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크리스마스
1. 개요
《전장의 크리스마스》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Merry Christmas, Mr. Lawrence, Furyo[1] )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983년 영화이다. 영화음악을 담당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주연으로 나오고, 기타노 타케시가 영화계에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합작영화이며, TV 아사히가 제작한 첫 영화이다.
국내에는 번역된 책이 없지만 유명작가인 아프리카너 로렌스 판 더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의 소설 '씨앗과 파종자(The Seed and the Sower)'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작가의 2차 세계대전 참전중 자바 섬(바타비아) 일본군 남방작전 전선 캠프에서의 포로생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작가가 이와 같은 포로생활을 한 적이 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1983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다만 오시마 나기사의 명성과 데이비드 보위 주연으로 일본 영화계에 화제가 되었고 칸 영화제 수상 기대가 컸음에도 무관에 그쳤다. 정작 별 기대도 안했던 나라야마 부시코가 황금종려상을 받아갔다.
2. 등장인물
- 존 로렌스(톰 콘티)
영국 육군 중령으로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명이자 사건을 바라보는 목격자이자 전달자 역할이기도 하다. 전쟁 전에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었으며 어느정도 일본어를 할 줄 안다. 일본인들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보려 애쓰며 일본군과 영국군 사이를 중재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세력 사이에 끼어서 안 할 고생까지 하는 경우가 다반사. 포로부대장인 힉슬리 대령에게는 '일본놈과 더 친한 것 같다'고 조롱을 듣기도 했다. 단순한 목격자를 넘어서서 극중 차지하는 비중도 큰 편으로, 라디오를 반입한 죄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지만 하라 군조의 배려로 풀려났다.[2] 전쟁이 끝난 1946년 처형을 하루 앞둔 하라의 소식을 접하고 그를 면회했다. 하라와 대화하면서 '셀리어스가 죽음을 통해 요노이에게 씨를 뿌리고, 우리가 그 곡식을 나누는 것 같다'며 감상을 술회했다.
- 잭 셀리어스(데이빗 보위)
영국 육군 소령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지만 그에게 끌린 요노이 대위의 배려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각종 기행과 마찰을 통해 요노이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어놓는 특기가 있다. 자신의 체면을 의식해 곱추였던 동생이 퍼블릭 스쿨에서 괴롭힘당하는 것을 보고도 모른척 한 과거가 있었으며, 이로 인한 죄책감으로 계속 힘들어하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요노이 대위와 항상 마찰을 일으키던 힉슬리가 참수당할 위기에 놓이자 요노이에 볼에 키스하는 기행을 벌여 그를 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래밭에 얼굴만 남기고 파묻혀 서서히 죽어갔다. 죽기 전 동생을 만나 화해하는 환상을 본 것으로 보아 그를 평생 괴롭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 요노이(사카모토 류이치)
일본 육군 대위로 이야기의 무대인 포로수용소의 소장이다. 무사도와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으로 2.26 사건 당시 봉기했던 동료들과 함께 죽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갖고 있다. 군사법정에서 만난 셀리어스에게 끌려 그를 수용소에 대려와 힉슬리 대신 새 포로대장으로 삼으려 했지만 셀리어스의 기행으로 인해 뜻처럼 되지 않고 본인의 마음만 복잡해졌다. 완고한 성격의 힉슬리와 사사건건 충돌하다 감정적으로 참수하려던 찰나 갑자기 난입한 셀리어스의 키스를 받고 실신한 뒤 좌천되었다. 이후 땅에 파묻혀 죽어가던 셀리어스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한 줌 베어간 뒤 예를 표했다. 그렇게 취한 셀리어스의 머리카락을 로렌스에게 전해주고 자기 고향의 사당에 봉납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 장면의 로렌스와 하라의 대화를 통해 종전 직후 처형되었다고 언급된다. 극중 드러나는 셀리어스에 대한 태도는 단순한 인간적 호의를 넘어선 동성애에 가깝다. 본인만 인정하지 않으려 애쓸 뿐 주변 인물들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 정작 배우의 행적 때문에 미심쩍어 보이는 셀리어스는 동성애적인 면모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키스도 본심이라기 보단 자신을 좋아하는 요노이에게 어그로를 끌었거나 마지막 선물을 했다고 보는게 좋을 듯.
