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와 게이

 

[image]
이가와 케이 (井川慶)
'''생년월일'''
1979년 7월 13일
'''국적'''
일본
'''출신지'''
이바라키 현 히가시이바라키 군 오아라이 정
'''출신고교'''
미토 상고 (이바라키)
'''신체'''
186cm 93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한신 타이거즈 (1998~2006)'''
뉴욕 양키스 (2007~2011)[1]
오릭스 버팔로즈 (2012~2015)
'''200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카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200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마쓰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카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1998~2006)
2.2. 메이저리그 시절(2007~2011)
2.3. 일본으로의 복귀(2012~2015)
2.4. 독립리그 시절(2016~)
3. 과대 평가와 류현진과의 비교
4. 이모저모
4.1. 이가와 게이의 기행 목록
5. 연도별 성적


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2000년대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신의 중흥기를 이끌고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에 입단했으나. 메이저 에서는 처절한 실패만 맛보고 2012년에 다시 일본으로 복귀한 좌완투수.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1998~2006)


2002년 209⅔이닝을 던지면서 삼진 206개를 거두고 14승 9패, 방어율 2.49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003년 20승[2] 5패, 방어율 2.80으로 일본의 사이영상인 사와무라상[3]을 받았다. 2004년 200⅓이닝을 던져 탈삼진 228개, 14승 11패, 방어율 3.73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13승 9패, 방어율 3.86, 2006년은 방어율 2.97을 기록하고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애초에 이가와는 속구가 142~4km의 평속에 최고 구속은 140km 후반 정도였다. 여기에 제구까지 좋지 않았음에도 일본에서 에이스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속구의 수직 무브먼트[4]가 빼어났기 때문. 메이저리그 평균 속구 수직 무브먼트가 25cm 정도 되는 것에 비해 이가와는 거의 30cm에 달했다. 여기에 속구와 거의 똑같은 궤도로 들어오다가 홈플레이트 앞에서 가라앉는, 속구와 약 20km/h 가량의 속도 차이가 나는 체인지업이 주무기였다. 이 체인지업과 거의 똑같은 구속을 지녔으나 변화 방향이 정 반대인 슬라이더 역시 매서웠다. 따라서 상대가 속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체인지업을 던지고, 체인지업을 기다릴 때 슬라이더를 던지는 식으로 삼진을 많이 잡는 피칭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승엽에게 홈런을 헌납하고, 커리어 내내 용병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자신의 속구에 대한 과도한 프라이드가 있었다. 어쨌든 2007년 일본 리그에서 거둔 성공을 밑거름으로 연봉 400만달러, 5년 총 2,000만 달러와 포스팅 2,600만 달러 총합 4,600만 달러의 거액의 계약을 성사하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2.2. 메이저리그 시절(2007~2011)


