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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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소련 초기 5원수(보로실로프, 부됸니, 투하쳅스키, 블류헤르, 예고로프) 중 하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친구였다.''' 초기 소련 공산당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적백내전기에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전쟁에서, 그리고 독소전쟁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졸전으로 결국 야전 지휘에서 손 떼야 했고, 전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실권을 잃은 후 막판에 정계에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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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노슬라프[2] 에서 가까운 베르크네예에서 태어났다. 1896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파업에 참가하여 해고되었다. 1903년에 볼셰비키에 참가했다. 1906년에는 파업을 선동해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3] 의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스탈린과 한방을 썼고 그 인연으로 스탈린과 안면을 텄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도 출석하여 미하일 프룬제와 미하일 칼리닌 등을 알게 되었다. 동년에 다시 체포되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로 유배되었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이렇듯 청년 시절부터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2.2. 붉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의 차리친(훗날의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스탈린과 친해졌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나 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개는 개처럼 죽어야 한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이 서명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하면서 남긴 코멘트.[4]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무명의 당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 큰 두각을 끼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차르의 은행이나 열차를 강도질해 혁명자금을 모아오는 일을 맡았고 그 와중 범죄조직과의 관계도 많아져서 당 입장에서 드러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탈린은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처세술에 뛰어나[5] 당시 얌전하고 별 문제되지 않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남들을 깔보는 일이 많아 적이 많았다. 이때도 트로츠키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남러시아 전선을 잘지키고 있던 스탈린을 공격했다.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스탈린의 가장 믿을만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내며 공격했으며,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당시엔 그렇게 요직은 아니란 평가를 받던 서기장 직위와 민족문제위원직을 이용해 하급 당원들과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아갔다. 레닌이 뇌일혈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지만, 다른 간부들이 오만한 트로츠키보단 겸손한 스탈린이 낫다고 여겨 스탈린을 지지해 무시됐다.
보로실로프는 192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25년 미하일 프룬제의 죽음 이후, 보로실로프는 국방장관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 자리는 1934년까지 맡게 된다. 프룬제의 지위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을 나눠가졌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와 더불어 스탈린의 삼두 체제(트로이카)와 맞먹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파인 프룬제보다는 자신의 사람이 맡는 것을 더 선호했다. 프룬제는 지병인 위장의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라고 권유받았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과다 흡입으로 사망했다.[6] 어쨌든 보로실로프는 1926년 새롭게 생긴 정치국의 정규 위원이 되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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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1월 11일 창설되고 촬영된 5명의 원수. 위의 왼쪽부터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아래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쳅스키, 보로실로프, 예고로프. 사진에서 보듯이 보로실로프가 넘버 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가서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목이 날아갔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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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젊은 시절.
2차대전 때 보로실로프가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백내전에서의 그의 전과를 과소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그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했을 뿐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적은 없다고 심하게 폄하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백군쪽이 영국에서 원정온 전차 사단이 동행할 정도로 높은 무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지휘관도 데니킨, 브란겔, 크라스노프 등 남러시아 백군에서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지휘 체계라고 하면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하는 적군쪽이 훨씬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어하던 볼가 강 유역은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하는 요충지였고 실제로 이곳을 잘 막아내면서 두 세력이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니)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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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에 제작된 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8]
보로실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처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던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관념을 매우 비판하였고, 반역죄로 기소된 투하쳅스키를 재판하는 군사 재판에서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다만 기계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군의 기계화에 대해 스탈린과 함께 지원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줬다. 투하쳅스키를 비판한 이유는 투하쳅스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만 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9] 통설로는 대숙청으로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기계화론을 주장하던 장교들이 처형되고 소련군의 기계화 과정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출혈을 유발했다고 평가되었으나 이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과정에서 보로실로프가 함께 격하되며 나온 프로파간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실제로는 오히려 대숙청에서 기병 장교들 역시 많이 숙청되었고 보로실로프는 부됸니의 툴툴거림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감축하고 반대로 기갑 사단의 수는 두배 이상 증강했다.
