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 그리스의 전 총리, 2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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Γεώργιος Ανδρέας Παπανδρέου/George Papandreou Senior
1888년 2월 13일 ~ 1968년 11월 1일
망명정부를 포함, 두 차례 그리스의 총리를 지내면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과 입헌군주제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군부 쿠데타로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정치인.
대학 졸업 후 입헌군주제와 급진적 서방식 개혁을 주장하는 중도진보 성향의 자유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 그리스 제2공화국 시기에 내무부,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친 히틀러 괴뢰정부가 수립되자 카이로로 망명, 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했다.
이 후 그리스가 해방되자 귀국해 옛 자유당 인사들과 반공 레지스탕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규합해 파판드레우 중도연합당을 결성했고, 1963년 총선에서 승리해 개인 통산 두 번째, 총선을 통해서는 개인통산 첫 번째 총리에 취임했으나, 우파를 대표하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와 국정운영 방향을 놓고 불화를 일으켰고, 1967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가택연금 중이던 1968년 11월 1일, 자신의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미국 UCLA 경제학 교수로 일하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귀국, 파판드레우 중도연합당을 계승하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 반군부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뒤 민주화가 되면서 1981년~1989년, 1993년~1996년에 걸쳐 두 차례의 총리를 지내다가 폐렴으로 급사했다. 아들 안드레아스는 그리스의 민주화 정착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치세때는 그리스의 경제가 오일쇼크때보다야 나아지기는 했지만 1950년대~70년대 초반의 고성장 기세와는 거리가 멀어서 청년실업률이 10%에 달한데다가[1] 또한 조강지처와 이혼하는 스캔들이나 크레타 은행 비리 덕택에 평가는 썩 높지는 않은 편이다. 그나마 민주화를 주도했다는 점이나 상대정당인 신민주당도 썩 수완이 좋은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을때까지 총리직에 재직할 수는 있었다.
2. 그리스의 전 총리, 1의 손자
Γεώργιος Ανδρέας Παπανδρέου/George Papandreou Jun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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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드레우 수상 홈페이지
1952년 6월 16일 출생. 2009년 10월 6일부터 2011년까지 그리스의 182대 수상(총리)을 맡았으며, 2006년부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할아버지(1888~1968)와 자기 아버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모두 그리스의 수상을 지냈던 그리스 정치 명문가 출신.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그리스로 돌아와 아버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창당한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대한민국에서 쓰는 표현은 '''그리스 사회당''')에 참여했다.
2009년 10월 총선에서 경제위기로 민심을 잃은 그리스 신민당(그리스 신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았고, 집권 후에 감사를 벌이면서 신민주당 정권하에서 대규모 재정적자 은페문제를 폭로했다. 하지만 재정적자 은폐를 폭로하고,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는데, 이미 고실업, 관광산업 침체, 거품경제 붕괴 문제라는 3연타로 신음하고 있었던 차인데다가, 그 동안 쌓였던 부채가 너무 과도해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청년실업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긴축정책을 펼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긴축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사회시스템 자체가 무력화되어가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2011년 하반기에 이 인간의 말 한 마디에 전 세계 주식시장이 출렁거리게 되었는데, 그리스 디폴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버렸기 때문. 2011년 11월 1일 뜬금없이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개드립을 날려서 전 세계 증시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가 3일만인 11월 4일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가 가결되자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등 아주 즉흥적인 행태를 보이다가 사퇴했다. 그리고 총선을 거치며 그리스 사회당은 3당으로 몰락했다.
2015년 1월 25일에 열리는 조기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신당창당계획을 발표하고 그를 총리로 만들어준 사회당은 반발하는 중. 결국에 민주사회주의 운동(Movement of Democratic Socialists)라는 명칭으로 신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정작 총선에서 사회당의 표를 떼어먹는 수준에 그치며(득표율 2.4%) 의석확보에 실패했다.
[1] 뭐 비슷한 시기의 이탈리아나 스페인이라고 해서 상황이 썩 나은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3~4%대의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재편의 후유증이 지속된 탓에 청년실업률이 두자리수를 기록하는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