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츠미 테츠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No. 27'''
'''우츠미 테츠야
(内海 哲也 / Tetsuya Utsumi)
'''
'''생년월일'''
1982년 4월 9일
'''국적'''
일본
'''출신지'''
교토 부 죠요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4년 자유 계약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1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9~ )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09'''
'''2012'''
1. 소개
2. 프로 입단 전
3. 프로 경력
4. 국가대표
5. 여담


1. 소개


우츠미 테츠야(内海 哲也, 1982.04.19~)는 일본프로야구 선수다.
스가노 도모유키가 등장하기 전까지 교진군의 에이스 역할을 하고,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활약했기 때문에 한국 팬들에게도 인지도 있는 투수이다. 주로 일본 장원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 프로 입단 전


후쿠이 현 쓰루가시에 위치한 쓰루가케히고등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2000년 봄 고시엔(센바츠) 대회 본선 출전을 확정지었으나 팀 동료가 무면허 운전+음주운전을 저질러 학교에서는 고시엔 본선 출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2000년 여름 고시엔 출전을 눈 앞에 둔 후쿠이 현 대회 결승전에서 연장10회까지 가는 접전끝에 2대3으로 패하며 고시엔 구장을 밟아보지 못했다.
조부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출신이라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무대에 가지 않을 것이라 선포했음에도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1순위로 지명했다. 오기 아키라 감독의 설득으로 오릭스 입단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나 고등학교 시절 배터리를 짰던 리 게이이치(이경일)가 8순위로 요미우리에 지명되면서[1] 오릭스 입단 대신 사회인야구팀인 도쿄가스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다.
도쿄가스에서 3년간 뛰고 역지명제도를 통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에 입단했다.[2]

