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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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게닌(예능인)이자 영화감독이다.
90년대 소나티네와 하나비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으며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감독'''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와 함께 일본 게닌 BIG 3로 일컫어지는 일본 연예계의 '''최대 거물''' 중 한 명이다.
2. 학창 시절
1947년 도쿄도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6]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는 야쿠자가 눈 앞에서 죽는 모습도 목격할 정도로 심히 막장이었는데[7] 이 때의 경험이 오히려 영화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고 한다.[8]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조예가 깊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권투를 배우는 등 스포츠 면에서도 꽤나 우수했던 다케시는 어머니의 추천과 격려로[9] 1966년 메이지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이수학점인 140학점 중 106학점까지 수료한 상태에서 '''전공투'''[10] 에 연루되어 대학에서 제적당하게 된다.[11] 사실 다케시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한 것이었기에 딱히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신입생때는 낮선 환경에 적응이 안되어 수업을 째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당시 유행하던 재즈를 감상하곤 했다고. 학생운동에 처음 가담한 계기도 같이 대학을 다니는 동창들이 너나할것 없이 다 전공투에 빠지는 것을 보고 '전공투에 적을 두면 대학 문화에 조금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였으며 학생운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공투 출신 치고는 좌익 사상에 그다지 관심없는 면을 보인다.
3. 연예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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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학생운동 이력 때문에 건물 철거공, 택시 기사, 주유소 직원, 클럽 웨이터같은 고된 일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다케시는 1972년, 스트립쇼 극장 ‘프랑스좌’의 엘리베이터 보이가 되었고 직후 프랑스좌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비트 기요시의 제안으로 "투비트"라는 이름의 게닌(개그맨) 콤비를 결성하게 된다. 기요시의 말에 의하면 "손님으로 들어온 야쿠자가 행패를 부릴 때도 프랑스좌의 사장에게 혼날때도 겁없이 덤비는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고[12] 두 사람은 프랑스좌를 경영하던 개그맨 센지부로 후카미로부터 개그맨으로서의 기본기를 배운 후 프랑스좌를 나와서 전국의 술집, 카바레 등을 전전하다가 오사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만담 콤비 B&B의 영향을 받아 만담으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쇼치쿠 극장에서 특유의 독설 개그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그 결과 투비트는 1975년 오오타 프로덕션과 계약에 성공, 본격적으로 TV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나 데뷔 초기에는 시사 풍자도 서슴없이 하는 독설가 컨셉이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잔인한 개그로 언어 폭력을 행사하는 연예인'이라는 항의를 받았을 정도로 호감가지 않는 개그맨 이미지가 강했기에 방송 출연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13] 이후 투비트는 절치부심하여 1979년부터 요시모토 흥업 소속의 젊은 게닌들과 함께 <The Manzai>[14][15] 에 츨연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브레이크하여 '대학물을 먹은 엘리트 개그맨'이라 불리면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4. 단독 활동과 전성기
1981년, <The Manzai>가 종영된 이후 비트 기요시가 만담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하여 투비트로서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16] 비트 다케시는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ビートたけし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이라는 라디오 방송과 <우리들은 익살족 (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단독 활동을 시작한다.
1981년 1월 1일 부터 송출을 시작하여 1990년 12월 27일에 종영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은 비트 다케시가 처음으로 투비트로서가 아닌 단독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초대된 연예인 게스트에게 시사 문제에서부터 그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얘기 등을 질문하는 거침없는 토크[17] 와 라디오 방송임에도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혁신적인 기획들을 시도, 일본의 일반인들은 물론 연예계 종사자들에게도 큰 인기와 관심을 끌어서 '전설의 올 나잇 일본'으로 불린다.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은 비트 다케시가 만자이붐 시절부터 프라이데이 습격사건 후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중도 하차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1991년 2월 14일부터 1996년 3월 23일까지 후지 테레비에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을 TV프로그램으로 만든다는 기획하에 <기타노 팬클럽>이라는 TV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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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익살족(효킨족)>은 '만담을 주로 했던 2세대 게닌(개그맨)들이 소속사에 얽매이지 않고 연합해서 출연하는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포맷으로 방영된 The Manzai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다.[18]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토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효킨족은 비트 다케시와 아카시야 산마의 코미디 드라마 <타케짱 맨>, 당시 TBS 테레비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포멧을 패러디한 <시마다 신스케의 웃긴 베스트 텐>, 개그맨들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19] <웃긴 프로레슬링 시간>, 프로그램 말미에 NG 장면을 보여주고 NG를 낸 개그맨에게 물벼락 벌칙을 주는 모습을 방영하는 <웃긴 참회실>[20] 등 참신한 코너들로 당시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던 코미디언인 더 드리프터즈의 대표방송 8시라구! 전원집합을 종영시켜버린 프로그램이다. 더 드리프터즈와 효킨족 게닌들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8시의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장군> 1986년 1월 14일자 방송.
