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렬
1. 삼국시대의 신선 왕렬
1.1. 개요
王烈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장휴(長休).
한단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는 서생으로 혜강[1] 과 교류했으며, 일찍이 태행산에 들어가 산이 찢어지는 소리를 드고 다가가 살펴보았다. 산이 수백 길이 갈라져 푸른 진흙이 수액[2] 처럼 솟아났는데, 이를 취해 다져보니 돌로 변해 뜨거운 밀랍과 같은 상태로 맛을 보니 멥쌀 맛이었다고 한다.
그 푸른 진흙 같은 액체를 환약으로 만들어 복용해서 장생했으며, 그 약을 혜강에게 건네줬지만 딱딱한 청석으로 변해 혜강이 신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탄식했다고 한다.
항상 황정[3] 과 연연[4] 등을 아울러 복용해 나이가 238세에 이르렀다고 한다. 젊은이의 용모로 산에 오를 때면 마치 나는 듯 했다고 한다.
왕렬이 산에서 수액을 나온 것에 대해서는 선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신선의 산이 오백 살이 되면 곧바로 열려 수액이 나올 것으로 이를 복용하는 자는 누구나 천지와 똑같이 그 수를 누린다고 했다.
1.2. 관련 사료
- 신선전
- 예문류취
- 태평광기
2. 삼국시대의 서생 왕렬
王烈
142년 ~ 219년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자는 언방(彦方).
여러 가지 지식과 도에 통달했고 의가 아니면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하며, 전적을 공부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정사에는 관녕전에는 말미에만 잠시 언급되지만 선현행장에는 여러 일화가 실려있다.
어렸을 때 학문을 배우기 위해 관녕과 병원이 배우기도 했던 영천의 진식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이 때 스승의 두 아들 진기, 진심과 친구가 된다. 당시 영천에는 순상[5] , 가표, 이응, 한융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진식에게 배우기 위해 왔지만 그 가운데 왕렬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모두가 감복하며 따르니 그의 명성은 해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영천에서 덕을 이뤘다고 생각한 왕렬은 고향의 초려로 돌아왔으나 도착하자마자 조부가 사망해 3년 상을 치뤘는데, 그 와중에도 대기근이 닥쳐 사람들이 굶주리자 자신의 창고에서 먹을 것을 풀어 읍민들을 구하니 종족들은 그를 효자라 하고 읍민들은 어질다며 그를 칭송한다.
그는 자신이 영천에서 배운 것을 활용해서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해 학교를 세우고 상서[6] 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사람들을 윽박질러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성품과 기질을 잘 파악하는 맞춤형 교육을 통해 도에 합당하도록 깨우쳐주면서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며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둔재들도 포기하지 않고 더욱 교화를 철저히 하자 모두가 소중한 인재로 바꾼다. 그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걸음걸이마저 다르니 사람들이 이것만으로도 그의 제자들을 알아볼 지경이었으며, 고을에 이러한 풍조가 생겨나자 모두가 선한 사람으로 변하니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한 번은 어떤 자가 소를 훔치자 얼마 안되어 소의 주인이 따라가서 그를 잡았고 그러자 도둑은
하지만 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왕렬에게 알리니 왕렬은 오히려 도둑에게 베 한 단을 줬고 고자질한 사람은 도둑이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오히려 왜 베를 주느냐고 물으니 왕렬은내가 아무래도 무엇엔가 홀렸나봅니다. 이후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금 저를 용서해주시더라도 제발 왕렬 선생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같은 해에 어떤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집까지 가져다 주니 노인이 이름을 물었지만 그 사람은 가르쳐주지 않고 길을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인이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칼을 잃어버리니 나중에 길을 가던 사람이 칼을 보고는 뒤에 오는 사람이 칼을 가지고 갈 것을 걱정해 칼을 지키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 노인이 돌아와 보니 전에 대신 짐을 져다 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이름을 말하지 않고 떠나려 하자 노인은 그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말하길옛날에 진목공(秦穆公)은 그의 준마를 훔쳐서 잡아먹은 사람에게 술을 줬다. 나중에 그 도둑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목공을 위기에서 구했다. 지금 저 도둑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나에게 그 소문이 들어갈까 겁을 먹었다고 하니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착한 마음도 생겨난다. 내가 저 사람에게 베를 준 것은 착한 마음을 장려하기 위함이다.
노인은 그의 이름을 듣고 왕렬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리니 왕렬은전에는 대신 짐을 져주고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내 칼을 길에서 지켜주셨소이다. 그대와 같이 어진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이름을 가르쳐 주시오. 내가 왕렬 선생에게 알리겠소.
라고 하며 사람을 시켜 그 사람을 따라가 데려오게 했더니 전에 소를 훔쳤던 사람이었으며, 이 놀라운 사실에 왕렬은 탄식한다.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만난 적이 없소.
왕렬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를 남달리 대했다.소악(韶樂)은 9가지 음이 어우러지고, 우(虞)의 빈객들은 화목하게 지낸다더니 사람을 감동시키면 이러한 경지까지 이르는구나!
이렇듯 고을에 좋은 풍습이 생기니 당시에 사람들은 다툼이 생기면 왕렬을 찾아가다가 막상 왕렬의 초려가 보이면 도로 돌아갔다가 서로 상대방이 옳았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다툰 사실이 왕렬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을 정도였으며, 이런 그의 활약에 관리들은 모두 친히 왕렬에게 관직을 주고 효렴으로 천거하려고 해 삼부에서는 모두 왕렬을 정중히 모시고자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난이 일어나니 그는 국연, 병원, 관녕 등과 함께 공손도의 명성을 듣고 요동으로 몸을 피하니 당시 그의 명성은 공융을 설전으로 면박을 준 병원이나 화흠과 함께 세상에 이름을 떨친 관녕보다 높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요동으로 피난오니 공손도는 그를 자신의 장사로 임명하려 했으나 왕렬은 사양하고 오히려 몸소 농기구를 잡고 일하면서 포의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즐겁게 지내며 상인의 일도 하는 등 자신의 몸을 더럽히니 공손도는 그 일을 포기한다. 이렇듯 그가 백성들과 어울리니 동성의 사람들은 그를 군주처럼 받들었다.
당시에는 세상이 몰락해 참된 지식인이 별로 없었으며, 붕당을 이루어 서로를 비방하는 일이 만연했다. 이러한 세상을 피해 동국으로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러한 일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같이 사는 주민들도 모두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왕렬 답게 그와 함께 살면서는 조금도 그러한 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왕렬이 요동에 있을 때는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없었으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경우도 없었다.
장사꾼들도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함부로 가격을 매기거나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없는 등 그의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지니 조조가 그를 여러 차레 불러서 그를 승상의 속관과 징사로 삼아 요동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했지만 차마 요동으로 보내지 못하고 왕렬은 요동을 벗어나지 않으니 그는 218년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다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2] 거미막 하강, 뇌실 및 척수의 중심관 등을 채우고 있는 액체를 말한다.[3] 둥굴레라고 부르는 식물을 말한다.[4] 내단의 명사로 용호교구라고도 하며, 원래 있던 것을 되돌린다는 환단을 한 이후에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한다.[5] 순욱의 숙부[6] 庠序 쉽게 말해 학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