완벽히 망했는데 그 이유는 전체적인 그의 투구 스타일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이가와는 속구의 구속이 아닌 무브먼트에 의존하는 파이어볼러 스타일이였다. 하지만 NPB와 MLB의 타자들의 레벨은 현격히 차이가 났다. 속구가 밀리면 다른 구종을 무기로 삼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도 없었고 또 설령 그럴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제구가 안 되니 과연 그 구종들을 잘 써먹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
거기에 거듭된 부진이 멘탈까지 영향을 미쳐서 차후의 전망도 어두웠다. 본인은 메이저로 가면서 그 좋아하는 명탐정 코난을 필두로 한 여타 취미생활을 모두 끊겠다면서 배수진을 치고 미국으로 갔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양키스로 간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타자'들만 있다는 메이저리그에서 그야말로 멘탈붕괴. 세간에서는 워낙 희한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인간이라 구위가 안 통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쫄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선발 데뷔전을 보면 불쌍할 만큼 '''쫄았다.''' 결정구를 직구로 택했을 때 주로 선택하는 코스가 몸쪽 높은 공이었는데, 일본에선 먹혔지만 힘 좋은 미국 타자들에겐 그저 배팅볼. 정말 정신 못 차리고 던지는 족족 높은 공에 연달아 장타가 터지는 진풍경을 보여줬다.
이런 선수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반값에 잡았다고 양키스는 좋아했으니... 물론 마쓰자카도 돈값은 못 했지만 이가와는 아예 급이 다른 선수다.
NPB에서는 위력적일지라도 메이저에서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난타당했다. 마이너 AAA리그에서는 또 그럭저럭 잘 통하기는 하는데 메이저로 콜업되기만 하면 주구장창 난타당하는 수준. 그래서 그를 AAAA급 선수라고 평하기도 한다. 혹자는 그의 양키스 이적을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 레드삭스 이적에 편승한 효과라고 하기도. 이가와 게이의 부진은 멘탈적인 요소가 큰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하던 이가와 게이가 트리플 A의 제왕 소리를 들으면서 양키스 팬들의 비웃음 거리로 전락했으니[5] 정말 안습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비웃음당하던 때가 나을 수도 있다. 후에는 오프시즌에 페이롤 체크하다 "'''어라? 왜 이만큼이 차 있지?'''" 의아해하다 "'''아, 이가와가 있었구나 ㅇㅇ'''" 하는 정도로 전락(...)
조 토리감독이 자서전에서 그를 엄청나게 혹평했다. 수년간 이어진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괴짜스러운 모습은 여전했으며 2010 시즌에는 남아공 월드컵을 보기 위해서 메이저 리그에 꼭 올라가겠다는 이가와다운(...) 다짐을 했다. 사실상 당시 양키스 불펜에서 믿을만한 좌완 투수가 다마소 마르테밖에 없었으므로 2010 시즌에는 빅리그에서 여러방면으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2010년은 스프링캠프에 참가해서 중간계투로 나왔으나.. 2⅔이닝동안 5실점한 후에 마이너리그로 강등... 결국 2010년도에도 메이저 등판은 없었다. 오히려 트리플A에서도 4.32의 방어율과 1이닝당 한 개 이상의 안타를 맞으면서, 중간계투로 전략.
2011시즌엔 트리플A가 아닌 더블A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선발 투수가 아닌 중간계투로 던지고 있으니 여러모로 안습.

2.3. 일본으로의 복귀(2012~2015)


2012년에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 에 입단, 일본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속구 구속이 140 Km 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전성기가 지나간 상태였기에 2012년의 성적은 처참하다. 거기에 팔꿈치부상에 시달리며 등판 자체를 많이 하지 못했다. 2012년 최종 성적은 2승 7패 4.65. 2013년에는 고작 9경기 선발등판에, 3승 3패 방어율 2.59를 기록했다.
2014년, 2013시즌의 부진한 성적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다만 2군 경기가 끝난 뒤에도 마지막까지 경기장에 남아서 연습을 하고있는걸 봤다는 목격정보가 속출하는걸로 봐선 노력하는 걸 포기하진 않은듯.
2015년 1군에 콜업되지 못했고 2군리그인 웨스턴리그에서 0승 4패 ERA 14.40이라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15년 10월 2일 전력 외 통보를 받아 방출된 상태. 몸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연습 또한 열심히 임했는데도 30대 초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쇠화가 찾아와 기량이 급락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가와 본인은 현역 연장을 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해외 리그 진출도 불사하겠다는 입장. 근 몇 년간 성적을 볼 때 해외라도 KBO 리그는 힘들고, 간다면 대만프로야구호주야구리그가 되지 않겠냐는 예측이 많다.

2.4. 독립리그 시절(2016~)


