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보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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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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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구대표팀 감독 시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90
고쿠보 히로키 (小久保 裕紀)
'''생년월일'''
1971년 10월 8일
'''출신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 시
'''신장'''
182cm 87kg
'''학력'''
세이와중학교 - 와카야마현립 세이린고등학교[1] -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포지션'''
3루수, 1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데뷔'''
1993년 드래프트 2위(역지명)
'''소속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4~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7-2012)'''
'''지도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수석코치 (2021~)'''
'''2011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MVP)'''
2010년
이마에 토시아키
(치바 롯데 마린즈)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2년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자이언츠)
<color=#373a3c> '''1995년 퍼시픽리그 최다 홈런'''
1994년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버팔로즈)
35홈런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8홈런'''

1996년
트로이 닐
(오릭스 블루웨이브)
32홈런
<color=#373a3c> '''1997년 퍼시픽리그 최다 타점'''
1996년
트로이 닐
(오릭스 블루웨이브)
111타점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14타점'''

1998년
나이젤 윌슨
(닛폰햄 파이터즈)
124타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야마모토 코지
(2013)

'''고쿠보 히로키'''
(2017)

미정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99'''
<color=#373a3c>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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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이다. .
선수 시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거포 내야수로서 활약을 하였고 리더십을 인정받아 양 구단에서 주장을 맡기도 했다. 다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의 선수 생활은 3년뿐이었고, 그 이전과 이후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프로 선수생활은 호크스에서 했기에 후쿠오카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여겨진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사단법인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제10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2. 선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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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서 주전으로 뛰며 팀을 사상 첫 대학야구 일본제일 팀으로 만들기도 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참여해,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 후, 1993년 역지명 형식[3]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한다.
입단 직후부터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자질을 인정받았고, 데뷔 해엔 조금 저조한 성적을 찍었지만 서서히 성장해가며 2년차부터 본격적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주전 2루수로 정착해 주축 타자로 활약했다. 광활한 후쿠오카 돔을 사용하면서도 1995년도 퍼시픽리그 홈런왕(28홈런)[4][6][7] 1997년 퍼시픽리그 타점왕(114타점)을 수상했을 정도로 호쾌한 장타가 매력이었던 선수였다. 쿠도 키미야스, 아키야마 코지, 조지마 겐지 등과 함께 다이에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 2000년 리그 연패에 공헌하는 등 호크스의 암흑기 탈출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그렇게 2001년 44홈런 123타점[8], 2002년에도 32홈런을 치는 등 중심타자로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나, 2003년 시범경기에서 부상[9]을 입게 되어 한 시즌을 날리게 된다. 고쿠보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구치 타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인방"'''으로 대표되는 다이에의 일명 '''다이하드 타선'''은 쉴새없이 불을 뿜었고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호화 투수진의 활약이 더해진 다이에는 한신 타이거즈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10]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이 핵타선에 고쿠보까지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다이에 타선은 내년에도 최강이다!'''라고 예상했으나...
200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무보상 트레이드''' 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부상 치료비 지급을 둘러싼 구단과의 트러블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이전까지 팀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선수단의 리더였던 고쿠보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게 된 선수단과 팬들은 당연히 멘붕에 빠졌고, 선수단은 항의의 의미로 이해 시즌 종료 후 예정되었던 우승 여행을 보이콧하며 고쿠보를 그따위 방식으로 허무하게 방출시킨 구단을 거세게 비난하였다.[11] 트레이드 자체는 고쿠보가 먼저 요구했다고 하지만...[12]
이 무상 트레이드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있었으나, 고쿠보의 자서전이 출판되고 나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다. 트레이드를 원한 것은 본인으로, 단순히 수술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 호크스의 운영진들은 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도 화류계 여성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경기가 끝난 다음 수훈선수와 그런 여성들이 사진을 찍도록 하는 등 구단 운영이 막장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수의 성적이 아닌, 선수 굿즈 판매실적을 연봉협상에 반영하겠다는 등 도를 넘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고 고쿠보는 이런 것들에 지속적으로 항의하는 입장이었다.[13] 이후 고쿠보가 2003년 큰 부상을 당하고 나서 수술을 미국에서 하겠다고 추진했으나 구단 측에서 돈이 많이 든다며 취소했고, 이게 고쿠보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을 끊는 계기가 되어 타팀으로 이적을 요청하게 된다. 호크스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입장이었으며 딱히 요미우리 이적을 요청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와 요미우리간에 어떤 계약이 있었는지도 본인은 알지 못 한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고쿠보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에는 '''요미우리 우타자로는 사상 최초로 40홈런을 돌파'''(41홈런)하며 컴백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리더십을 인정받아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의 주장에 선출'''되기도 한다. 요미우리의 지독한 순혈주의를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사례. 다만 그 시절 요미우리는 막장 감독 호리우치 츠네오 아래에서 구단 사상 초유의 암흑기(래봐야 2년 연속 B클래스이지만)를 겪던 때라 고쿠보의 활약이 다소 빛바랜 감은 있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취득했고, 친정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금의환향해 은퇴할 때까지 뛰었다. 복귀의 가장 큰 이유는 오 사다하루 감독을 행가레 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클린업 트리오의 일각으로 활약했으며, 2011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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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마지막 해인 2012년 2000안타를 돌파한 모습)
2012년 '''통산 2,041안타, 413홈런'''의 대기록을 세운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러나 정작 은퇴경기가 됐던 2012년 정규시즌 마지막 홈 경기인 10월 8일 경기에 팀은 상대팀 투수인 오릭스 버팔로즈니시 유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헌납했다. 고쿠보 본인이 선수생활 하는 동안 처음으로 경험하는 노히트 노런 경기였다고(...). 심지어 이 날은 본인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3. 지도자 생활


