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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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초의 관료. 태위와 사도를 할 정도였지만,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서 자손은 가난하게 살았다. 자는 자대(子大),
2. 초기 생애
우연이 태어날 때 백련(白練)같은 물체가 서서히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점을 치는 사람은 이것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였다.
젊었을 적에 우연은 키가 커 8척(尺) 6촌이였다고 한다. 그 만큼 힘도 셌는지 솥을 메고 다닐 정도였고, 젊어서 호구정장(戶牖亭長)이 되었다.
왕망의 귀인(貴人)이였던 위씨(魏氏) 가문에 하객이였던 자가 방종하여 법을 지키지 않자 우연은 병졸을 데리고 그의 집에 쳐들어가 관련된 자들을 체포하였기에 우연은 이 일로 원망을 사 승진을 할 수 없었다.
우연은 성격이 두텁고 순박하여 사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았고, 덕분에(?) 크게 명성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우연은 직접 갑옷을 입고서 친족들을 호위하면서 향민(鄕民)들을 보호해 주었다.
우연에게는 젖먹이이던 먼 친척 여동생이 있는데 부모는 그녀를 키울 수가 없어지자 도랑에 버리고 말았다. 우연은 우연히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 그녀를 가엾이 여기고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입양하기로 하였다.
우연은 집금오(執金吾)의 부중(府中)에서 일하였는데 곧 세양현(細陽縣)의 현령이 되었다.
현령으로 지낼 당시 우연은 죄수들에게 세사절(歲時節)이 될 때마다 죄수들이 집에서 지낼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죄수들은 감복하여 꼭 돌아겠다 하였으나 한 죄수는 그만 병을 얻어 앓아 누워 버려 수레에 실어져서 오고, 결국 도착하자마자 죽어버렸다. 우연은 관리들을 데리고 죽은 죄수를 성문 밖에 묻어 주었고, 백성들은 감동을 받았다.
3. 광무제의 눈에 띄다
우연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진류군(陳留郡)의 태수였던 부종(富宗)이란 자가 우연을 불러 치중(治中)으로 삼았다. 부종은 사람이 사치스럽고 여러 물품이 태수라는 신분에 맞지 않았기에 우연은 부종에게 충고하기를 "옛날 안영(晏婴)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이 완전하지 않았고, 계손행보(季孫行父)가 노나라에 있었을 때에는 처첩이 비단 옷을 입지 안았기에 일을 하는데 실패가 적었습니다"라고 하였다.[1] 그러나 부종은 이말을 듣지 않았고, 우연은 물러났다.
그 후 부종은 사치스러움이 걸려 사형이 내려졌고, 부종은 이때 눈물을 흘리며 "내가 우치중(虞治中, 우연)의 비판을 듣지않는 것이 후회스럽구나"라는 우연의 인생을 바꿀 말을 한다. 광무제는 이 때 부종의 말을 듣고서 우종을 알게 되었다.
44년 광무제의 동순(東巡)때 소황(小黃)을 지나가는데 이곳에는 한고조의 어머니인 소령황후(昭靈皇后)의 능묘가 있던 곳이다. 당시 진류군의 독우(督郵)였던 우연은 광무제가 불러서 소령황후(昭靈皇后)의 능묘를 자세히 말하라고 하니 우연은 침착하고 조리있게 말하면서 나무와 꽃의 갯수부터 제사의 의례까지 모두 설명하였고, 광무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광무제가 순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봉구현(封丘縣)에 가니 성문이 작아 황제의 의장(儀仗)이 통과 할 수가 없었다. 광무제는 매우 화나 어사(御史)를 몹시 심하게 때렸다. 그러자 우연은 이것은 독우인 내가 잘못한 일이라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라하는 등 언사가 격양되어 광무제는 감동하였고, 진류독(陳留督) 우연 덕분에 어사의 죄는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말을 하였다...[2]
진류군을 빠져나온 후 우연은 광무제에게 돈, 검대(劍帶), 패도(佩刀)를 하사 받았고, 명성이 널리 퍼졌다.
4. 법의 기강이 세워지다
47년 사도인 옥황정(玉況徵)이 정월 초하룻날(음력 1월 1일)을 맞아 조하(朝賀)를 위해 우연을 불렀다. 광무제는 소황문(小黃門)을 보내 우연이 나라에서 보낸 마차를 타게 하였다.
48년 낙양현의 현령이 되었다. 이때 음씨(陰氏) 가문에는 마성(馬成)이란 문객이 있었는데, 그는 늘 도둑질을 일삼았다. 효화황후 음씨를 둔 음씨 가문의 문객이면서 악행을 일삼는 마성을 우연은 두고 볼 수 없어 마성을 체포하여 고문하였고, 음씨 가문은 마성을 풀어달라며 여러번 호소하였다. 신양후(信陽侯) 음취(陰就)은 결국 광무제에게 마성의 관한 일을 호소하였다. 이에 우연은 억울한 일이 많다고 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어도관(御道館)에 가서 직접 마성에 관한 상황들을 물었다.
우연은 억울한게 있어 옥장(獄狀)과 얘기 할려는 자는 동쪽에 하소연 할려는 것이 억지스러운 자는 서쪽에 서라하니 마성은 동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우연이 그를 멈춰세우고 말을 하였으니, "너는 이 사회의 거대한 좀벌레같은 놈이다. 오랫동안 큰 세력에만 의지하며 나라의 벌을 무서워 하지 않으니 아직 너의 죄를 다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너를 사형시키에는 충분하구나"라고 하였다.
마성은 당연히 억울하다며 큰 소리를 쳤고, 이가 통했는지 어계(御階)에 있는 광무제 옆에 붙어있던 폐극랑(陛戟郞)은 우연을 막아내면서 마성을 풀어달라 했다. 광무제는 우연은 사사로운 것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님을 알고, 마성에게 "네가 왕법을 어겼으니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빨리 가라고 호통을 쳤다.
결국 이사건으로 인해 황족들도 감히 법이 없이 행세 하지 못하게 되었다.
5. 등연을 꿰뚫어보다
51년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승진하였다.
58년(영평 원년)에는 신야현(新野縣)에 등연(鄧衍)이라는 치중(治中)이 있었는데 그는 화희황후 등씨의 친척이었기에 여러번 조정의 회의에 모습을 비추었다. 그런데 등연의 용모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는지 명제는 "짐(朕)의 용모가 이 사람과 닮았나?"라고 좌우 시종들에게 물었다. 그리고서 등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레와 말, 의복을 주었다.
그러나 우연은 비록 등연이 용모는 있으나 덕이 없다면서 등연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래도 명제는 등연을 중시하고 낭중(郎中) 겸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등연의 아버지가 죽자 등연은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상을 지내지도 않았다. 명제는 이 사실을 알고 "지인즉철 유제기난지(知人則哲 惟帝其難之)[3] 이란 말이 있었는데 바른 말이구나"라고 말하였고, 등연은 부끄러워 물러났다. 명제는 등연이 덕이 없다는 것을 안 우연을 중시하였다.
6. 억울하게 죽다
60년 2월 조희를 대신하여 태위(太尉)가 되었다.
65년 범천(範遷)을 대신하여 사도(司徒)가 되었다. 그러나 우연은 후한 개국이래 2대를 모시고서 20년을 조정에 있었지만 그리 큰 치적이 없었다.
71년 초왕 유영의 모반 문제로 음씨(陰氏)가 우연에 대해 중상모략을 펼치자 명제는 속아 우연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서 태위와 사도를 지내었음에도 그의 자손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