결국 해외리그 진출은 이뤄지지 않았고 2016시즌이 시작되고도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일본 국내에 남아 개인훈련을 하고 있는 상태로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9월 15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베현 효고 블루 썬더스라는 독립리그 팀에서 몸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고 근황을 알렸고 노력끝에 12월 15일 정식으로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2017년은 효고 블루썬더스에서 뛰면서 14시합에 등판, 11승 무패 방어율 1.10의 양민학살스런 성적을 기록했다. 10월 5일에는 친정팀 한신 2군과의 연습시합에 등판, 3이닝 1실점을 기록한 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던졌다' 며 현역생활 마감을 시사하는 발언을 남겼으나, 이는 효고 블루썬더스에서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시즌후 합의하에 효고 블루썬더스를 퇴단하였고, NPB구단의 입단제의를 기다린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이제 2018년엔 40세가 되고 이가와보다 훨씬 커리어가 훌륭하고 젊은 마쓰자카조차도[6] 이 구단 저 구단에 어필해서 겨우겨우 입단 테스트 기회를 얻는 게 현실인지라 현실적으로 NPB 복귀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나, 여론은 이가와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왕년의 에이스로 저 정도 커리어면 그냥 편하게 코치 한 자리를 얻어도 될 것인데, 나이 40이 되도록 현역으로 뛰고자 독립리그도 불사하는 모습에 실력은 둘째치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견이 일본 내에서도 주를 이루는 선수. 이가와의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짜로 그냥 오타쿠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결국 불러주는 팀이 없어서, 2018년엔 무직. 퇴단은 했으나 여전히 효고 블루썬더스로 출근하여 훈련중이다. 봄에는 프로야구 OB 올스타에 출전하였으며, 여름엔 오랜만에 방송에 나와서 근황을 전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프로 재입단을 목표로 성실히 훈련하고 있으며 독립구단에서는 정식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받고 있지 않다고. 저금이 300억원 정도 있기 때문에 낭비만 안 하면 돈 같은 거 안 받아도 먹고 살 만 하다는 감동적인지 어쩐지 알 수 없는 여전히 그다운 인터뷰를 남겼다.
은퇴 후에는 일본 웹 상에서 야구유튜브 채널에도 종종 모습을 비추고 있다.

3. 과대 평가와 류현진과의 비교


그가 가진 구종들이 류현진과 동일한 덕분에 류현진의 MLB 진출 이전에는 가끔 비교되기도 했다. 류현진의 MLB 진출 떡밥을 논했던 이들은 천웨이인부터 다르빗슈 유까지 갖가지 비교대상을 들먹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이가와와의 비교만은 꺼렸다. (...)
하지만 MLB 진출 후 첫 해의 모습을 보면 류현진과 이가와의 선수로써의 역량은 아예 급이 달랐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 속구의 평속도 최대 구속도 모두 류현진이 빠르며, 제구력은 비교하는 게 류현진에게 미안할 정도로 류현진이 뛰어나고, 변화구의 무브먼트도 뛰어나며, 선수로써의 마인드도 류현진이 훨씬 전략적이고 현명하다. 속구의 수직 무브먼트[7]만은 이가와가 좀 더 좋다. 약 1인치 정도.(...) 수평 무브먼트는 메이저 타자들에게 커터를 던진다는 말이 나오는 류현진 쪽이 훨씬 좋다.
어쨌든 류현진은 MLB 진출 첫 해 신인왕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다승왕 경쟁에도 슬며시 끼어들려는 등 이가와와는 완전히 극과 극으로 갈리는 커리어를 쌓으며 둘이 전혀 다른 역량과 타입의 선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를 참조하는 게 좋을 듯. 보면 볼수록 류현진과 이가와를 비교했다는 게 류현진에게 미안해지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
일본 팬들에게는 안쓰러운 존재여서 어떻게든 변호를 해 주고 싶은 모양인지 위키피디아나 일본인들은 그에 대해 생각보다 후하게 평가를 해 주고 지나치게 그의 역량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몇몇 한국의 일본 야구에 흥미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문제. 당장 이가와의 한국 위키피디아 내용은 일본 위키피디아의 복붙 수준인데, 지나치게 이가와에게만 좋은 말이 많다. 위의 블로그에도 나와 있듯이 이가와의 MLB 실패는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역량 부족이다. 사실 일본에서의 통산 성적도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같은 NPB를 지배한 투수들과 비교하면 명백히 몇 수 아래이다. 인기팀인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였던 점과 후술할 기행으로 인해 인터넷 상에서는 실력 이상의 주목을 받은 것.