비트 다케시와 다케시 군단이 부른 <抱いた腰がチャッチャッチャッ> 1984년 10월 15일 <밤의 히트 스튜디오>.[21]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된 니혼 TV <천재! 다케시의 기운이 솟는 TV>의 주제곡 I'll be Back Again을 부르는 비트 다케시.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과 <우리들은 익살족>에 출연하여 스타덤에 오른 비트 다케시는 이러한 인기를 발판으로 1983년, 후배 코미디언 집단 다케시 군단[22] 을 결성하여 당시 막 부흥하기 시작하던 버라이어티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한 다케시는 같이 출연한 다케시 군단이나 다른 출연자들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가 하면, MC로서 코너를 진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쌩뚱맞게 탭댄스[23] 를 추는 돌발행동[24] 을 하는 등 당시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코미디 스타일을 선보임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동시에 특유의 마초적인 카리스마와 장난기 가득한 청년이라는 양면적인 이미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그 결과 비트 다케시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골든 타임 시간대(저녁 7시 ~ 10시) 예능 프로그램 대다수에 출연하는 국민 코미디언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 당시 다케시의 유행어 '''코마네치'''는 지금도 일본 예능에서 간간히 쓰인다. 비트 다케시의 인기는 그의 칸무리 방송들[25] 이 해당 시간대의 최고 시청률을 갱신할 정도로 대단했으며 이 인기를 등에 업고 다케시가 부른 노래, 출연한 광고[26] 등도 높은 판매고를 달성했다. 심지어 비트 다케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게임까지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막장 게임으로 유명한 비트 다케시의 도전장.
- 슈퍼 자키 (니혼 TV)
- 천재! 다케시의 기운이 솟는 TV (니혼 TV)
-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장군 (TV 아사히)
- 풍운! 다케시성 (TBS 테레비)
- OH! 다케시 (니혼 TV)
- 세계 통째로 HOW 매치 (마이니치 방송)
- 우리들은 익살족 (후지 TV)
-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일본 (닛폰 방송)
훗날 비트 다케시는 "한창 전성기 시절, 너무 통장에 돈이 많아 '내가 이 돈의 반이라도 쓰고 죽을 수 있을까?' 하고 겁이 나서 일부러 값비싼 술과 음식 등을 먹고 수시로 소프랜드에 드나들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자동차광으로 유명한 다케시는 포르쉐를 뽑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인기를 얻은 뒤 실제로 포르쉐를 구입했는데 운전석에 앉아서 직접 운전을 해봐도 자신이 포르쉐의 오너라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후배 개그맨에게 포르쉐를 몰게하고 자신은 다른 차를 타고 포르쉐가 주행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이때 비로소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5. 프라이데이 습격사건
그렇게 잘나가던 비트 다케시는 1986년 12월 9일 벌어진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큰 위기를 겪는다. 사건의 발단은 비트 다케시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던 소속사 오오타 프로덕션이 '유부남인 비트 다케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라는 제보를 언론사에 내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자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잡지 프라이데이는 불륜녀로 제보된 21세의 전문학교 여성[27] 을 폭행하거나 비트 다케시의 가족을 스토킹하는 등 막무가내로 취재를 벌였고 다케시 소유의 별장에서 그와 불륜녀가 같이 있는 장면을 포착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단단히 화가 난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우는 후배 게닌들 10명과 함께 1986년 12월 9일 오후 3시, 잡지사를 무단 점거 후 소화기를 사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편집부원과 편집장을 폭행한다. # 사건 발생 직후 기자회견.
