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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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군'''
'''
나라 국'''
'''
지을 제'''

중국어
(jùn(guó(zhì [쥔궈지]
일본어
(くん(こく(せい [쿤코쿠세이]
1. 개요
2. 역사
2.1. 시행
2.2. 군국제의 상세
2.3. 군국제의 쇠퇴
2.4. 흔적만 남은 군국제


1. 개요


전한 초기의 제도. 군현제의 특성과 봉건제의 특성이 섞여 있는 제도로서, 반 군현 반 봉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한무제 이후 군국제가 폐지되고 군현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며, 엄밀히 말해 형식적으로는 군국제가 이후로도 유지되긴 했으므로(코딱지만한 영토를 봉지로 주어 '왕부'를 열게 하는 등...하지만 이는 영토지배권이 아니라 그냥 별장 하나 떼어주고 돈 줄테니까 나오지 말라는 것과도 같았다.)사실 중국이 군주정을 폐지한 신해혁명까지 군국제는 명목상 계속 남아 있었다. 다만 전국시대~초한쟁패기~전한초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찾아볼 수 있는 봉건제적인 요소는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므로 한무제 이후로는 사실상 군현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차피 군국제나 군현제 모두 당대에 그런 제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후대에 그 시대의 특징을 감안해 붙인 명칭이라서...

2. 역사



2.1. 시행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전쟁을 거쳐서 성립된 전한은 통치 제도를 정비해야 했다.
그러나, 진에서 시행한 군현제는 가혹한 통치의 상징과 같이 여겨져 섣불리 도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전한 초기에는 초한전쟁 당시 성립된 여러 왕국들이 건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현제를 통한 중국대륙의 지배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대 규모의 지방 통치 조직이 필요하므로 막대한 비용이 발생되었다. 수많은 열국들이 다투었던 전국시대, 통일 진나라의 학정, 진 말기 일어난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까지 일어나게 되면서 중국의 경제적 조건은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제 막 중원을 제패하고 성립된 전한으로서는 본격적인 군현제는 시행하기 어려웠다. 또한 많은 수의 공신도 있었기에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봉국을 할당해줘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군현제와 봉건제를 적당히 혼합한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수도 장안과 주요한 핵심 지역은 황제의 직할 통치령으로 삼아 군현제를 실시하고, 상대적으로 떨어진 지역은 제후국으로 만들어 황제가 봉건한 왕이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초한전쟁 당시의 왕국들 및 한신, 영포, 팽월 등 공신들이 책봉된 왕국이 각지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한고조 치세 동안 유력하고 위험한 공신들은 하나하나 숙청당했고, 이후 왕이 책봉되는 국(國)은 황족만 임명될 수 있는 것으로 관례화되었다. 황족인 유씨만이 왕으로 책봉될 수 있다는 제한 조건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국제의 뼈대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참고로 군국제라는 것은 후대에 한나라 초기의 지방 통치 형태를 분석해서 군국제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지 실제로 당시에 제도로서 군국제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1] 한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의 상황은 전국시대에 열국들이 존재하던 상황의 실질적인 재현이었고, 다른 점은 한나라가 명확한 상위 국가로서 종주권을 가졌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2] 전국시대의 진나라는 중국 전토의 절반에 달하는 자국 영내에 군현제를 실시했고, 이는 한나라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2. 군국제의 상세


왕들이 거의 전부 유씨이니 군현제와 별 차이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군국제는 그냥 명목상으로만 나눠놓은 것은 아니고 실제 내부 법리적으로는 제후국은 '다른 나라'로 여겨졌으며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봉국의 감찰과 제어를 위하여 승상과 신하들을 파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는 왕이 직접 뽑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봉국 내에서는 국내의 정치도 왕이 직접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법적으로도 제후 봉국의 국민은 한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넘거나 '타국' 사람을 꼬드겨 데리고 나간 일로 간첩 혐의를 받아 중형을 받은 사례를 담은 목간이 많이 남아 있다.
제후국의 영지 또한 전국시대의 강국 수준은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열후들을 약화시키는 정책이 추진되어 영지가 계속 축소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 유비가 3개군 53성에 이를 정도로 강성했다. 황제의 직할령이 크고 강력했기에 기존 봉건제의 약점이 일부 상쇄되긴 했지만, 여전히 봉건제의 약점은 계속 남아 있었다.