4. 이모저모


  • 이승엽 선수의 한일 통산 400홈런 허용투수 이해 피홈런 17개 가운데 무려 5개를 이승엽에게 헌납했다. 반대로 오승환의 한일 통산 300세이브는 요미우리가 허용했다. 그걸 둘다 가장 가까이서 봤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요미우리 감독인 하라보살, 와다 유타카 전 한신 감독이 있다.

4.1. 이가와 게이의 기행 목록


[image]

'''취미 : 리모콘 헬기, 축구 비디오 1000여개, 이누야샤, 명탐정코난, 컴퓨터게임, 영화 감상(DVD), 청소'''

'''당연하겠지만,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 실제로 나가고 싶어서 프로야구를 지망했다. 목표가 달성되었지만, 동생의 친구에게 "너 왜 나를 안 써?"라고 묻자, "마쓰자카는 능력치가 높아서 쓰기 편해. 형은 도저히 못 쓰겠어."라는 소리를 듣고 격분했다. 그리고, 자신의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훈련을 한다. → 그리고, 한신의 에이스급으로 성장한다[8].
  • 연봉은 1억이지만 훈련시에는 3만 엔밖에 가지고 가지 않음. 그리고 이동은 전철로 하고, 결국 캠프 오프 날에 버스로 옆 동네까지 가서 시디 한 장(약 3천엔) 밖에 사지 않았다.
→ 「소풍 갈때도 1만 엔 정도밖에 안 가져가요. 돈 모아서 차나 리모콘 헬기를 사거든요
  • 편의점에서 차(茶) 하나를 사고 천엔을 낸 다음, 거스름돈은 모두 모금함에 넣음.
  • 쉬는 날에는 리모콘 헬기를 가지고 논다.
→ 야구잡지의 선수 선물 코너에 부러진 헬기의 날개를 제공.
  • 노무라 카츠야 감독 앞에서도 천천히 밥을 먹는 마이페이스.[9]
  • 신인시절엔 아침밥을 만들어 먹었다.
  • 의외로 몸관리가 철저하다. 프로 입단 당시 주변 선수들이 술이나 담배를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10] 이가와 본인은 탄산음료를 입에 안대고 등판 2일 전부터 고기도 안먹는다고.[11]
  • 신죠 츠요시에게 초밥을 사달라고 졸라서 100접시를 먹는다. [12]
  • 도쿄돔의 선수용 식당에는 '이가와 스페셜'이라는 라면이 있다.
된장+간장라면. 이가와 이외에는 아무도 안 먹는다.
→ 다른 선수가 말하길 "싱거운 미소라면"
→ 이가와 선수의 반론 "감칠맛 있는 간장라면"
  • 오사카돔 살롱에 있는 아주머니께 이길 수 있는 면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
  • 이가와의 어머니 왈 어린 시절에는 누나와 함께 소꿉놀이를 하고 놀았다고.
  • 쾌적하다는 이유로 기숙사 생활을 오래 했다. 방세는 약 4만. 진득하게 붙어있다가 결국 나가라는 소리를 듣고 2003년 오프시즌에 눈물을 머금고 결국 퇴소.
구단 숙소 퇴소가 결정되었을 때 한신 고시엔 구장 주차장 구석에 텐트를 설치해 달라[13]고 구단에 빌었다가 혼났다.[14]
  • 오카다 아키노부 2군 감독(당시) 왈 우메다에서 기숙사까지 혼자선 못 가는 듯.[15]
  • PS2를 인터넷 예약해서 발매일에 구입.
  • PS3도 마찬가지로 발매일에 구입.
  • 사인볼이 굉장하다.
  • 2005년 인터뷰 당시 올해의 목표: "호나우딩요"
  • 한신의 에이스지만 「이누야샤」와「명탐정 코난」은 빼먹지 않고 본다.
  • 우승 축하 기념식을 조퇴하고 다음날 등판에 대비. 다음날 히로시마전에서 9회 1실점 완투승. 경기시간 2시간 12분.
  • 게임오타쿠. 우승 후의 쉬는 날에 닛폰바시에서 중고 게임을 뒤지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노부나가의 야망 파워업키트를 산 다음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완봉승.
  • 우승 여행 희망 앙케이트 용지에 "두바이." 이유는 "석유를 캐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16]
  • 우승 기념 상품으로 구단에서 접시를 준비하여 선수들의 메시지를 적는데, 다른 선수들은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적은데 반해 이가와는 "메리 크리스마스." 참고로 상품은 해가 바뀌어서 발송.