2.3. 겨울전쟁
1939년 나치 독일과 은밀하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일으켜 중유럽, 서유럽을 유린하는 동안 동쪽의 발트 해, 흑해 연안 약소국(발트 3국, 몰도바)들을 병합하던 스탈린은 핀란드에 레닌그라드 수비를 위해 핀란드 영토를 할양하고 핀란드 주요 영토를 조차해 줄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핀란드가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보로실로프는 친히 침공군을 이끌었고, 처음에는 4개 전선군 42만 명을 동원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 철저히 관광당한 폴란드처럼 자신도 핀란드군 정도는 금새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 성립 후 독립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스탈린은 발트 3국처럼 핀란드도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시킬 참이어서 소련 내의 핀란드 망명객을 중심으로 핀란드 민주 공화국라는 괴뢰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침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까지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현대전에 관해서 일자무식인 그가 40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10] 잘해 봐야 대대장급 군인에게 4개 야전군을 통솔하는 집단군사령관 급의 능력을 바란 거나 마찬가지다. 보로실로프의 지휘가 부실한 데다가 대숙청 후에 승진한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까지 합쳐져서 소련군은 대패했고, 보로실로프는 그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과 국방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세묜 티모셴코가 소련군을 총지휘했다. 티모셴코는 그래도 전술을 아는 사람이라서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 워낙 극심했기에 스탈린은 이후 핀란드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옛 친구인 보로실로프가 처참히 패한 후 돌아오자 보로실로프에게 크게 화를 냈고, 보로실로프는 이때 무능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면서(!)''' 대들었다. 이 일화가 담긴 원문을 기재한다.
그런데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런 '''불경한 짓'''을 한 보로실로프를 별로 탓하지 않고 그냥 지휘권을 해임하는 선에서 그쳤다. 사실인 게 문제가 아니라 보로실로프가 없으면 스탈린은 붉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적백내전때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하고 권력투쟁을 할 때 보로실로프는 철저하게 스탈린의 편을 들었다. 그 의심병 스탈린이 소련 정치판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보로실로프 한 명 뿐이었다.The Finnish Soviet War exposed a multitude of problems in the Red Army, even though the Soviet eventually won and the Finland was forced to make considerable territorial concessions. The Soviet performance was so embarrassingly weak that it alarmed even the political leadership. Soviet deaths, more than 80,000, were much higher than the number of the Finnish dead. Khrushchev admitted that 'A victory at such a cost was actually a moral defeat.' Stalin was angry with the military commanders, and Khrushchev recalled a meeting at Stalin's dacha:
▶겨울전쟁에서 이긴 건 소련이었고 핀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빼앗겼으나, 붉은 군대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련의 (군사) 행동은 당혹스러울만큼 취약해서 정치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다. 소련군의 사망자는 8만 명이 넘어 핀란드군의 사망자를 훨씬 상회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대가를 치르고 이긴 건 사실 정신적으론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들에게 열이 받아 있었고,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별장에서 있었던 그들의 만남을 회상했다.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11]
2.4.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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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소전쟁 당시의 보로실로프
이렇게 겨울전쟁에서 과를 범한 보로실로프는 1941년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순식간에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쇄도했다. 보로실로프는 어떤 때는 스스로 권총을 빼들고 진두에 서서 독일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는 용맹을 보이기도 했으나 작전 지도에 있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소련 제 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함락 직전에 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무학이었으니. 레닌그라드가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은 보다못해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당시 자신과의 의견 충돌로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게오르기 주코프를 파견하였다. 주코프가 사령부에 나타나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서야 자신의 해임을 알았고,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내가 싸우던 방식으로는 지휘하기엔 전쟁이 너무나 달라졌다." 고 솔직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주코프의 지휘로 인해 1944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보로실로프를 용서했고 보로실로프는 이후에는 일선 지휘를 맡지 않고 후방 근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1947년에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 수립을 지휘했다.
2.5.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1952년 보로실로프는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위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소련 최고 권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탈린 밑에 고만고만한 부하들 여러 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들은 일단 권력 투쟁 대신 권력 분점에 합의하여 여러 자리를 나눠 가졌다.