이후 비트 다케시는 기물파손과 주거침입을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987년 6월 10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는다. 판결 후 기자회견. 재판 이후 비트 다케시는 1987년 8월부터 방송에 컴백할 수 있었다. 이는 비트 다케시의 인기가 높기도 했거니와 프라이데이 자체가 워낙 악명 높은 주간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사건의 여파로 주간지의 보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고토다 마사하루 당시 관방장관 역시 "비트 군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직접 행동은 안 된다."라고 발언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비트 다케시는 "비트 군이 아니라 다케시 군이지"라고 했다고(…). 공교롭게도 프라이데이의 발행사인 코단샤의 사장이 이 시기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 사건의 충격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2011년 시마다 신스케와 야쿠자간의 커넥션이 폭로되어 연예계 은퇴성명을 발표하자, 비트 다케시가 "나는 프라이데이 사건 이후 시마다 신스케처럼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었다. 우익단체는 일반적으로 야쿠자를 등에 업고 있기에 이러한 압력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소속사나 경찰도 내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우익단체와 연관되어 있는 야쿠자 스미요시 연합회를 직접 찾아가서 두목인 호리 마사오에게 이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며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폭력단과의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일었다. 다만, 다케시는 "나는 시마다 신스케와는 다르다. 야쿠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도 없고, 돈을 지불한 적도 없다. 그리고 시마다 신스케와는 《우리들은 익살족》에 같이 출연했을 당시부터 사적으로는 친하지 않았고 익살족 종영 이후부터는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일본내 여론은 "야쿠자에게 무릎 꿇고 조아리긴 했지만, 부탁은 안 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런 영화가 나온 거군", "왜 하필이면 다케시는 '폭력단 배제 조례'[28] 가 시행되기 직전인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갑작스레 풀어놓았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간문춘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야쿠자 간부에게 연말 선물을 주거나 상을 당한 이에게 헌화한 것을 보면, 단지 '타인에 의해 계획된 1회성 만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에 다케시는 "내가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은 일단 그들에게 신세를 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걸 능숙하게 하고 빠져나오는 것도 본인의 재주"라고 답했다.
이에 한 일본 연예계 관련 종사자는 "국민 MC[29] 이자 개그맨인 시마다 신스케가 야쿠자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것이 폭로되고 일본 대중들이 소문으로만 듣던 연예계와 야쿠자간의 커넥션을 직접 접하자 일본 연예계의 거물인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나서서 '연예인과 야쿠자의 이 정도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밝혔다.#
6. 영화 활동
1983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에서 주연인 데이비드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출연하며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1988년, 비트 다케시는 당시 자신의 소속사였던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나와서 오피스 기타노를 설립하고 다케시 군단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다. 또한, 비록 TV에는 계속 출연하고 있었지만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방송계에서 입지가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던 다케시는 이를 타개하게 위해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추천으로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를 감독하면서 영화계로 진출하게 된다.
이후 비트 다케시는 《3-4×10월(月) (1990)》,《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1991)) 등을 감독하면서 재기에 성공하고 《소나티네 (1993)》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어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으며 제 2의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비트 다케시의 감독 데뷔는 쉽지 않았다. 코미디언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골때리게 웃기는 천재 코미디언"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위의 사건이 발생한 후, 갑자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몇 년 동안 대중들의 분노어린 평가와 숱한 조롱을 받은 것. 비트 다케시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까지 수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 비트 다케시는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다.''' 1991년 12월에는 비트 다케시의 소개로 아사하라 쇼코가 방송에 출연하기까지 했다.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일으키고 해당 이력이 다시금 회자되자 비트 다케시는 "나는 옴진리교의 출가 신도[30] 가 아니다. 그저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운영하는 요가 교습소에서 어머니의 병과 자신의 고질병인 신경통[31] 을 치료받은 것이 고마워서 그와 연락을 종종 했던 것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는 아사하라 쇼코를 그냥 좀 재밌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옴진리교가 전파를 타게 도와달라는 아사하라 쇼코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간 것과 옴진리교가 그렇게 위험한 종교였는지 몰랐던 것은 반성하지만 따지고보면 나도 옴진리교의 피해자 중 한사람이다."라며 결백을 호소하였다.
