는 시대적 병리가 있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어릴 적에 태평양 전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남은 경영학자이며, 차남은 영화 감독이라고 한다.
大島渚
Oshima Nagisa
(1932년 3월 31일 ~ 2013년 1월 15일)
일본의 영화 감독. 쇼치쿠 뉴웨이브(누벨바그)라는 일본 영화사에 중요한 흐름을 이끌었던 감독이다. 오카야마현 타마노시 출신. 1950년, 교토대학 법학부에 입학, 다음해 학생운동으로 제적.태평양 전쟁 중에는, 덴노 폐하를 위해 죽으라고 배웠다. 그런데 전후에는 이런 가치관이 180도 뒤집어졌다. 높으신 분이 말하는 것은 전혀 신용할 수 없다. 신용한다면 엉망진창이 된다. 국가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들은 속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오시마 씨한테는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그럴듯한 말을 하면 그런 것은 다 수상하다, 국민을 홀리려고 지껄인다. 오시마 씨의 영화는 이런 생각을 고발하기 위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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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널리스트 타하라 소이치로
쇼치쿠 입사 5년째인 27살 때 만든 청춘 잔혹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다룬 작품으로 "일본 영화계의 최전방, 누벨바그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쇼치쿠와 불화를 일으킨 후, ATG라는 제작사를 차려 일본 인디 영화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대표작은 《감각의 제국》[1] . 그 외에도 교사형이나 한국전쟁을 다룬 《윤복이의 일기》, 《일본의 밤과 안개》가 유명하다. 그 후로 뭔가 흑막이 있어보이면, '''안개''' 운운하는 게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
주로 성과 정치를 화두로 담았으며, 대표작인 《감각의 제국》은 그 과격한 묘사 때문에 꽤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감각의 제국》 이후 해외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아 《열정의 제국》은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Lawrence)> 역시 오시마 감독의 대표작. 이 영화에 사카모토와 더불어 데이비드 보위, 톰 콘티, 기타노 다케시 등이 출연. 빠방한 출연진이다.
감각의 제국을 기점으로 작품 세계가 달라지는 감독인데, 전반적으로 감각의 제국 이전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중적으로는 후기작이 잘 알려졌지만, 아무래도 전기랑 달리 독기가 빠졌다는 평가가 대세. 실제로 영화사 해산 이후 경색되어가는 일본 영화 제작 환경에 실망했는지, 후기엔 해외 합작으로 활동하는 과작 감독이 되버린다. 맥스 내 사랑은 아예 프랑스에서 만들었을 정도.
12년만에 쇼치쿠랑 만든 《고하토》 이후 반신 불수에 언어 장애까지 겹쳐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태였고, 13여 년간 투병생활 끝에 2013년 1월 15일에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정치적인 입장은 좌익으로, '우리들은 피해자(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아니다. 가해자다. 가해자, 범죄자의 입장에서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하는 질문을 추구했다. 그 원인에는 빈곤, 가난이 있었다는 시대적 병리가 있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어릴 적에 태평양 전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남은 경영학자이며, 차남은 영화 감독이라고 한다.
1. 작품 일람
- 내일의 태양(明日の太陽) (1959)
-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 (1959)
- 청춘잔혹이야기(青春残酷物語) (1960)
-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1960)
-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 (1960)[3]
- 사육 (1961)
-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四郎時貞) (1962)
- 작은 모험 여행(小さな冒険旅行) (1963)
- 나의 벨렛(私のベレット) (1964)
- 윤복이의 일기(ユンボギの日記) (1965) -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가지고 만든 다큐멘터리 사진 영화. 크리스 마르케의 활주로랑 비슷하다. 오시마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당시 내한했다고 하며, 이때 찍은 사진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 열락(悦楽) (1965)
- 백주의 살인마(白昼の通り魔) (1966)
- 닌자 무예장(忍者武芸帳) (1967)
-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無理心中日本の夏) (1967)
- 일본춘가고(日本春歌考) (1967)
- 교사형(絞死刑) (1968)
- 돌아온 술주정뱅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 (1967)[4]
- 소년(少年) (1969)
- 신주쿠 도둑 일기(新宿泥棒日記) (1969)
- 도쿄전쟁전후비사(東京戦争戦後秘話) (1970)
- 의식(儀式) (1971)
- 그 여름날의 누이(夏の妹) (1972)
-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ーダ) (1976)
- 열정의 제국(愛の亡霊) (1978)
- 전장의 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1983)
- 내 사랑 맥스(マックス、モン・アムール) (1987) - 침팬지와 수간 (...)하는 샬롯 램플링 등장하는 풍자 영화나, 범작 평가를 받고 묻혔다.
- 고하토(御法度) (1999) - 감독의 유작.
[1] 1930년대 실제로 일어났던 '아베 사다 사건'을 다룬 영화. 퀸시 존스가 이 영화를 보고 노래 〈사랑의 싸움(Ai no Corrida)〉을 만들었다고 한다.[2] 마츠모토 세이초의 저서 일본의 검은 안개도 영향을 주었다.[3] 안보투쟁을 다룬 작품. 일본 좌익 운동에 비판적 시각으로 의문을 던졌다. 영화는 개봉된 지 사흘만에 회사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상영 중지가 됐다. 오시마는 맹렬히 항의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해 독립 프로덕션을 창립한다.[4] 같은 타이틀의 노래 음반이 500만 장이 팔린 히트송의 포크 그룹을 주연으로 발탁해서 망명 한국인을 소재로 일본인의 정체성을 묻는 작품인데 일주일만에 상영중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