이듬해인 2013년부터는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5]

3.1.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5 WBSC 프리미어 12를 통해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 데뷔 대회를 치루게 되었다. MLB 사무국에서 메이저리거들의 출전을 불허함에 따라 강력한 자국리그를 보유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은 단숨에 우승후보 1순위로 평가받게 되었다.[16]
세간의 예상대로 고쿠보 호는 대회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은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개막전 5:0 완승을 시작으로 3전 전승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바로 이어진 2라운드[17]에서도 3전 전승, 대회 총 6전 전승 파죽지세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전 역시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18]의 호투에 힘업어 8회까지 3:0 리드를 가져갔지만 9회초 이른바 도쿄대첩(야구)를 허용하며 대회 초대 우승의 영광을 안방에서 놓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3,4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비판적인 여론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회 후 그에 대한 경질설이 연일 불거지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야구계는 이번 대회가 그가 감독으로서 치룬 첫 대회라는 점과 정말 중요한 대회는 다가올 2017 WBC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점을 이유로 그를 연임시켰다.


3.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운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임기 마지막 대회로 이번 대회의 성적에 따라 2019 WBSC 프리미어 122020 도쿄 올림픽까지 그가 지휘봉을 잡을 수 있을지 결정되는 대회였다. 고쿠보 히로키 감독 개인적으로서 역시 지난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부진[19]의 치욕을 한번에 되갚을 수 있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쿠바, 호주, 중국과 1라운드 B조에 배치되었다. 고쿠보호는 아마 최강 쿠바전 11:6 대승을 시작으로 호주전 4:1 승, 중국전 7:1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 역시 네덜란드전 8:6 승, 쿠바전 8:5 승, 이스라엘전 8:3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WBC 전 대회 4강 이상 진출에 성공했다.[20]

이어진 4강전, 메이저리거 올스타들로 중무장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만났지만 2:1 석패를 거두며 8년만의 세계 야구 패권 탈환은 4년 후로 미루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한명의 메이저리거[21]만을 포함한 채 전원 자국리거로 미국을 상대한 고쿠보호는 실력면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 명경기를 선보이며 세계 야구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스가노 도모유키는 메이저리거 올스타 타선을 상대로 6이닝 비자책 호투를 펼치며 일본프로야구의 높은 수준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당초 목표로 삼았던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연이은 불참[22] 속에서 WBC 4대회 연속 4강이라는 호성적, 세계 최강 미국과의 호각으로 고쿠보 히로키는 지난 대회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처음에는 재계약을 통해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지휘봉을 잡게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오퍼를 고사하고 스스로 감독직을 그만뒀다. 후임은 야쿠르트, 니혼햄 캡틴 출신인 이나바 아츠노리.
그러나 고쿠보 감독의 WBC 성적으론 애당초 올림픽까지는 무리였다는 의견이 많은데, 애당초 WBC 4강은 일본 입장에서는 큰 성적도 아니기 때문인게 고쿠보 감독 이전 감독인 야마모토 고지 감독이 이끄는 2013 WBC 대표팀도 큰 무리 없이 4강은 갔기 때문이다.[23] 고쿠보 감독의 4강도 지난번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쓰러뜨린 한국이 1라운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한 언플이란 것이다. 자국 리그가 탄탄한 일본 입장에서는 4강 정도는 사실 본전치기인 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실제론 일본야구협회도 언플은 했지만 협회가 원하던 성적은 프리미어 12 우승, 그리고 WBC 준우승 정도의 성적이었기에 프리미어 12 3위와 WBC 4강의 성적을 이끈 고쿠보 감독은 애초에 재계약은 무리였다는 게 평론이다.

