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군
요동군
遼東郡 / 辽东郡
1. 개요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 시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군현.
2. 연혁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몰아내고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군과 함께 설치되었으며, 대략적으로 기원전 3세기 초 무렵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진대에는 군사적 기능을 중점으로 두고 운용되었으나 진한교체기에 들어서는 요동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요동국으로 잠시 중원지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항우는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이봉시키고 장도를 새로이 연왕으로 분봉하였으나, 이름은 요동국일지라도 실제 수도는 요서군의 속현인 무종현[1] 에 있었고, 한광은 이에 따르지 않아 요동국으로 가지 않았던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에 요동국이 중원에 예속되지 않았다는 점의 근거로 평가된다.
새로운 연왕 장도가 한광을 죽이고 실질적인 유일한 연왕이 되었고, 한대에 들어서 군국의 하나로써 이성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민 장도가 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끝내 제압되고 새로운 연왕으로 노관이 봉해졌다.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면서 다시금 연국은 한에 의해서 제압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에서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어양을 다시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점에서 노관의 망명 이후에 연국이 해체되고 해당지역은 한의 지배를 회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의 직할지로 두지 않고 연국을 재건해서 한나라 황족을 왕으로 삼고 한의 산하에 두었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진대에 설치되었으며 유주자사부에 속하였고 양평[2] , 신창, 무려, 망평, 방, 후성, 요대, 요양, 검독, 거취, 고습안시, 무섬,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의 18개 현을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한대에는 잠시 청주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유주의 관할로 바꾼 뒤로는 계속 유주에 속해 있었다.
요서, 요동, 낙랑군처럼 중원지역[3] 에서 벗어나 설치된 소위 "외군(外郡)"으로써 변경지역의 재지집단 및 국가의 통제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중국의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공손씨 정권이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을 거점으로하여 위나라로부터 독립하였다. 공손강과 공손연이 요동 공손씨 정권의 수장이었던 시점에 진서 지리 上에서는 "(공손씨 집단이) 동이의 아홉 종족을 복속시켰다고 되어 있으며, 위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고 양평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 동이의 정복이 의미하는 것은 말그대로 정복은 아니겠으나 동이와의 교류, 상호 영향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5]
일례로 수차례에 걸쳐 군치를 옮긴 현도군이 요동에 있었던 무렵에는 부여가 현도군의 관할 아래에 놓이자 부여가 직접 요동군으로 바꾸어달라고 요청한 기록도 있다.[6]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공손씨 정권이 있었던 무렵에도 어느 정도 요동군의 본래 기능인 지방 재지토착 민족의 관리 기능은 약간의 명칭을 달리하여[7]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손씨 정권이 조위의 사마의에 의해서 정리되고 중원 국가에 예속된 요동군으로써 군현을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진대에 들어서는 잠시 요동국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으나 5세기 무렵에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따라서 지금의 랴오양을 치소로 두었던 요동군은 실질적으로 폐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잠시 수나라대에 들어서 군치를 옮긴 요동군이 존재하였으나 기능 및 관할 범위는 이전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얼마 가지않아 폐군된다.
한국 역사에서는 초기 고구려와 가장 먼저 충돌한 한군현 세력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국 초 고구려는 요동군과의 정면대결 보다는 행인국, 개마국, 갈사국, 옥저 등, 고구려 동남부의 소국부터 정리하는 길을 택했다.[8] 그러나 고구려의 확장방향으로 보아 한군현 세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태조왕 즈음에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종종 요동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서기 121년, 후한 유주자사 풍환(馮煥)은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과 함께 요동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태조왕은 아우 고수성에게 우회해서 요동과 현도를 습격하게 하고, 이후 자신은 요동군 신창현(新昌縣)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사살했다.
이후로도 고구려와 요동군의 충돌은 계속되었으며, 184년 고국천왕 대에는 요동군이, 242년에는 동천왕이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했으며 318년 모용선비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로도 충돌은 계속되었다. 결국 요동반도 전체가 고구려로 편입된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어서야 충돌이 멈췄다.