1994년 8월 2일,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과의 연회가 끝난 후 술에 만취한채로 불륜녀집으로 가다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또 다시 크나큰 위기를 겪는다. 당시 비트 다케시의 상태는 살아있다는게 기적일 정도로 처참했다. 도로 가로등 한가운데 피투성이로 쓰러진 그를 맞은편 차선에 달려오던 택시기사가 발견했으며[32] 당시 사고로 함몰된 그의 얼굴뼈 전체를 복구하기 위해 긴급 프로젝트와 의료진이 투입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후유증으로 그는 얼굴 일부가 마비되어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물론, 후각 신경이 마비되고 안구의 초점이 흐려졌으며 극심한 두통에까지 시달린다고 한다. 2020년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있는듯하다. '자고 일어나면 병원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한다고. 또한 '''다시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음주운전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대중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 아내와도 이혼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참고로 퇴원 직후 일그러진 얼굴로 토크쇼를 하듯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 일 이후로 영화 감독으로서의 성향이 크게 바뀐다. 사고 전에는 죽음이나 자살을 미화하는 장면이 영화에 많이 나오곤 했는데 이 이후로는 그런 묘사가 많이 사라지게 된다. 본인 말로는 이 사건 전에는 죽음에 대해서 동경이나 환상이 있었으나 사고 이후 그게 아닌 걸 깨달았다고.
1995년 여름, 비트 다케시는 제 9 회 'FNS의 날 1 억 2500 만명의 슈퍼 꿈의 열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여러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1996년,《키즈 리턴》을 발표하며 감독으로 재기하였다. 1997년에는 《하나비》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참고로 하나비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번째 일본 영화였다.[33] 하나비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충공깽스러운 발언을 했던 것이 은근히 유명하다. 1999년에는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으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였다. 2003년 개봉된 장님 검객을 주연으로 한 《자토이치》 또한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일본의 거장 감독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2010년에는 오랜만에 야쿠자 영화 《아웃레이지》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었다.
비트 다케시의 영화 촬영장은 하드하기로 유명하다. 카세 료가 밝히길 리허설 한 번, 슛 한 번에 촬영이 완료되며 이 때 실수하면 해당 장면이 그대로 날아가버린다고...《Dolls》, 《아킬레스와 거북이》, 《아웃레이지 파이널》 등에 출연했던 배우 오오모리 나오는 "다케시 감독은 배우에게 '무슨무슨 장면을 찍을 것'이라는 설명을 하지 않고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아웃레이지 파이널 촬영을 할 때는 어느 날 촬영장에 가보니 듣도보도 못한 기관총과 우산이 놓여있어서 직감으로 '아 이런 장면을 촬영하나보다' 하고 다케시 감독이 없는 사이에 우산 너머로 총을 쏘는 장면을 연습했다."고 말했다. 오오스기 렌은 "이처럼 긴장감 넘치는 다케시의 촬영 현장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빈혈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다케시는 "내가 만담 개그맨 출신이라서 그렇다. 나는 연기에 돌입하기 전에 거듭 리허설과 테스트를 하고 감독에게 계속해서 리테이크 요청을 하는 배우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연기 생활을 시작한 코미디 쪽에서는 신선한 연기를 NG 없이 한큐로 쭉 하는게 중요하다. 배우가 계속 같은 연기를 하면 이미 어떤 개그가 나올지 아는 관객들이 웃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2015년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 외지인 역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당시 나홍진 감독에게 "미안하지만 못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대신 일본의 중견배우 쿠니무라 준이 캐스팅되었다. 재미있게도 쿠니무라 준은 기타노 다케시가 출연한 피와 뼈, 연출도 한 아웃레이지에 출연한 바 있다.
여담으로 도조 히데키 역할을 한적이 있다. 그것도 '''두번이나''' 2009년 TBS 2부작 특집극 '그전쟁은 무엇 이었는가 일매개전과 도조 히데키'에서 도조역을 맡아 일본 정부 수뇌부가 어떤 과정과 상황에서 개전하였는지를 보여주었고, 2019년 테레비 도쿄의 특집극 '두개의 조국'에서는 극동군사재판에 참석한 도조를 연기 하였다.
6.1. 감독 작품
'''굵은 글씨'''는 주연까지 맡은 작품.
- 그 남자 흉폭하다 (1989년)[34]
- 3-4×10월 (1990년)
-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1991년)
- 소나티네 (1993년)
- 모두 하고 있습니까 (1995년)[35][36]
- 키즈 리턴 (1996년)
- HANA-BI (1998년[37] )
- 기쿠지로의 여름 (1999년) - 꼬마와 동행하는 아저씨 역.[38]
- BROTHER (2000년)
- Dolls (2002년)
- 자토이치 (2003년) - 자토이치역. 맹인검객.