3. 프로 경력


2004년 요미우리에 입단하여 2018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뛰었으나 FA 스마타니 긴지로의 보상선수로 2019시즌을 앞두고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하였다.[3]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2019 시즌을 통으로 쉬고 말았다.
2007년에는 탈삼진왕(180개), 2011년과 2012년에는 다승왕(18승과 15승)을 차지했고[4] 2012년에는 베스트나인으로도 뽑혔다.
2005년에는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 타이거즈센트럴 리그 우승 확정을 허용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그 다음해인 2006년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 이가와 게이와 맞대결 때 본인의 첫 완봉을 찍으면서 설욕했다. 그때 2-0으로 이겼는데 이승엽이 혼자서 점수냈다. 그리고 이가와 게이는 한 달 뒤 한일통산 400, 401호를 허용하게 된다. 하지만 우츠미는 삿포로돔 닛폰햄전에서 털린거 빼곤[5] 윤석민처럼 잘 던지고도 다패왕을 먹었다. 이후 꾸준히 거인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고, 07년엔 탈삼진왕을 가져갔으며 09년엔 WBC에서 다르빗슈, 이와쿠마와 삼각편대를 이뤄 금메달을 따기도 했고, 11,12년 2년연속 규정이닝 1점대 방어율에 다승왕으로 스가노 도모유키 이전 단연 교진의 에이스였다. 12년이 커리어하이로 이해 다승왕(전해에 이어 2년연속), 승률 1위, 최우수투수상, 베스트나인, 교류전 MVP, 팀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며 일본시리즈 MVP까지 온갖 상을 다 휩쓸었고 이 성적을 바탕으로 교진과 4년 16억엔의 다년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4년계약 첫 해 13승을 거뒀지만 160이닝 3점대로 조금 삐그덕거리기 시작해 이듬해부터는 143이닝 3점대, 23이닝, 104이닝 3점대 후반으로 그야말로 그림에 그린 듯한 먹튀의 정석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래도 2017년 연봉은 딱 절반인 2억엔. 성적을 보면 스기우치 토시야마냥 더 후려쳐도 할 말이 없지만 그동안 팀에 많이 공헌한 선수이다 보니 자존심은 세워 준 금액. 그러나 2017년에도 1군에서 모습을 보기 힘들었고 57이닝 5점대로 부진하였다. 2018년 연봉은 또 반 잘라낸 1억. 비슷한 시기 FA로 와서 우쓰미와 교진의 원투펀치를 이루다 또 비슷한 시기에 추락한 스기우치 도시야가 무려 90% 삭감이었음을 생각하면, 확실히 과거의 공헌을 고려해서 덜 깎은 금액이다.
암흑기부터 요미우리의 선발진을 꾸준하게 지켜왔던 선수라서 우에하라 고지이루 오랫만에 배출한 투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지 않을까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2018년 전격적으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포수 스미타니 긴지로의 FA 보상선수로 지명됐다. 초노 히사요시의 히로시마 이적만큼이나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준 지명. 그래서 성골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이대로 은퇴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지만, 순순히 세이부 이적을 수락했다. 사실 선수생활 후반부가 초라해서 다카하시나 아베, 사카모토 등 미래의 경쟁자들에 비하면 일단 한 수 밀리는지라 이후 코치로 평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이상 감독 가능성은 어차피 낮은 편인데, 세이부로 이적하면 2~3년은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 있고 지금 받는 금액과 하락폭을 고려할 때 앞으로 2억엔 정도는 더 땡길 수 있다. 2억엔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에 가능성이 희박한 수십년 후의 교진 감독 자리에 모험을 거느니 20억원을 선택한 것. 2억엔이면 로또 1등보다 더 큰 돈인데다 교진에만 목 안매면 오히려 타팀 감독 자리가 문이 넓기도 하고. 교진 감독은 1자리뿐이지만 타 팀 감독은 총합 11자리니깐.
쵸노도 그렇지만, 이쪽도 이름빼고 성적만 보면 갈만하긴 했다. 100이닝도 못 던진 방어율 5점씩 되는 30대 후반의 노장이 연봉은 1억 엔이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KIA가 FA가 끝난 후의 윤석민을 보호명단에서 푼 것과 비슷하다. 성적 자체는 명단에서 풀려도 할 말이 없긴 했다. 세이부도 한창 윈나우인 팀이라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유망주보다는 한계는 보여도 당장 쓸 수 있는 베테랑을 데려오는 게 맞고, 아무리 성적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왼손투수라 공만 던질 수 있으면 좌완 원포인트로라도 1군에서 어쨌든 써먹을 수는 있으니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2019년 세이부 소속으로 시즌을 준비했지만 심각한 왼팔 부상으로 1군 출장 기록 없이 2군에서만 몇경기 나오고 재활에만 매달렸다. 본인은 현역 연장을 선언하고 2020년을 맞았지만 코로나19로 시즌 개막이 지연되면서 스타트가 늦어졌고, 리그가 재개된 뒤 나온 2군 경기들에서도 5점대 후반의 ERA를 기록하는 등 좋지 않다. 2020년 8월 22일 1군에 콜업되어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이적 후 1년만에 세이부에서의 1군 데뷔전을 치루었고, 6이닝 4K 3자책점으로 QS에는 성공하였지만 패전투수가 되었다.

4. 국가대표


2009,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 참가하였다.[6]

5. 여담


187cm, 93kg로 동양인치고 상당한 장신이며,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도 거인으로 통한다.
[1] 재일교포 선수로 고등학교 시절 타력이 좋아 스카우트들에게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향간에는 이경일의 지명은 우츠미를 거인으로 데려오기 위한 사전포석 이라는 말이 있었으며, 입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력외 통고를 받고 요미우리의 불펜 포수로 전향했다.[2] 자신이 원하는 팀의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서 3시즌을 뛰거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희망구단으로 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1993년 도입, 2007년 폐지.[3] 이때 우츠미처럼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요미우리에서 뼈를 묻겠다고 선언했던 쵸노 히사요시마루 요시히로의 FA 보상선수로 지목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떠났다.[4] 1점대 방어율은 기록한 유이한 해다. 2011년에는 1.70, 2012년에는 1.98[5] 이때 닛폰햄 선발이 다르빗슈 유. 고쿠보 히로키와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고도 완투승했다.[6] 2009년 WBC에서 이용규에게 헤드샷을 던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