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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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소동으로 불에 타버린 스즈키 상점 고베 본사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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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소동의 발단이 된 곳. 우오즈의 쌀 소동(魚津の米騒動)이라고 적혀 있다.
米騷動/米騒動(こめそうどう)
일본 역사상 쌀 유통량이 감소하고 가격이 폭등해 혼란이 발생했던 사건들을 말한다. 우리말로 바꾼다면 쌀 소요 정도가 되겠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쌀이 주식이고 생활 필수품이므로 쌀 소동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폭동을 초래한다. 원인은 흉년, 사재기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자체는 언제나 있어왔다. 쌀 소동이라는 말 자체는 에도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1890년, 1897년, 1918년, 1993년에 '쌀 소동'이라 지칭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1993년의 쌀 소동은 당시 일본의 흉년으로 인해 쌀 가격이 폭등해 발생한 건 맞는데, 일본이 선진국으로 진입한 현대의 일이므로 일단 다른 먹거리가 많아져 쌀 소비량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고, 식량 사정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기 때문에,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식량 부족이나, 그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는 1918년의 쌀 소동이 가장 유명하며, 그래서 쌀 소동이라는 말 자체가 1918년 쌀 소동을 의미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1918년의 쌀 소동은 쌀 도매상이 가격을 담합해서 쌀 가격이 폭등하자 일본 농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혈 시위를 일으키며 발생했다. 그리고 1918년의 쌀 소동은 그 다음 해에,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내용은 1918년의 쌀 소동을 설명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농촌의 생산 인구는 도시로 유출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쌀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세력 파급을 막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이 확실해지자 쌀값이 폭등할 것이라 예상한 쌀 도매업자들이 가격담합 등의 짓거리를 하면서 쌀값이 폭등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식단은 철저히 곡류 중심이었고 육류나 어류의 비중은 잘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가증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8년 7월 22일 도야마 현의 우오즈(魚津) 항에서 처음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쌀 1석에 대한 가격 그래프. 쌀 소동이 일어난 1918년에는 0원 크리(…) 홋카이도로 가져갈 쌀을 싣고 있는 배를 300여 명의 주부들이 에워싸고 쌀을 팔라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도야마 현은 일본에서 논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지만, 이곳에서마저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될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8월 3일 역시 도야마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쌀 도매업자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고, 이 소요를 시작으로 폭동이 교토·나고야 등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쌀 가게와 유통 회사를 불태우는 등 매우 공격적이었고, 고베에서는 유통 재벌인 스즈키의 본사가 불타는 등 걷잡을 수가 없었다.
도시와 농촌을 뒤흔든 이 폭동은 탄광촌에까지 퍼졌고 사회는 9월 12일까지 혼란에 빠진다. 이에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이던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고, 조선에서 늘어난 쌀, 아니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먹어야 할 쌀까지 일본으로 유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향 부문 참고.
당시 총리 대신이던 초대 조선 총독 출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쌀 소동에 대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일본 육군을 출동시켜 폭동의 수습을 꾀하였다. 50일간 369회의 소요가 발발해 10만 명의 군이 소요 진압에 투입되었다. 7,786명을 기소했으며 그중 2명은 사형, 12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잔혹하게 진압했고 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내각이 사퇴하게 된다.
쌀 폭동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다이쇼 덴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평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를 총리 대신으로 임명했고, 하라는 쌀 등 생필품의 물가를 잡겠답시고 면사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등 초강력 물가 억제 정책을 폈다. 당시 일본 경제는 군수품이 주도했던 전시 붐이 민수품에서 이어지면서 전후 붐이 발생하여 후일 삼백 산업이라고 불리는 제분, 제당, 방직업에 버블이 끼고 있었는데, 하라 내각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미국의 전후 불황과 수출 부진까지 맞물리면서 버블이 터져 부실 사업체와 은행들이 무수히 양산되는 등 이른바 반동 불황을 일으킨다. 이 반동 불황은 일본의 1920년대 전반부를 통째로 말아먹었고, 여기에 간토 대지진까지 겹치면서 결국 일본 경제는 1920년대를 침체 상태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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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폭동의 영향은 당시 식민지이던 조선도 피할 수 없었는데, 쌀 폭동에 놀란 일본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조선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산미 증식 계획 시기에는 쌀 생산량이 늘고 일본으로 이출량도 증가하였지만,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급격하였고, 또 조선 내 쌀값은 지속적인 상승세로 벼를 자가 소비하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으므로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산미증식계획 항목을 참조.
쌀 소동으로 불에 타버린 스즈키 상점 고베 본사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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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소동의 발단이 된 곳. 우오즈의 쌀 소동(魚津の米騒動)이라고 적혀 있다.