- TAKESHIS' (2005년)[39]
- 감독만세! (2007년)[40]
- 아킬레스와 거북이 (2008년)[41]
- 아웃레이지 (2010년)
- 아웃레이지 비욘드 (2012년)
- 류조와 일곱 앞잡이들 (2015년)
- 아웃레이지 파이널 (2017년)
- 아날로그[42]
- 목[43]
6.2. 다케시 영화의 특성
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작풍은, 어떤 사조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연출 기법로 이뤄져 있으며, 강렬한 폭력과 무뚝뚝한 유머의 결합이 돋보인다. 같은 일본 감독으로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머와 진지함을 동시에 가진 일본의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차없는 딴지와 독설을 날리는 코미디언으로도 일본 내에서 열심히 활약 중. 자토이치가 흥행한 이후로는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출연할 때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출연한다. 배우로서도 비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케시가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에서는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감독으로서는 물론 기타노 다케시 명의) 2004년작인 다케시즈는 이런 코메디언인 비트 다케시와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난해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자세히 알고 있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감독 만세는 감독으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한 영화. 좀 더 코미디에 가깝다.
1994년 전후로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을 구분짓는 경우가 많다. 이는 1994년 이전 작품들은 죽음이나 자살을 동경하는 정서가 깊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 기타노 다케시가 사고로 임사체험까지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겨나 그 이후로는 삶을 강조하는 작품이 많다. 그후로도 자살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작품이 종종있는데 안타깝게 그리지 미화하는 연출은 별로 하지 않는다.
다케시 영화의 교집합적 특징이라면, 1) 롱테이크 2) 서정성과 폭력성이라는 부조화의 앙상블 3) 희극성 4) 심리적 상징성 5) 히사이시 조 6) 자기반영 7) 비슷한 배우 8)냉소적인 시선 등이다.
롱테이크 장면이 많다. 대사없이, 카메라 시점 변화 없이 하나의 테이크를 그대로 쭈욱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는 몇분 이상 가기도 한다. 처음 보면 감정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단순한 관조와 다른 그 시선을 느끼는게 다케시 영화의 매력.
폭력성이 상당하다. 몇몇 작품에선 고어적인 연출도 꽤 보인다.[44] 맥락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공격적 연출로 인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하하하 웃거나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서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장면에서 갑자기 등장인물이 분노를 표출하며 구타를 하거나 총을 쏜다. 특히 야쿠자 소재의 영화들일 경우 대부분 폭력성을 전반에 깔고 있으며 여과없는 강렬한 공격성 자체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폭력성과 대비되는 코미디, 개그, 웃음이 많다. 코미디 소재의 영화가 아니라 야쿠자 영화들에서 특히 더 그렇다. 정말 심각한 분위기에서 냉혈한 야쿠자들의 격렬한 폭력성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동일인물들의 아이같은, 유치한 행동들을 통해 실소를 유발시키는데. 이러한 아이러니가 그의 영화의 매력 중 하나.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단서나 아이템들을 영화 내에서 반복해서 늘어놓기도 하며, 주요 소재들은 영화를 뛰어넘어서 반복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자주 사용되는 것이 그가 직접그린 그림.
실제로 다케시는 화가로도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며,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 2008년 영화 아킬레스와 거북이[45] 는 화가로써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때 일단 기-승-전-결의 의미를 가진 4개의 그림을 그린 후[46] 그 그림들을 바탕으로 크랭크인에 들어가서 촬영 시 즉흥적으로 구체적인 영화 내용을 만든다고 한다.
그의 영화들의 배경음악은 대부분 히사이시 조가 도맡아서 작업하였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하나비, 키즈리턴, 브라더, 돌스, 기쿠지로의 여름까지 총 7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의 영화에는 자기투영적인 모습이 많다. 코미디언, 야쿠자(캐릭터), 감독, 배우 등 정체성이 다양하지만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은 어느 영화나 대부분 비슷. 심지어는 자신이 감독이 아니고 출연만 한 영화에서도 캐릭터는 비슷하다. 실제 성격까지는 몰라도 비트 다케시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고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낯선 모습까지 전부 통합하기 위함인지 언젠가부터는 영화를 통해서 자기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케시즈, 감독 만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이에 해당.
마치 주성치 영화에 그의 사단이 있는 것처럼, 기타노 영화 속에서도 항상 비슷한 얼굴들이 출연한다. 원래 다케시 군단이라 불리우는 코미디언 후배집단을 거느리고 있어서 이들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데다 정극 배우 중에서도 자신의 영화에 자주 기용하는 배우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테라지마 스스무와 오오스기 렌. 사실 이들은 워낙 다작을 하는 배우이다보니 다케시 영화에도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테라지마 스스무는 기타노 오피스(기타노 다케시의 소속사) 소속이라 그런지 다케시 영화 대부분에 나왔다.