- 하라 겐고(기타노 타케시)
일본 육군 군조로 수용소의 군종부사관이지만 실제 하는 일은 행정보급관에 더 가깝다. 첫인상은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윽박지르고 구타하는 등 전형적인 악질 군조의 모습이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로렌스와 소통하려 하고, 애먼 남의 죄로 처형당할 뻔 할 때 독단으로 구해주는 등 인간적인 면모 또한 보여 준다.[3] 전쟁이 끝난 뒤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집행 전날 밤 로렌스와 재회했다. 안타까운 만남을 뒤로 한 채 떠나려던 로렌스를 불러세우고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라고 외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 가네모토(죠니 오오쿠라[4] )
일본 육군 소속 조선인 군속으로 네덜란드 포로 더용을 강간하려다 붙잡혀 할복을 요구받았다. 더용의 증언에 의하면 잘해주다가 갑자기 자신을 덮쳤다고(...) 이 영화가 본의 아니게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켜 금기시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 칼 더용(알리스테어 브라우닝[5] )
가네모토에게 강간당한 네덜란드 포로. 가네모토의 할복 현장에서 애뜻하게 서로를 부르짖다가 그가 죽는 순간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 이 사건이 단순한 강간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힉슬리 대령(존 톰슨)
영국 공군 대령으로 포로들의 대장이다. 완고하고 자존심이 강한 영국 군인으로 이게 정도가 지나쳐 불필요한 부분까지 사사건건 요노이 대위와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는 로렌스의 표정이 진국이다. 정작 본인은 중간에 끼어 고생하는 로렌스를 친일파 취급하며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기어이 사단이 터저 요노이의 칼에 목이 달아날 찰나 셀리어스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럼에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로렌스한테 '내가 너였으면 진작에 할복했다'라며 뒤끝을 부렸다.
- 야지마 일등병(혼마 유우지)
요노이 대위의 부하로 그의 진검대련 파트너를 겸하고 있다. 셀리어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 요노이의 실수로 머리를 살짝 베인 적이 있다. 결국 셀리어스가 요노이의 마음을 흐린다고 판단했는지 독방에 잠입해 간수를 죽이고 셀리어스까지 죽이려 했으나 역으로 제압당했다. 이후 요노이에게 할복을 명령받자 "셀리어스는 대위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악마입니다"라고 호소하며 자기 배를 갈랐다.
3. 내용과 한국에서의 오해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의 관념이 서로 다른 일본군인과 영국군인을 대비시켜 놓은 것이 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주인공이 존 로렌스이지만, 존 로렌스는 일본군과 영국, 네덜란드 포로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뿐, 정작 갈등관계에서는 꽤나 떨어져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잭 셀리어스는 영국 군인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사로잡힌다. 그는 어떻게는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열망이 있는 군인. 그래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하기 위해 돌발행동을 해 일본군 장교들에게 찍히게 된다.
영화 역시 국내에서 개봉되지 못하였다. 1998년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 출시된 영화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 개방 이후에도 다국적 영화일지언정 제작과정에서 일본이 상당한 비중을 할애했는데다 태평양 전쟁을 다룬 영화라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할 수 없었다.[6] 거기다가 조선인에 대해 당시 한국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내용[7] 이 있기도 하다.
네덜란드군 포로 더용을 성폭행한 조선인 군속 가네모토(金本, 김)가 병사의 총검을 빼앗아 할복하는 장면을 두고 하는 얘기다. 하지만 조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장면을 구성했다고 보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다. 이 장면은 일본이 만든 영화의 독자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프리카너 작가의 원작 <씨앗과 파종자(The Seed and the Sower)>에서부터 설정되어 있는 전개다. 당시 한국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변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이 것이 노골적인 조선인 비하로 보였을테지만,[8] 사실 이 것을 영화의 문맥에 맞게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비하라고 볼 수 없다. 가네모토가 할복할 때 더용도 혀를 깨물고 자살을 했다는 것은 이들의 감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네모토 군속의 최후와 드용의 처지는 요노이 대위와 로렌스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복선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여질까봐 일본군 간수와 연합군 포로의 출신을 주인공들의 국적과 다르게 설정했던 걸로 보여진다.
