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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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요동성의 위치
遼東城
요동에 있던 성 중 하나.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 근방에 위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음차어로는 오렬홀(烏列忽)이라고 한다. 고구려시대 고대 발음으로는 '''오라골, 오라고을'''에 가깝다.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고구려가 처음 지은 성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지배하기 전에는 요동 공손씨 정권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으며(당시 이름은 양평현襄平縣의 양평성襄平城) 이를 통해 볼 때 아마 한나라 대 혹은 그 이전 시대에 해당하는 전국시대에 이미 건설된 성으로 추정되며 어떤 세력이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요충지이기에 요동을 지배한 세력들이 돌아가며 유지, 보수해왔던 걸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지배하던 시기 요동성에는 동명성왕의 사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동명성왕의 창과 쇄자갑이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을 끼고 건설된 고구려의 여타 성들과는 다르게 평지성이었다.
후연의 4대 황제 소문제 모용희가 요동성 함락 직전에 '''"요동성에 짐과 황후가 맨처음 입성할 테니 성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라. 그럼 짐이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테니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는 약이라도 빤 것 같은 명령을 내렸다가 점령을 말아먹었던 전적이 있다.
요동지방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에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 이전부터 자주 전투가 벌어지는 등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특히 수나라와의 두번째 전쟁에서 벌어진 초거대규모의 공성전이 유명하다.
요동성은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 때 요동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고 있다가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손씨가 멸망할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데만 백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백 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정벌군은 불과 4만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기록에 의하면 실병력 113만 3800명에 200만 대군을 자칭했을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에게 잠깐 함락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집결된 당나라 본대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저력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였다.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으로 이 성을 점령했던 때는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지용수, 이성계의 요동성 함락때였다.
과거 형태만 추정되었지만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요동성총(遼東城塚)[1] 내에서 성곽도가 발견되면서 형태를 파악하게 되었다.[2]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고구려성 특유의 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요동성이 고구려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정적인 게 아닌 만큼 고구려에 의해서 치성이 설치된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있던 성을 차지한 거라면, 보강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아니라 요동성총은 안악 3호분처럼 고구려 양식이 아니라 4세기 요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써 존속시기가 비교적 이른 편이다. 논자에 따라서 요동성총의 축조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볼 수도 있고, 5세기 초반으로 늦게 보는 경우도 있다. 만약 요동성총이 만들어진 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본다면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 이전에 요동성총의 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며, 즉 고구려에 의해서 축조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요동성 자체도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랴오양시 도시 중심부라고 보고 있긴 하지만 실물자료가 없기 때문에 고구려 성곽으로써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조차도 알기 어렵다.
요동성의 높이는 대략 30m가량으로 알려져있는데 어마어마한 높이다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으나 2014년 경에 풍납 토성의 성벽 높이가 14m인 것이 확인되면서 요동성의 높이가 어마어마했을 가능성도 함께 올라갔다. 사실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던 데다가 넓이도 꽤 넓었던 요동성은 어설픈 성벽 높이로는 방어가 쉽지 않았고 충분한 방어력을 보장받으려면 성벽의 높이가 꽤 높아야 했다. 유럽에서도 대포가 도입되면서 성벽의 높이가 낮아졌지만[4] 대포가 없을 시기에는 성벽이 높을수록 유리했고 산성이 아닌 평지성에서는 더더욱 높은 성벽이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 요동성과 같이 평지성인 북송의 카이펑도 성벽이 꽤 높은 편이다. 심지어 여기는 삼중벽으로 되있어 철통같은 방비가 가능했다.
고구려 지도와 요동성의 위치
遼東城
1. 소개
요동에 있던 성 중 하나.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 근방에 위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음차어로는 오렬홀(烏列忽)이라고 한다. 고구려시대 고대 발음으로는 '''오라골, 오라고을'''에 가깝다.
2. 역사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고구려가 처음 지은 성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지배하기 전에는 요동 공손씨 정권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으며(당시 이름은 양평현襄平縣의 양평성襄平城) 이를 통해 볼 때 아마 한나라 대 혹은 그 이전 시대에 해당하는 전국시대에 이미 건설된 성으로 추정되며 어떤 세력이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요충지이기에 요동을 지배한 세력들이 돌아가며 유지, 보수해왔던 걸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지배하던 시기 요동성에는 동명성왕의 사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동명성왕의 창과 쇄자갑이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을 끼고 건설된 고구려의 여타 성들과는 다르게 평지성이었다.
후연의 4대 황제 소문제 모용희가 요동성 함락 직전에 '''"요동성에 짐과 황후가 맨처음 입성할 테니 성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라. 그럼 짐이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테니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는 약이라도 빤 것 같은 명령을 내렸다가 점령을 말아먹었던 전적이 있다.
요동지방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에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 이전부터 자주 전투가 벌어지는 등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특히 수나라와의 두번째 전쟁에서 벌어진 초거대규모의 공성전이 유명하다.
요동성은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 때 요동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고 있다가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손씨가 멸망할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데만 백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백 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정벌군은 불과 4만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기록에 의하면 실병력 113만 3800명에 200만 대군을 자칭했을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에게 잠깐 함락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집결된 당나라 본대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저력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였다.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으로 이 성을 점령했던 때는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지용수, 이성계의 요동성 함락때였다.
3. 형태
과거 형태만 추정되었지만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요동성총(遼東城塚)[1] 내에서 성곽도가 발견되면서 형태를 파악하게 되었다.[2]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고구려성 특유의 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요동성이 고구려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정적인 게 아닌 만큼 고구려에 의해서 치성이 설치된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있던 성을 차지한 거라면, 보강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아니라 요동성총은 안악 3호분처럼 고구려 양식이 아니라 4세기 요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써 존속시기가 비교적 이른 편이다. 논자에 따라서 요동성총의 축조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볼 수도 있고, 5세기 초반으로 늦게 보는 경우도 있다. 만약 요동성총이 만들어진 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본다면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 이전에 요동성총의 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며, 즉 고구려에 의해서 축조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요동성 자체도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랴오양시 도시 중심부라고 보고 있긴 하지만 실물자료가 없기 때문에 고구려 성곽으로써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조차도 알기 어렵다.
요동성의 높이는 대략 30m가량으로 알려져있는데 어마어마한 높이다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으나 2014년 경에 풍납 토성의 성벽 높이가 14m인 것이 확인되면서 요동성의 높이가 어마어마했을 가능성도 함께 올라갔다. 사실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던 데다가 넓이도 꽤 넓었던 요동성은 어설픈 성벽 높이로는 방어가 쉽지 않았고 충분한 방어력을 보장받으려면 성벽의 높이가 꽤 높아야 했다. 유럽에서도 대포가 도입되면서 성벽의 높이가 낮아졌지만[4] 대포가 없을 시기에는 성벽이 높을수록 유리했고 산성이 아닌 평지성에서는 더더욱 높은 성벽이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 요동성과 같이 평지성인 북송의 카이펑도 성벽이 꽤 높은 편이다. 심지어 여기는 삼중벽으로 되있어 철통같은 방비가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