영화가 끝난뒤에 쿠키 영상을 종종 넣는편이다. 몇몇 영화는 그것까지 보는걸 꼭 추천할 정도로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져있다
7. 어록
겨우 개그맨이 말하는 것을 듣고 화를 내다니 바보같은 녀석.
사실 너희들처럼 리액션이 잘 터지는 관객은 싫었어 나는 단순히 출연료를 받기 때문에 너희를 웃겨주는 사람이 아니야! - <웃을 때입니다 (笑ってる場合ですよ)> 마지막회에서
빨간불, 다 같이 건너면 무섭지 않다.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충고하는 놈들의 공통점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를 아름답게' 라는 말은 쓸모 없다. 정말로 지구를 위하는 방법이란 인간을 지구상에서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우면 죽고 싶어진다.(영화 『소나티네』의 대사)
(2만명이 사망한 대지진 사건에 대해)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번 일어난 것이다.
키노 : 당신은 일본에서 성공했다
기타노 : 성공이 뭐냐. 애인은 도망갔고 마누라는 차갑다.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키노 인터뷰 중)
소꼽놀이 같은 부부생활은 안 될 말이다. 진짜 결혼생활은 서로 목을 조르면서 누가 먹을지 싸우는 것이다.
가족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 (영화 「하나비」인터뷰 중에)
나는 칼싸움 장면에서 칼끼리 부딪히는 걸 싫어한다. 그럴 시간이 어디있나? 단숨에 베어야지.(영화 『자토이치』 인터뷰 중에)
기자 : 아웃레이지 같은 폭력적인 영화가 세상에 끼칠 영향은 생각해봤는가?
기타노 : 생각해봤다. 그런데 아웃레이지 같은 경우는 대중적인 영화가 결코 아니다. 대중적인 영화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함께 웃고 울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대중적인 영화다. 그런데 그런 대중적인 영화가 일년 내에 몇십편씩 나와도 세상에는 아직도 전쟁과 테러와 범죄가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꼴랑 어쩌다 한번 나오는 비대중적인 나의 폭력영화가 세상에 무슨 대단한 영향을 끼치겠는가.
(아웃 레이지 개봉 후 각국의 영화제에서의 인터뷰 중)[47]
젊은이들이 예절을 배우지 않는 것은 귀감이 되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절은 어떤 동경이나 '그때 그 사람은 멋졌어'라는 기억이다.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따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인이 "지금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어"라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감독은 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만들고 그렇지 못한 놈들은 항상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핑계만 댄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고 영화 자체가 목적인 감독은 자기객관화에 실패하고 영화를 그저 표현 수단으로 여기는 감독이 수작을 찍는다.
질 것이 뻔하니까 경쟁하기는 싫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 싶고, 그래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다. 그게 오타쿠다.
노력이라는 것은 복권 같은 것이다. 사도 맞을지는 모르지만, 사지 않으면 절대 맞을 수 없다.
노력만 하면 일류가 된다고 말하지 마라. 진실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남보다 노력해야 일류가 될 수 있을까 말까다. 연습을 한다고 누구나 이치로 처럼 될 수 있나
8. 혐한, 혐중
아주 오래전부터 일관적으로 혐한, 혐중 발언을 하기로 유명하다.
일본에서 '겨울연가' 신드롬이 불던 시절 '비트 다케시의 TV태클'에서 "타케시마를 강탈한 나라의 드라마 따위를 보면 되느냐"고 비난한적 있으며, '위험한 일본학'이라는 책에서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낼 목적으로 역사 문제를 들먹이는 뻔뻔한 나라'라고 쓰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지상파 방송에서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혐한, 혐중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인터넷 방송 니코니코 생방송 2014년 중의원 선거 개표 특집에 연사로 출연하여 만약 총리가 된다면 자신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금지하는 외교 정책을 펼칠 것이라 말했다.
