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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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우수리스크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도시. 인구는 소련 말기부터 15만 정도로 정체 상태에 있다. 연해주 제3의 도시.[1]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다. 로컬선으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즉, 블라디보스토크의 근교권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크고 중요했던 유서 깊은 도시.철도가 모이는 곳이다보니 지금도 연해주의 수부도시 블라디보스토크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위치이다.
이 곳의 맛집은 고려인 문화센터의 한식당, 러시아 전통음식을 파는 하리보, 고려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Patriot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말갈족의 한 부족인 쉬르빈족(솔빈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던 지역으로, 청나라의 영토였을 때는 만주어로 주루 호톤(Juru hoton)[2] 이라는 이름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이 영유하면서 1866년 성 니콜라스의 이름을 따서 니콜스코예라는 이름이 붙었다. 1898년 도시가 되면서 니콜스크-우수리스키라는 이름으로 변하였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1935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따 '보로실로프'였다가 1957년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우수리스크라는 이름에서 우수는 한자어로 비우자에 물수자인데 이는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54년 세워진 천문대가 있다.
발해시대에는 솔빈부가 있던 곳이다. 우수리스크의 옛 이름 '''쌍성자(雙城子)'''는 백범일지를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사료에 이따금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깝고, 고려인 관련 유적이 있어서 한국인 관광객도 종종 들르는 듯 하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이상설의 유허비[3] , 최재형[4] 이 마지막까지 생활한 집 등이 있다. 또한 우수리스크의 한인(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앞에는 201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옮겨온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생전에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도록 제의한 것도 최재형이었으며, 그를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게 하려는 시도가 불발되고 안중근이 끝내 뤼순에서 사형된 뒤, 최재형은 안중근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 앞에 세워져 있었던 해당 비석은 2012년 말 의과대에서 일방적으로 철거, 시청 창고로 옮겨졌던 것을 2014년 8월에야 우수리스크로 옮겨, 지반 공사를 거쳐 현재의 위치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수리스크에선 최재형 기념비가 세워졌고, 최재형의 손자도 참석했다.#
한민족이 러시아땅에서 가장 많은 수가 정착한 곳이 우수리스크였으며, 탈냉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서쪽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들이 재정착하기 위해 '우정마을'이라는 마을을 재건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인 터전의 중심지답게 고려인문화센터도 건립돼 있다.
창원시와 자매결연관계이다.
한국의 국무총리였던 정일권, 북한의 김정일이 이 도시 출신이다.
우수리스크 주변은 19세기에 한인들이 정착해서 마을을 일군 적이 있었고 한국의 영농기업들도 진출해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상에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북한 방면으로 가는 철도분기점이 위치한다.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에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철도가 분기하는 곳이라 중국 하얼빈 방면이나 북한 두만강선과 이어진다. 연길 등 중국 이곳저곳으로 가는 직통버스도 운행한다.
겨울의 우수리스크
1. 개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도시. 인구는 소련 말기부터 15만 정도로 정체 상태에 있다. 연해주 제3의 도시.[1]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다. 로컬선으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즉, 블라디보스토크의 근교권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크고 중요했던 유서 깊은 도시.철도가 모이는 곳이다보니 지금도 연해주의 수부도시 블라디보스토크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위치이다.
이 곳의 맛집은 고려인 문화센터의 한식당, 러시아 전통음식을 파는 하리보, 고려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Patriot 등이 있다.
2. 역사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말갈족의 한 부족인 쉬르빈족(솔빈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던 지역으로, 청나라의 영토였을 때는 만주어로 주루 호톤(Juru hoton)[2] 이라는 이름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이 영유하면서 1866년 성 니콜라스의 이름을 따서 니콜스코예라는 이름이 붙었다. 1898년 도시가 되면서 니콜스크-우수리스키라는 이름으로 변하였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1935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따 '보로실로프'였다가 1957년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우수리스크라는 이름에서 우수는 한자어로 비우자에 물수자인데 이는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54년 세워진 천문대가 있다.
3. 한국과의 관계
발해시대에는 솔빈부가 있던 곳이다. 우수리스크의 옛 이름 '''쌍성자(雙城子)'''는 백범일지를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사료에 이따금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깝고, 고려인 관련 유적이 있어서 한국인 관광객도 종종 들르는 듯 하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이상설의 유허비[3] , 최재형[4] 이 마지막까지 생활한 집 등이 있다. 또한 우수리스크의 한인(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앞에는 201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옮겨온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생전에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도록 제의한 것도 최재형이었으며, 그를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게 하려는 시도가 불발되고 안중근이 끝내 뤼순에서 사형된 뒤, 최재형은 안중근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 앞에 세워져 있었던 해당 비석은 2012년 말 의과대에서 일방적으로 철거, 시청 창고로 옮겨졌던 것을 2014년 8월에야 우수리스크로 옮겨, 지반 공사를 거쳐 현재의 위치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수리스크에선 최재형 기념비가 세워졌고, 최재형의 손자도 참석했다.#
한민족이 러시아땅에서 가장 많은 수가 정착한 곳이 우수리스크였으며, 탈냉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서쪽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들이 재정착하기 위해 '우정마을'이라는 마을을 재건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인 터전의 중심지답게 고려인문화센터도 건립돼 있다.
창원시와 자매결연관계이다.
한국의 국무총리였던 정일권, 북한의 김정일이 이 도시 출신이다.
우수리스크 주변은 19세기에 한인들이 정착해서 마을을 일군 적이 있었고 한국의 영농기업들도 진출해 있다.#
4. 교통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상에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북한 방면으로 가는 철도분기점이 위치한다.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에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철도가 분기하는 곳이라 중국 하얼빈 방면이나 북한 두만강선과 이어진다. 연길 등 중국 이곳저곳으로 가는 직통버스도 운행한다.
5. 그외
[1] 1위는 당연히 블라디보스토크, 2위는 나홋카.[2] 뜻은 한어(漢語) 雙城子와 같다.[3] "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그곳에 내 시신도 들여놓지 않겠다"며 사후 유해를 화장해 이 강에 뿌려줄 것을 유언한 데서 기인한다.[4] 함경도의 노비 출신으로 연해주로 이주, 군수업을 통해 모은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당시 연해주로 망명한 한국 의병들에게 성능 좋은 소총을 지급하고 러시아 내의 항일 의병 세력을 모아 무장단체 '동의회'를 결성,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는 등 적극적인 무장 독립투쟁을 펼쳤으나, 러시아 내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로 온 일본군에게 1920년 4월 5일 체포되었고, 63세로 총살되었다.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기 전 거주했던 집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5] 맥도날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