米騷動/米騒動(こめそうどう)
1. 개요
일본 역사상 쌀 유통량이 감소하고 가격이 폭등해 혼란이 발생했던 사건들을 말한다. 우리말로 바꾼다면 쌀 소요 정도가 되겠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쌀이 주식이고 생활 필수품이므로 쌀 소동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폭동을 초래한다. 원인은 흉년, 사재기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자체는 언제나 있어왔다. 쌀 소동이라는 말 자체는 에도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1890년, 1897년, 1918년, 1993년에 '쌀 소동'이라 지칭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1993년의 쌀 소동은 당시 일본의 흉년으로 인해 쌀 가격이 폭등해 발생한 건 맞는데, 일본이 선진국으로 진입한 현대의 일이므로 일단 다른 먹거리가 많아져 쌀 소비량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고, 식량 사정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기 때문에,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식량 부족이나, 그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는 1918년의 쌀 소동이 가장 유명하며, 그래서 쌀 소동이라는 말 자체가 1918년 쌀 소동을 의미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1918년의 쌀 소동은 쌀 도매상이 가격을 담합해서 쌀 가격이 폭등하자 일본 농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혈 시위를 일으키며 발생했다. 그리고 1918년의 쌀 소동은 그 다음 해에,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내용은 1918년의 쌀 소동을 설명한다.
2. 원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농촌의 생산 인구는 도시로 유출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쌀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세력 파급을 막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이 확실해지자 쌀값이 폭등할 것이라 예상한 쌀 도매업자들이 가격담합 등의 짓거리를 하면서 쌀값이 폭등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식단은 철저히 곡류 중심이었고 육류나 어류의 비중은 잘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가증될 수밖에 없었다.
3. 경과
결국 1918년 7월 22일 도야마 현의 우오즈(魚津) 항에서 처음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쌀 1석에 대한 가격 그래프. 쌀 소동이 일어난 1918년에는 0원 크리(…) 홋카이도로 가져갈 쌀을 싣고 있는 배를 300여 명의 주부들이 에워싸고 쌀을 팔라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도야마 현은 일본에서 논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지만, 이곳에서마저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될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8월 3일 역시 도야마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쌀 도매업자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고, 이 소요를 시작으로 폭동이 교토·나고야 등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쌀 가게와 유통 회사를 불태우는 등 매우 공격적이었고, 고베에서는 유통 재벌인 스즈키의 본사가 불타는 등 걷잡을 수가 없었다.
도시와 농촌을 뒤흔든 이 폭동은 탄광촌에까지 퍼졌고 사회는 9월 12일까지 혼란에 빠진다. 이에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이던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고, 조선에서 늘어난 쌀, 아니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먹어야 할 쌀까지 일본으로 유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향 부문 참고.
4. 결과 및 영향
당시 총리 대신이던 초대 조선 총독 출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쌀 소동에 대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일본 육군을 출동시켜 폭동의 수습을 꾀하였다. 50일간 369회의 소요가 발발해 10만 명의 군이 소요 진압에 투입되었다. 7,786명을 기소했으며 그중 2명은 사형, 12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잔혹하게 진압했고 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내각이 사퇴하게 된다.
쌀 폭동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다이쇼 덴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평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를 총리 대신으로 임명했고, 하라는 쌀 등 생필품의 물가를 잡겠답시고 면사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등 초강력 물가 억제 정책을 폈다. 당시 일본 경제는 군수품이 주도했던 전시 붐이 민수품에서 이어지면서 전후 붐이 발생하여 후일 삼백 산업이라고 불리는 제분, 제당, 방직업에 버블이 끼고 있었는데, 하라 내각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미국의 전후 불황과 수출 부진까지 맞물리면서 버블이 터져 부실 사업체와 은행들이 무수히 양산되는 등 이른바 반동 불황을 일으킨다. 이 반동 불황은 일본의 1920년대 전반부를 통째로 말아먹었고, 여기에 간토 대지진까지 겹치면서 결국 일본 경제는 1920년대를 침체 상태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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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폭동의 영향은 당시 식민지이던 조선도 피할 수 없었는데, 쌀 폭동에 놀란 일본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조선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산미 증식 계획 시기에는 쌀 생산량이 늘고 일본으로 이출량도 증가하였지만,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급격하였고, 또 조선 내 쌀값은 지속적인 상승세로 벼를 자가 소비하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으므로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산미증식계획 항목을 참조.
5. 여담
-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1993년 쌀 사태(1993年米騒動)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항목은 이상 기후로 낮아진 기온 탓에 미곡의 수확량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해에는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40퍼센트 이하로 내려갔다고 한다.
- 또한 일본에는 THE★쌀소동(THE★米騒動) 이라는 인디 록 밴드가 존재한다. 현재는 2014년을 기점으로 잠정적 활동 중단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