  • 초딩때부터 왼손보호에 힘씀.
  • 고등학교 시절엔 부기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이유는 야구에서 성공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 고등학교 시절 수십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등교. 하지만 늦잠을 많이 자서 항상 필사적으로 자전거를 탔다고 한다. (덕분에 아침부터 훈련이 되고, 강한 하체를 가지게 되었다고...)
  • 스프링캠프팬의 자전거를 빌려서 10km 떨어진 연습장에 갔다고.[17]
  • 야후옥션에 나왔던 자신의 가짜 사인볼을 직접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왜 이게 기행인지 궁금하다면 위에 있는 이가와의 사인볼을 볼 것.
  • 야마구치 모에(일본 아이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 SPA!(일본의 잡지)에서 축구(올림픽 대표)에 대해 뜨거운 토론을 했다. 야구선수가 말이다.[18]
  • 4년 연속 개막투수의 감회를 묻는데 일본 "축구"대표팀이 이겨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학교에 축구부가 없어서...[19]
  • 블리츠 볼에 빠져 파이널 판타지 10의 스토리는 제대로 진행을 못했던 적도 있다.[20]
  • 파이널 판타지 7은 디스크 3에서 레벨 74. 거의 모든 캐릭터의 어빌리티 제패.
  • 요코하마의 기노쿠니야에서 게임공략본을 대량 구입.
  • '2003년 소화 시합에서 멋지게 완봉, 2004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시합에서 노히트 노런 달성.
코난 스페셜을 보지 못한 분노를 발산.
  • 이가와에게 게임보이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이런 색깔도 있구나"라고 말하고 사인.
  • 받은 초콜릿은 전부 먹는다.
  • 도쿄 원정시 지갑 안엔 1,500엔밖에 없었다고.[21]
  • 중국 주식에 의외로 관심이 있다고.
  • 칸자키 카나리(에로게성우)에게서 18금 게임을 직접 선물받음.
  • 명탐정 코난을 보려고 구단 망년회를 빼먹었다.[22]
  • 보도진의 질문에 "홈페이지를 보삼"이라고 답변.
  • 드래곤 퀘스트 8만렙을 채웠다. 게임개발사 홍보부 공식코멘트: 플레이 시간 100시간으로도 달성하기 힘든 기록. 에이스다운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 타카야마 미나미(에도가와 코난 성우)가 결혼한 다음날 등판에서 처절하게 깨지고 2군으로 떨어졌다. 타카야마 미나미가 이혼을 했으니 이가와 게이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 건지도...[23]
  • FF-XI의 발매일 당일 등판해서 엄청난 투구로 완봉승.
  • 벤치로 돌아갈 땐 반드시 카메라맨 앞을 지나서 간다
  • 연장 14회까지 하는 바람에 명탐정 코난을 못 본 복수를 하기 위해 순위와 관계없는 경기에서 완봉승.
  • 연봉협상중 어느 날이 파이널 판타지 발매일이라 줄 서려고 연봉협상장에 매니저만 보냄.
  • 한신 타이거즈 유니폼의 세로줄무늬를 가로줄무늬로 바꾸자고 했다가 당연히 거절당함. 그리고 그 해 겨울 훈련에 혼자만 가로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등장.
  • 연승 중에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선언
12연승(약 3개월), 굉장한 헤어스타일이 되어버림
감독이 머리 깎고 오라고 호통치자 1cm 깎고 옴.
→ 이 이야기를 들은 팬이 이발비를 보내줬다.
→ 2cm 깎고 옴. [24]
  • 트랙터에게도 추월당할 정도의 마이페이스 운전. 덕분에 길은 대정체를 빚고 합동연습에도 30분 지각.[25]
  • 입단 1, 2년차에는 코치에게 계속 혼이 났는데 "평생 이 사람과 함께 할 것도 아닌데..." 라고 모두 무시.
  • 태풍이 오는데도 자동차 타고 편의점에 감[26]....
  • 비행기로 이동할 때 혼자만 수하물을 맡겨서 팀버스를 기다리게함....