3.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일본 야구대표팀에서 물러난뒤 2021시즌부터 고향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돌아와 쿠도 키미야스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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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던 이종운 감독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
노래를 엄청 잘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이 뛰어났고, 은퇴한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다만, 옷을 엄청 못 입는 것으로도 유명해 현역 시절엔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패션 테러리스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다이에 호크스 입단 시절 자신보다 2살 연상이자 7년 선배인 당시에만 해도 호크스의 거포 유망주로 키워지던 오미치 노리요시를 '''세계에서 가장 배트를 짧게 잡는 사나이''' 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물론 고쿠보 본인이 의도한건 아니고 신인시절 프리배팅에서 무지막지한 괴력을 뽐내자 그걸 지켜보던 오미치가 혀를 내두르면서 '''"장타자로 경쟁해서는 밥벌어 먹고 살기 힘들겠다."''' 라고 결심하고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컨택 히터가 된 계기를 주게 된것.
'''주니치에겐 저승사자''' 그 자체였는데[24] 요미우리 시절 가장 많은 홈런을 주니치에게 뽑아냈다. 2011년 일본시리즈를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룸메였던 이승엽은 한신 킬러...였지만 정작 둘이 한솥밥을 먹은 2006년 팀은 2년 연속 B클래스로 추락했다. 그것도 올스타전까지 '''꼴찌'''였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모리야스 하지메와 행보가 비슷하다. 먼저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야구 국가대표팀은 2015 WBSC 프리미어 12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연달아 3위를 기록하고, 모리야스 하지메가 이끄는 일본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2019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서도 연달아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게다가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에서 조별리그 꼴찌로 탈락하는 변수를 보여주면서 경질설과 해임설 등이 많았고,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일본이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대참사를 당하고 멕시코3·4위전에서 홈런 5방을 포함해 11점으로 대거 난타하면서 콜드승을 거두었는데도 그에 대한 경질설이 연일 불거지게 되었다. 게다가 얼추 비슷한걸 또 뽑자면,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일본야구는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에서 패해 3·4위전에 대승을 거둬 3위에 머물고, 모리야스 하지메가 이끄는 일본축구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결승 한일전2019 EAFF E-1 풋볼 챔피언십 결승 한일전에서 패해 2위에 머물며 양쪽 감독 모두 한일전에 진 감독이 되었다.