2.3. 군국제의 쇠퇴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군국제의 모순이 대두되었다.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유력하게 힘을 쌓은 제후왕이 황제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는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혈통이 다른 제후왕들은 반란을 일으켜도 목표(?)가 역성혁명이라는 엄청난 것이기에 성공 확률이 낮았지만, 같은 황족이었던 제후왕들은 반란을 일으켜 성공해도 그저 황제가 교체되는 것뿐이기에 위험도나 거부감도 적었다. 실제 한문제가 이러한 반란(?)을 성공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그리고 급기야 오초칠국의 난으로 군국제의 모순이 폭발하였다.
결국 난은 진압되었고, 이 반란으로 제후왕들은 완전히 실권을 상실하였다. 한무제 시기에 제후국들의 위협을 줄이기 위하여 영지를 축소하거나 분할 상속시키고 각종 트집을 잡아서 나라를 몰수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니, 이후의 제후국은 1개 군에 한정되게 되었다. 그리고 제후왕이 신하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없애고, 황제가 직접 제후국의 신하도 임명하게 되면서 이름만 국(國)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직할지인 군(郡)과 아무 차이도 없게 되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었다.

2.4. 흔적만 남은 군국제


다만, 군국제가 유명무실화된 이후에도, 황제의 아들과 그 직계 자손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는 형식만은 남았다. 제후를 봉하는 것은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천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식이었으므로 이 형식을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작위로서의 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3]
물론 중국의 역사 내내 같은 형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중국 역사 동안 제후왕들의 권력은 커지기도 했고 작아지기도 했다. 잘 알려진 사례로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황족들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여 결국 사마의 일족의 대두를 막지 못했고, 반대로 서진은 황족들의 권력을 너무 강화했다가 팔왕의 난을 터뜨리고 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정착한 형태는 왕의 지위는 인정하되 그냥 작위만 주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명 연왕 주체처럼 이들 왕들의 반란은 있었다.[4]
중앙집권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군현제는 계속 이어졌으며 봉건제는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대체로 신라 왕조와 고려 왕조의 경우가 이 시스템과 매우 흡사한데, 대체로 향부곡과 향소부곡민이 많다는 것, 속현이 많다는 것때문에 고려의 경우도 초기는 지방 호족과 지방 향리 세력이 매우 강해 군국제 사회였다. 그 이후 고려 광종의 등장과 고려 예종까지 군현체제를 그나마 유지하다가 무신정변 이후 고려 말까지 군현제가 유명무실화되면서 조선이 개창된 이후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군현제가 완성되었다. 대신에 조선의 경우도 속현이 17세기까지 남을 정도로 군현제의 완성이 생각만큼 빠르진 않다.

[1] 많은 역사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실학은 당시에 실제로 있던 학문의 이름이 아니라 후대에 당시 학문의 일정한 흐름을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다.[2] 허나 서주와 다르다면 이성왕들이 잔뜩 있던 서주와는 달리 한나라는 이성왕은 초기에나 존재했지 이후에는 동성왕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그리고 시대의 한계로 봉건제를 쓸 수 밖에 없었던 서주와는 달리 한나라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주는 춘추시대-전국시대를 거치며 갈수록 쪼그라들다가 망한 반면 한나라는 군현제의 실시로 주나라처럼 망하지는 않았다.[3] 이는 타국의 왕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지 명나라에서 조선 왕의 지위는 명나라 친왕과 거의 동격이었다. 이등체강 문서 참조[4] 명조에선 각 지역의 왕이 군대를 보유해 해당 지역을 방어할 수 있었다. 만력제의 아들이던 복왕 주상순의 경우엔 분봉 받은 낙양 일대의 세금징수권을 갖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