쇄국이야.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일본에) 들어오지 못해'''. 중국인 따위가 호텔 뷔페에 갔더니, 먼저 타파[48]
통에 밥을 넣고, 가지고 온 페트병에 주스를 가득 채운 다음 '잘 먹겠습니다'가 뭐야. #
뿐만 아니라 문재인 행정부 정치인에 대해 비난 발언을 했다. 천황 사죄 요구 발언을 한 문희상 국회의장을 두고 '''속을 긁어내 삶아먹을 호박같이 생긴 악역보스 얼굴'''이라는 인신공격을 하거나#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8월 2일 일본의 수출 규제 보복 조치를 두고 국무회의를 통해 일본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저 발언은 기타 센쥬의 술집에서 자주 듣는 말"'''이라고 평가하였다. 한마디로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낙후된 동네의 선술집에서나 오갈법한 발언이라 평가한 셈.#[50]한국은 대통령 (지지율이) 나빠지면 일본을 탓한다. 대부분 (대통령 직을) 그만두면 나중에 (체포되어) 잡히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구나. 하지만 다른 방송국[49]
에 가면 무작정 한국 드라마 등이 가득 들어와서 (방영 되어 있다). 보통이었다면 방영 금지해야한다. #영상
9. 훈훈한 에피소드
다케시 군단에 속한 후배 게닌들, 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연예인들에게는 대단히 통 큰 선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다케시의 훈훈한 에피소드가 관련 방송에서 자주 나오곤 한다. 그 중 유명한 이야기들 몇 가지.
다케시 군단 소속의 한 게닌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래, 결혼 선물로 뭘 갖고 싶냐?"라는 물음에 "세탁기요"라고 대답을 했는데...며칠 후 다케시로부터 온 소포를 뜯어보니 나온것은 '''빨래판'''이었다.(...)
"어휴, 어르신[51] 이 또 장난 치시는구먼"이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별 생각 없이 빨래판을 뒤집어 봤더니, 100만 엔짜리 수표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칸무리 방송에서 여성 진행자로서 오랫동안 함께한 한 아나운서의 부친이 사망을 했다. 상을 다 치르고 일주일 후 시간 괜찮냐면서 그 아나운서를 불러낸 다케시는 갑자기 드라이브를 제안하는데, 드라이브 하면서 가는 길마다 타케시 군단의 멤버들이 코스프레를 한 채로 그들을 맞이했다.[52] 다 늙은 아저씨들이 알바생 차림으로 땀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아나운서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는데 이때 다케시가 한 말이
연락도 없이 거의 30년 가까이 차이나는 후배 게닌의 공연을 보러 온 비트 다케시와 비트 기요시. 당연히 후배들은 놀라서 어버버거리는데 당당하게 무대로 나가더니...파트너인 비트 기요시와 함께 마에세츠[53] 를 해 버렸다. 수년 만의 투비츠로서의 등장에 관객들은 난리가 났고, 퇴장 후에 본무대를 뛰어야 하는 후배들은 그저 대감격. 이후 공연의 분위기가 너무 좋은 것에 감명 받은 투비츠는 후배 게닌은 물론 '''공연 스태프와 관객들까지 다 끌고가서 식당에서 한턱 크게 냈다'''.나야 웃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 이런 식으로 밖에 위로할 방법을 모르겠네. 그래도 간만에 웃는 얼굴 봐서 좋은걸.
모노마네 게닌인 마츠무라 쿠니히로(松村邦洋)의 특기가 바로 비트 타케시의 성대모사. 다른 모노마네 게닌들도 "맛쨩(마츠무라 쿠니히로의 애칭)이 다케시 씨를 시작하면 다른 모노마네 게닌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라고 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데, 어쩌다 보니 비트 다케시 본인을 딱 만나 버렸다.[54] "너 임마 마츠무라!"라고 다케시가 버럭 화를 내길래 "어이쿠, 허락 없이 성대모사 했다고 혼내시려나 보구나"라며 긴장을 했는데 다음에 하는 말이
오토바이 사고로 일그러진 얼굴과 반대쪽 얼굴을 일그린 채로 모노마네를 했다고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혼낸 거였다나. 두 사람이 동시에 출연한 코너.'''"좌우가 반대잖아!"'''
영화 감독으로서의 다케시를 동경하여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가 2~3년이 지나면 돌아가는 외국인들이 꽤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케시는 이렇게 귀국하는 외국인 제자들에게 일일이 롤렉스 시계를 선물한다고 하는데, 다케시 군단 멤버인 스이도바시 하카세는 '''"이게 소문나서, 다케시에게 가면 부자가 돼서 돌아온다는 이상한 소문이 외국에 퍼졌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꾸준히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있는 거 보면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