5. 관련 문서


[1] 대원외고에선 옛날에 일본어과가 이 학교와 교류를 맺어서 수업중 이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2] 2003년은 다이에가 우승을 했지만, 후술하듯 고쿠보는 이 시즌을 통째로 날린 데다가 전대미문의 무상 트레이드 사건 때문에 이 시즌 자체가 흑역사가 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3] 과거 NPB에 존재하던 제도로, 선수가 자신이 원하는 팀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었던 제도였다.[4] 참고로 이 해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무려 '''타격 6관왕'''(타율, 타점, 득점, 최다안타, 출루율, 도루)을 달성했는데, 고쿠보가 이치로의 25홈런보다 3개 많은 28홈런을 치고 장타율도 다소 높게 나와서 타격 전부문 타이틀 획득을 저지한다. [5] 타점 1위가 고작 80타점에, 무려 '''3명이나(...)''' 나왔을 정도였다! 그중 한명이 바로 위에 나오듯이 스즈키 이치로. 그래서 1995년은 타점왕이 3명 나온 유일한 해이다.[6] 다만 이해 퍼시픽 리그는 어딘가 투고타저스러운 해였는지라[5] 홈런수는 28홈런으로 다소 적었는데, 30홈런 미만의 홈런왕은 1961년 이후 무려 34년 만의 일이었다. 참고로 1961년엔 양대리그 모두 30홈런 미만의 홈런왕이 나왔는데, 센트럴리그나가시마 시게오가 28홈런, 퍼시픽리그노무라 카츠야, 나카타 요시히로가 29홈런으로 홈런왕을 수상했다.[7] 참고로 이해 3루타도 9개로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 3루타+홈런왕 공동 1위는 양대리그 최초 기록이었다. 참고로 그 전 기록은 단일리그 시절인 1947년의 오오시타 히로시가 3루타 11개, 홈런 17개로 기록했다.[8] 이 정도 기록이면 홈런+타점왕은 따놓았겠지만.. 하필 이해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특유의 '''이테마에(쳐부숴라) 타선'''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때라, 당시 킨테츠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던 터피 로즈(홈런왕, 55홈런)와 나카무라 노리히로(타점왕, 132타점)에게 홈런, 타점왕 타이틀을 내줘야 했다. [9] 홈플레이트 접전 도중 상대팀 포수와 충돌하며 무릎 전방 십자 인대 파열+내측 인대 손상+외부 반월판 연골 손상+경골 과 대퇴골 타박상 등 완치까지 최소 6개월이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10] 이 해 고쿠보의 부상으로 인한 3루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콜업된 선수가 가와사키 무네노리다.[11] 당시 고쿠보 대신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마쓰나카 노부히코는 '''"구단에 "웃기지 마!!" 라고 말하고 싶다. 어째서 고쿠보 씨를 그렇게 공짜로 교진에 넘겨버린단 말인가?! 열심히 한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방출했다면 다른 선수들도 (고쿠보 씨와)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이 구단(다이에)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나 보다. (이 구단은 이제) 끝장이다. 팬들에겐 죄송하지만 내년에 리그 연패를 하겠다는 의지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라고 말하며 구단을 거세게 비난했고, 이해 긴 부상을 이겨내고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사와무라상 수상 투수 사이토 카즈미도 '''"지금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트레이드를 한 다이에 구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본 제일의 구단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선수를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구단 비난에 동조했을 정도다. 그런데 결국 마츠나카의 말처럼 이듬해인 2004년, 다이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 달성에 성공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 리그 연패에 실패했고, 이해 시즌 종료 후 다이에 구단은 소프트뱅크에 매각된다.[12] 공교롭게도 다이에는 경영난으로 인해 2004년 시즌 종료 후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호크스 구단을 인수하게 된다.[13] 위에 나와 있듯이 호크스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사실 이미 몰락의 조짐은 보였지만) 다이에는 자신들의 전성기를 만든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해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후쿠오카 돔을 자비로 짓기까지 한 다이에의 전성기에 비해(팀은 암흑기였지만) 구단에 대한 지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어 저런 막장짓을 할 정도로 구단 자금사정이 악화된 것.[14] 고쿠보 이전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 기록은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아키야마 코지였다. 2011년 아키야마는 소프트뱅크의 감독.[15] WBC, 올림픽, 프리미어12를 중점으로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16]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시 메이저리거들을 전부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마에다 겐타, 오타니 쇼헤이, 마키타 가즈히사 등의 예비 메이저리거들을 포함한 상당한 력이었다.[17] 8강[18] 이미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6이닝 0실점 완벽투로 승리투수가 된 경험이 있었다.[19] 최종 성적은 3위로 낮다할 수 없지만 미국,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네덜란드 등의 야구 강국들이 메이저리거들을 전원 제외한 채 치룬 대회에서의 성적이기에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20] 2006년 우승, 2009년 우승, 2013년 4강, 2017년 4강.[21] 아오키 노리치카 [22] 마에다 겐타,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타자와 준이치, 우에하라 고지 등이 대표팀 불참을 선언했다. 아오키 노리치카 만이 유일하게 메이저리거 신분으로서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23] 심지어 이 당시에는 메이저리거 차출에 실패해서 국내파로만 대회를 치렀었다.[24] 특히 50살 투수로 유명했던 야마모토 마사가 고쿠보의 홈런자판기 노릇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