3. 유적
요동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요동반도에서 확인되는 전한 후한의 유적들에 근거하여 요동반도 일대를 관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할 범위나 위상에 비해서는 위세품들이 낙랑군만큼 많은 편은 아니라는 점에서 낙랑군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뿐만아니라 전한 시기에는 정작 요동군의 치소였던 지금의 랴오양 시 일대나 인근의 안산시에서는 유적이 많지 않고, 되려 요동반도 남단의 다롄시나 푸란뎬 시에서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다만 이는 발굴의 편차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의외로 요동반도 북부(지금의 선양 및 안산, 요양 일대)와 요남지역(요동반도 남단)과 고고학적으로 지역적인 차이가 산견되며, 그 중 강둔 고분군에 대해서는 답씨현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등 구체적 군현을 비정하기도 한다.
한편 전한 말기에서 후한 초기에 걸쳐 많은 전실묘들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고분들이 축조되는 양이 많아지는 점에서 한에 완전이 예속된 상태 아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점은 기원을 전후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또한 요동군이 기존의 재지토착문화를 몰아내고 형성되는 만큼 순수 한계의 무덤들 사이사이에 동호[9] 라고 일반적으로 추정하는 재지계 무덤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고분문화 상에서의 차이는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줄어든다는 점에서 재지세력은 한에 동화되거나 전통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image]
▲ 2015년 발굴 당시의 랴오양 먀오푸(苗圃) 한묘, 우측의 대지를 비롯, 주변에 남환가, 남교가, 태자하구 동한묘 등의 관련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다.
이후 후한 말 성립하는 공손씨 정권 및 그 이후의 조위시기, 서진 초기부터는 특유의 판석으로 만든 벽화묘(석판묘)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최근 랴오양 먀오푸 유적을 비롯한 구 요양성의 남쪽에서 대규모 석판묘군이 확인되어 2세기 후반부터 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행하던 벽화는 안악 3호분으로 이어져 고구려의 초기 벽화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
4세기까지도 일부 존속하는 석판묘들이 존재하지만 낙랑군을 철폐시킨 고구려가 점차 요동으로 팽창하면서 되려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들이 랴오닝성 톄링시 일대[10] 에서 보인다는 점에서 서진대 이후로는 유명무실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다.
4. 의의
낙랑군과 함께 기능적으로 한나라의 변경지역을 통치하는 역할이 부여된 외군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5~6세기에 이르러서도 요동, 동북, 한반도 일대에는 중국의 군현이 남아 있지는 않았음에도 해당지역을 설명하는 개념적인 용어로 남게 된다. 특히 고구려가 중국에 견사 후 받는 작위들에는 요동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장수왕도 "(전략)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의 작호를 받은 바 있으며,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도 요동군왕이라는 작호를 받은 바 있다.
역사적으로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중국의 동북삼성일대는 "만주"라는 이름의 역사지리적인 구분이 되기도 하는데, 논자에 따라서는 만주라는 중근세에 들어서 생긴 표현보다도 "요동"이라는 표현이 동북삼성에 대한 역사지리적인 구분 명칭으로써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요동사를 저술한 김한규 교수가 대표적이다.[11]
[1] 지금의 톈진 근방[2] 요동군의 치소[3] 협의의 중원지역[4] 이는 평주(平州)조의 기록인데, 평주에 대해서 요동, 창려, 현도, 낙랑, 대방의 5개 군이 평주였고, 유주와 경계를 두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5] 산상왕과 고발기와의 왕위쟁탈에서 군사를 빌려주거나, 부여나 고구려와의 혼인 동맹 등의 사건들이 중국 사서에 복속시켰다 정도로 기록된 듯 하다.[6] 참고로 후한은 고구려를 현도군 소속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부여의 정체는 고국천왕 사후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고발기를 지지한 소노부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7] 동이교위 설치 이전에는 동부교위[8] 가령 서기 28년(대무신왕 11년)에 있었던 요동태수의 침공은 재상 을두지의 계책으로 요동군을 물러나게 하고, 이후 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9] 다만 이는 해당 유적이 보고된 보고서의 공식적인 기술일뿐 추가적인 연구에 의해서 바뀔 여지도 남아 있다.[10] 다만 천산산맥 및 그 동부와 요하 사이의 유적들은 중국에서조차 전연 후연 북연의 삼연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고구려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발굴의 공간적인 편차가 있기 때문에 자료의 증가에 따라서 4~5세기의 랴오닝성 남부의 역사고고학적 전개는 국면을 달리할 여지가 있다. 여담으로 삼연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들은 아직은 대체로 요서지역에서 찾고 있는 편이다.[11] 요동사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한국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본 연구로써 많은 큰 의의를 갖고 높게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견해와 동시에 실체적이지 않다는 점 및 지나친 지역사적 관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