그래서 보로실로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국가원수)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취임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NKVD 부장을 지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을 맡았다. 이때 권력을 분점한 말렌코프나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보로실로프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은 모두 NKVD 부장이었던 베리야를 모두 두려워했는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구실을 만들어 자신들을 체포, 처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단 협력하여 공동의 적인 베리야를 체포해 처형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베리야를 극혐했지만 베리야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루쇼프 앞에서 베리야를 찬양하며 자기 마음을 숨겼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다른 정치국원들을 먼저 설득했고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보로실로프를 찾아가 베리야 제거 계획을 말하자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1956년 보로실로프는 75주년 생일 기념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수여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공훈 덕택이 아니라 원로 대접용으로 던져 준 것으로 보인다(...)[12]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의 보수파(소위 반당 그룹)에 일시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1957년 흐루쇼프의 실각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재빨리 편을 바꾸어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노쇠한 데다가 겨울전쟁 이후 군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저지른 탓에 당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별로 지지 세력이 없었고,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친네에 불과했다.
1957년에는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이때 베이징 동물원의 판다들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했고 그걸 본 마오쩌둥은 소련에 판다 한쌍을 보내주었다.
2.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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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예복을 입은 노년의 보로실로프.
1960년 5월 7일, 흐루쇼프가 뒤에 있는 소련 최고회의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 요구"를 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1960년 7월 1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보로실로프에 대하여 소련 공산당 상무회를[13] 구성하는 상무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1961년 10월 그의 정치적 몰락은 22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 자격을 박탈하는 식으로 완결했다. 보로실로프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재임하던 마지막 나날의 어떤 식사 자리에서 모든 멤버들이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료들의 외면에서 이미 그가 축출될 운명임을 깨닫고 미리 선수를 써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몰락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얼굴마담 노릇을 시켰다.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혁명 원로였기 때문에 보수파였던 브레즈네프가 대우를 해 준 것이다. 196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복귀하고, 소련군의 창설 50주년이 되던 1968년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1969년 사망해서 다른 원수들, 유명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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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묘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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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로실로프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세묜 부됸니와 함께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승진하여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 넣은 원흉'''으로 꼽힌다. 정실 인사의 폐해를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예. 그래도 부됸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기병에 관해서는 꽤나 큰 기여를 했고, 보로실로프는 적백내전때 전차부대를 포함한 백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공이 있기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이 자리에 오른건 아니다. 보로실로프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긴 했다. 그리고 대숙청을 비난했던 일화처럼 스탈린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일갈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2차대전때 잘한 점을 꼽자면 유능한 장성 이반 코네프를 대숙청으로부터 구했다는 것과 하단에 설명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14] 이후 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점이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부분일 듯하다.
그리고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기계화는 반대했지만, 점진적인 기계화는 찬성했다.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후임 세묜 티모셴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기계화를 주장했다. 또한 대숙청 이후 살아남은 많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한 것도 이 사람의 공이다. 주코프가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게 된 것, 할힌골 전투에 참가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사실 이런 야전 지휘관이 아닌 정치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보로실로프가 당장 공포스런 절대권력자 앞에서 할말은 하면서 객관적으로 필요한 정책, 인사는 군말없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업적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순수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2차대전의 삽질로 인해서 적백내전 당시 보여준 활약이 뭍혔다는 점에서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당시 신생 공산 혁명정권이었다는 근본적인 체질때문에 소련에서 보로실로프 같은 최고 지도자와 군부의 관계를 조율할 정치군인의 존재 자체는 불가피했고, 이런 국면에서 자신의 무능을 순순히 인정하고 주코프, 코네프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 맡겼다는 면에서 소련군이 초반의 재앙과 삽질을 극복하고 숙련된 강군으로 거듭난 발전에 아예 기여한 바가 없다곤 할 수 없다.