  • 색지에 사자성어를 적어달라고 부탁받자 적은 사자성어: 어부지리...
  • 포스팅시스템 입찰후 집에 가는 차를 타는 이가와 손에는 명탐정 코난이...
[image]
  • 포스팅 시스템에서 뉴욕 양키스가 교섭권을 획득한 그 때 이가와는 집에서 자고 있었다. 다만 이건 기행까지는 아니고 미국 동부와 일본의 시차를 생각하면 당연히 자고 있을 시간이긴 하다. 뭐 가끔 이런 중요한 계약이 있을 때는 잠 안자고 전화 기다리는 선수도 개중에는 있기는 하다만...
  • 메이져진출이 결정된 후 첫 피안타 상대가 중학생.
  • 양키스 입단 확정 후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골키퍼라고 발언. # 인터뷰한 때보다 훗날인 2010년, 2011년에 국가대표에 발탁되던 시몽 미뇰레티보 쿠르투아는 당연히 아니고 인터뷰 당시인 2007년 벨기에 국가대표 암흑기의 주전 골키퍼였던 스테인 스테이넌(Stijn Stijnen)이라는 선수도 아니고 바로 미셸 프뢰돔이다. # 프뢰돔은 월드컵에서 최초로 야신상을 수상한 골키퍼였는데 그 상을 수상했던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프뢰돔의 선방을 어린 시절의 이가와가 인상 깊게 본 듯하다.
2020년 은퇴 후 아사히 방송의 '토라반' 유튜브 채널에서 이 전설에 대해 검증 및 해명 시간을 가졌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NPB/M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1999
한신 타이거즈
7
1
1
0
0
6.46
24
14
14
15⅓
2000
9
1
3
0
0
4.35
36
20
37
39⅓
2001
29
9
13
0
0
2.67
174
98
171
192
2002
31
14
9
0
0
2.49
163
61
206
209⅔
2003
29
20
5
0
0
2.80
184
64
179
206
2004
29
14
11
0
0
3.73
190
60
228
200⅓
2005
27
13
9
0
0
3.86
199
61
145
172⅓
2006
29
14
9
0
0
2.97
180
42
194
209
2007
뉴욕 양키스
14
2
3
0
0
6.25
76
42
53
67⅔
2008
2
0
1
0
0
13.50
13
0
0
4
2012
오릭스 버팔로즈
12
2
7
0
0
4.65
64
33
36
62
2013
9
3
3
0
0
2.59
48
17
41
48⅔
2014
8
2
2
0
0
3.82
37
12
28
33
역대기록(Mi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07
탬파 양키스(싱글 A)
2
1
1
0
0
2.00
7
3
6
9
2007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11
5
4
0
0
3.69
17
17
71
68⅓
2008
26
14
6
0
0
3.45
141
49
117
156⅓
2009
26
10
8
0
0
4.15
165
47
105
145⅓
2010
22
3
4
0
0
4.32
81
24
68
77
2011
트렌톤 썬더(더블 A)
16
2
2
0
0
4.31
52
27
40
54⅓
2011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4
1
0
0
0
2.78
18
15
12
22⅔
[1] 말이 11년까지지 계약 기간의 70%동안 마이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2020년 기준 센트럴 리그 최후의 20승 투수이다.[3] 사이토 가즈미와 공동수상.[4] 역회전이 강한 속구는 양력으로 원래 공이 지나가야 할 궤도보다 더 높은 궤도를 지나가게 되고 이 차이를 수직 무브먼트로 본다. 절대 공이 떠오르는 게 아니다.[5] 심지어 양키스 마이너리그 소식을 전해주는 해외 사이트에서는 이가와가 등판할 경우 이가와 케이라는 표기 대신 '''The Ghost of Kei Igawa'''라 표기할 정도였다 (...)[6] 이가와보다 1살 연하[7] 속구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건 수치가 작을수록 속구가 덜 떨어지고 빠르게 느껴지게 된다. 수직 무브먼트가 특히나 좋은 속구에 대한 표현이 바로 '라이징 페스트볼(뜨는 직구)'이다.