다른 등장인물들에서도 동성애적 코드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요노이 대위와 셀리어스 소좌가 키스하는 장면으로, 실제 장면에서는 요노이 대위가 포로를 처단하려다 셀리어스가 이를 막기 위해 요노이를 포옹하고 키스하는 돌출행동이긴 하지만 역시 둘의 감정적인 교류를 암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를 두고 조선인만 비하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결국 이 영화는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크리스마스 휴전을 은유하는 제목처럼 태평양 전쟁에서도 감정적인 이해와 화해가 있을 수 있다는 장치로 동성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알아주는 극렬 좌파다.[9] 이 영화 이전에 이윤복의 일기를 가지고 어려웠던 한국의 상황을 들여다보며 반성하는 영화라든가, 재일 조선인 차별에 비판하는 영화를 찍기도 했다. 이 영화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일본군의 포로에 대한 학대와 동성애에 대한 탄압 등을 고발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일본 영화임에도 포로들을 폭행하고 자신들의 명령을 거역하는 포로를 죽이려고 하는 등 일본군의 막장성을 드러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셀리어스를 놓친 죄를 묻는다든지 하는 장면 등에서 할복을 강요하는 장면도 나온다.
4. 음악
가장 유명한 OST는 메인OST이자 영화 제목과도 같은 '''Merry Christmas Mr. Lawrence'''로, 한국에서는 여전히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태여 찾아서 봐야만 보는 고전영화임에도 불구하고[10] 제법 여러 군데에 많이 쓰이고 있는 OST이기에 귀에 많이 익숙한 음악.
5. 기타
오시마 감독은 이 영화의 캐스팅 문제로 적잖이 애를 먹었다. 처음부터 영화 '연합함대'와 '대일본제국'에 출연한 배우는 절대 안쓰겠다고 선을 그었었고,[11] 줄어든 후보군 중에서 주연을 물색하다 보니 주연 4인방 중에 3명이 연기 초짜들인 사카모토 류이치와 데이빗 보위, 기타노 타케시로 채워졌다.
기타노 다케시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오시마 감독으로부터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감독을 찾아가서는 "어차피 나는 만담으로 사카모토는 음악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영화 출연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정 우리를 쓰고 싶다면 우리는 배우가 아니라 개나 고양이다 생각해 주시고 화를 내지도 말아 주시기 바란다. 화를 내면 우리는 바로 그만두겠다."라고 설레발을 쳤다. 그래놓고 촬영하는데 현장에서 스타트 소리가 이미 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스태프들을 돌아보면서 "'''대사가 뭐였지?'''"하고 물어보기도 하는 등(...) 오시마 감독은 미리 약속한 게 있어서 차마 화도 못내고 괜히 주위 스탭들에게 막 화풀이를 해댔다고. 기타노 본인은 이를 두고 '''생각해보면 참 미안한 짓을 했다'''고 술회했다. (출처: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다만 이후 화가 풀렸는지 유작 고하토에 기타노 다케시를 캐스팅하기도 했다. 배우도 부담스러워 했던 기타노 다케시가 훗날 HANA-BI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직접 주연으로서의 연기와 감독을 병행하며 세계적인 명감독 반열에 오른 걸 생각하면... 흠좀무.
사카모토 류이치의 경우 이 영화를 통해 종합아티스트로서 발돋움을 하게 되는데, 특히 이 영화의 음악을 제작한 경험을 발판삼아 마지막 황제의 음악 감독을 맡아 아카데미상 음악상을 수상했고, 동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이다.#
[2] 중국인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라디오 반입 진범이 드러나자 하라가 독단적으로 로렌스와 셀리어스를 독방에서 풀어줬다.[3] 이 때가 크리스마스였는데 술에 거하게 취해서 '메리 크리스마스, 파더 크리스마스' 하면서 좋게좋게 보내줬다. 이 부분은 마지막 장면과 영화 제목을 관통하는 복선이다.[4] 야자와 에이키치와 캐롤로 같이 활동했던 한국계 일본인 기타리스트, 배우로 본명은 박운환. 2014년 폐암으로 별세했다.[5] 파워레인저 다이노차지에서 제노윙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2019년 암으로 별세했다.[6] 물론 그 당시에도 한국 영화잡지에서 소개하고 알음알음 삐짜판 불법복제 비디오로 돌려본 경우도 있었다.[7] 세칭 'B~C급 조선인 전범' 등으로 칭해지는 식민지 출신 육군 군속.[8] 이로 인해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인 감독이 오시마 나기사의 멱살을 잡았다는 썰도 있다.[9] 여기에 주연 사카모토 류이치 역시 좌파성향 내지는 진보성향의 아티스트로, 학창시절 전공투 활동을 활발히 한 전력이 있다.[10] 2~3년 전 유튜브에서 무려 풀버전으로 풀린 적이 있기도 했다.[11] 둘 다 우익 수요를 노리고 만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