적백내전 이후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개인 화기 사격 솜씨는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소련군 장성들이 보로실로프 앞에서 나강 M1895 사격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한 발도 맞추지 못하자 총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장성에게 권총을 받아들더니 그 자리에서 모든 탄환을 명중시키고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동무의 사격 실력이오.'''"라고 말했다. 이후 소련군 전군에 한동안 '보로실로프처럼 쏴라' 라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져서 소련군의 개인 화기 숙련도가 약간 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혁명 이전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은행 강도와 열차 강도, 각종 적색테러로 잔뼈가 굵은 스탈린처럼 내전기에 다져진 개인 전투력과 소부대 전술 지휘 능력은 높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대장-중대장 혹은 특수부대의 최소 단위 제대 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 집단군사령관급 위치에 임명되었으니 문제였다. [15]
결론적으로, 보로실로프는 주코프와 코네프를 알아보고 밀어준 걸로 입증한 사람 보는 안목, 누구에게도 없는 특별한 장점인 스탈린과의 인간적인 친분, 뛰어난 개인 전투력을 감안했을 때 '''인민위원회급 간부'''나 '''소부대 지휘관'''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대부대 지휘관에는 적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는 스탈린이 군내에 자신의 확실한 지지자를 심어서 군내 동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다.
보로실로프의 비판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어떤 지휘관이 유능하냐 무능하냐 이전에 더 중요한 부분이 명령체계에 복종하는 것이다. 투하체프스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경쟁자로 믿을수 없었고, 예고로프는 당내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블류헤르 역시 극동에서 군벌마냥 행세했다. 부됸니조차 기병 병과를 사병화 하는 태도로 숙청 직전까지 갔다. 지휘관이 우직하게 사수명령을 고수하는 게 문제일수 있지만 자기 멋대로 부대를 후퇴시킨다면 그게 훨씬 더 큰 문제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일단 조직에 체계가 있고 군대가 통수권자에 복종을 해야지 유/무능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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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두 명의 단란한 한때.
- 보로실로프와 스탈린은 정말 절친이었는지, 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함께 뱃놀이 갔을 때 스탈린이 농담삼아 "자네 영국 스파이지?"라고 하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이름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장성이었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 헷갈릴 수도 있다.
- 1935~1958년, 1970년~199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루간스크(루한시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보로실로프그라드'로 불렸다.
- 스탈린 시대의 숨막히던 사회 분위기를 잘 묘사한 영화 이너 서클에서도 시대 변화를 보여 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웃 집에서는 보로실로프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초상화까지 걸어둘 정도로 강한 빠심을 드러내는데, 대숙청 당시 보로실로프의 인기를 반영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이웃도 결국 대숙청에 휘말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스탈린의 전속 영화 상영 기사가 된 주인공도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이 신나게 깨지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 집무실에서 실컷 갈굼당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크게 실망한다. 결국 주인공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물려받은 보로실로프 초상화를 스탈린 초상화로 바꿔 버린다. 이 과정에서 열려 있던 반지하방 창문으로 마침 지나가던 소떼들이 오줌을 갈기자 보로실로프 초상화로 오줌 세례를 막는 등 한 번 더 능욕당한다(...).
- 중전차 보로실로프 전차 이름의 기원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16] 영어로는 Kliment Voroshilov를 줄여 KV라고 하고 러시아어로는 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를 줄여 КВ라고 한다. 보로실로프 전차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보로실로프가 이 전차의 개발에 힘을 실어 준 것이 계기가 돼서 이 양반의 이름이 붙었다. 괜히 이 전차의 개발진들이 전차에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 테헤란 회담 이후 진행된 저녁 만찬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만든 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스탈린에게 선물했다. 스탈린은 이 검을 받은 뒤 감사의 의미로 칼집에 키스를 하고는 옆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건넸는데, 보로실로프가 이 검을 만지작거리다가 놓쳐서 땅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고 전해진다.(...)
5. 주요 수훈 내역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1956, 1968)
- 사회주의노력영웅 (1960)
- 레닌훈장 8회 (1935, 1938, 1941 ,1945, 1951, 1956, 1961, 1968)
- 적기훈장 6회 (1919, 1921, 1925, 1930, 1944, 1948)
- 수보로프 1급 훈장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