[8] 그의 노력에 보답했는지(?) 그의 전성기 시절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는 최강급 투수 중 하나로 나온다.[9] 실감이 안 간다면, 군대에서 최소 사단장 급 이상 지휘관과 마주보고 식사한다고 생각해보라.[10] 본인에게 홈런을 줄기차게 뽑아댔던 이승엽도 같이 클린업을 이루던 팀직속선배처럼 술담배를 멀리했다.[11] 은퇴 후에는 살이 좀 쪘다. 대만의 야구선수인 장타이산에게 홈런을 맞았는데 그때 부터 약간 살짝 몸을 불린듯.[12] 이하 영상에는 다른 선배에게 200접시 이상을 얻어먹은 이야기도 나온다. 보너스로 그 선배의 연봉은 이가와의 1/4.[13] 한신 타이거즈는 구단 클럽하우스한신 고시엔 구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쉽게말해 숙소 바로 옆에다 텐트 설치해서 살겠다고 주장한 것(...)[14] 이와 비슷한 사례는 한국 야구선수 장원삼이 한때 우리 히어로즈, 삼성 라이온즈에 선수생활 당시 기숙사 생활을 좀 했었다가 퇴소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15] 우메다에서 고시엔 구장이 있는 코시엔역까지는 한신 본선 산노미야방향 열차를 타면 된다.[16] 사실 두바이에선 석유가 거의 안 나온다(...). [17] 이런류의 선수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면서 허벅지 단련을 많이 한다.[18] 스포츠 선수들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목에 관심이 많은 경우는 많다. 다만 서로 프로인 만큼 덕담 정도에서 그치지 남의 밥출까지 깊이 파고드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이가와는 2004년에는 '전술을 이렇게 하면 메달을 딸 수 있다!'라든가, 2008년에는 '매년 축구 대표팀이 수준이 떨어져서 아쉽다' 같은 발언을 했던 게 특이한 점이다.[19] 다만,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이종범의 경우 축구부였으나 축구부가 해체하는 바람에 야구를 선택한 케이스고, 최동원도 초등학교때까지는 축구부로 활약했다가 야구로 전환한 케이스다. 그리고, 박지성의 경우에는 리틀야구부에서 "너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못한다. 더 크면 와라."라고 퇴짜를 먹은 바람에 야구 대신 축구에 집중한 케이스.[20] 요즘으로 치면 용과 같이 극이나 용과 같이 제로에서 포켓 서킷 미니카에 빠져서 스토리는 안 깨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21] 한국 환율로 약 15,000원 ~ 20,000원[22] 대부분의 선수들은 참석을 한다. 이건 배테랑이나 신인들 매년 함께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가와처럼 빼먹는 선수는 거의 없는편 단, 가족 여행이 있을 경우는 제외.[23] 타카야마씨의 전남편은 일본의 유명 만화가인 명탐정 코난을 만든 아오야마 고쇼이다.[24] 결국 이를 알고 대노한 감독에게 뒤지게 쳐맞았다고 한다. [25] 어느 나라도 팀 연습에 자꾸 지각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이가와야 여러 번이 아닌 일회성으로 끝났으니 그를 두고 태도가 나쁘네 뭐네 하는 것은 넌센스가 맞지만, 유교 사상의 동양권만 이런 문제에 신경쓴다고 말하는 것도 넌센스이다. 당장 야시엘 푸이그가 2020년 현재 미아인 이유도 불량한 워크에씩 탓이 굉장히 크고, 전 삼성의 야마이코 나바로가 한국 복귀에 실패한 이유도 결국 태도 문제였다. 또한 불성실한 선수가 팀케미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도 없다. 잦은 훈련 지각 같은 것을 안 좋게 보는 건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26] 칸사이 지역의 태풍은 의외로 좀 심한데 이런 위험한 날씨속에 가는 것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