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우치 도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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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의 에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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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군 입단회견. 왼쪽은 하라 타츠노리 감독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前 좌완투수이자 現 코치.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활약한 당대 NPB 최고의 좌완 선발투수 중 한명. 왼손 스리쿼터 투수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깨끗한 투구폼을 지니고 있으며, 이상적인 릴리즈포인트에서 뿌리는 포심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타입의 투수. 1980년생 선수들을 통칭하는 '''마쓰자카 세대'''에서 팀 동료였던 와다 츠요시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선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뒤 FA 자격을 얻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이적 초기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시즌도 있었지만 차츰 부상의 연쇄에 시달리며 출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튀 테크를 밟은 끝에 2018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여름 고시엔 가고시마 현 예선에서 47.2이닝에 64탈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보여주며 '남국의 닥터 K(南国のドクターK)'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98년 여름 고시엔에서 1회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나 2회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요코하마고등학교에게 8이닝 6실점(마쓰자카에게 허용한 홈런 포함)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현 대회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지라 촉망받는 유망주로 손에 꼽혔다.
고교 졸업 후 일본 실업야구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에 입사한 뒤 사회인 신분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데뷔 시절부터 투구폼 자체가 매우 깨끗하고 안정적이라 그런지 기복이 거의 없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조정기였던 데뷔 첫 해의 성적을 빼고 보면, 2003년부터 FA이적 전인 2011년의 기간동안 손가락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2004년을 제외하면 한 해도 부진한 적이 없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중흥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2003 시즌에 사이토 카즈미-와다 츠요시-스기우치 도시야-아라카키 나기사로 이어지는 황금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며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 파리그의 수준급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 2004년의 부상이 강판된 후 분에 못이겨서 양 주먹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하다 셀프골절을 당한 흑역사급 경험이긴 하지만 # 그래도 넘치는 승부욕을 보여준 일화이며, 그 이후로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스기우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 바로 다음해인 2005년 26경기 196.2이닝(8완투) '''18승''' 4패 '''ERA 2.11''' 218탈삼진[1] 으로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고승률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퍼시픽리그 MVP,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은 물론 퍼시픽리그 좌완 투수로는 사상 최초의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되며 명실상부한 일본 대표 사우스포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한 것.
호크스에서 남긴 성적만으로도 10년 통산 평균자책 2.92에 103승 55패 42완투 17완봉 1597탈삼진 WHIP 1.15라는 실로 괴물같은 기록. 이는 한때 센트럴리그를 풍미했던 6대 에이스 우에하라 코지(전 요미우리), 이가와 케이(전 한신), 카와카미 겐신(전 주니치), 이시카와 마사노리(야쿠르트), 미우라 다이스케(요코하마 디엔에이), 쿠로다 히로키(전 히로시마)랑 비교해봐도 그 누구보다 좋은 성적이다. 동갑내기인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비교해도 완투기록을 빼면 떨어질 게 없는 수준. 능력, 실적, 꾸준함 등 모든 면에서 실로 최고의 투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왠지 일본야구, 아니 퍼시픽 리그에서조차도 최고의 투수라는 느낌은 거의 없는데, 안 그래도 호크스가 워낙 투수 강팀인데다가 전성기가 시작된 2003년은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4선발 투수진이 결성된 해이기 때문.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자면 다르빗슈 유에 맞먹는 괴물로 평가받던 사이토 가즈미에게 포커스가 워낙 집중된 경향이 커서 상당히 손해본 감이 있다.[2] '''사이토와 아이들'''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한 탓에 온갖 야구 커뮤니티가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사이토 가즈미의 비교로 들끓었던 시대였으니. 팀 내에서 사이토의 입지가 워낙 독보적이라 그가 부상으로 잠정은퇴하게 되는 2007년까지는 단 한번도 개막전 투수를 맡아본 적이 없다. 이후 마쓰자카는 메이저로 떠나고, 사이토는 잠정 은퇴하게 되어 드디어 파리그를 좀 호령해 보게 되나 싶더니 다른 괴물이...
그렇다고 사와무라 에이지나 사이토 가즈미처럼 비운의 에이스라든가, 미우라 다이스케나 쿠로다 히로키처럼 약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안타까운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와쿠마 히사시처럼 화려하게 재기한 것도 아닌 그냥 꾸준히 잘 하는 선수이기에 호크스 팬이나 타팀 팬이나 스기우치가 잘 던져서 이겨도 져도 그냥 스기우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2011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행사, 당시 최고 수준의 대우라고 할 수 있는 4년 총액 20억엔의 계약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어제까지는 FA 신청할 생각도 없었다. 평생 호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발언으로 신나게 까이는 중(...). 가고시마 출신이라 호크스의 홈보이인데, 고향팀을 져버린다는 자체가 호크스 팬들의 멘붕을 불러 일으킨 건 당연하다.
이미 FA 권리 취득을 1년 남겨둔 2010년 시즌 후부터 이적 조짐은 보였다. 소프트뱅크에서 LG 트윈스의 이른바 신연봉제와 비슷한 연봉시스템을 채택하면서 연봉산정에서 커리어 고과의 비중이 줄어들고 직전 해 성적의 비중이 높아진 것. 그때문에 스기우치는 연봉산정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했고 연봉협상 석상에서 "구단이 이 시스템을 고집하면 나도 FA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협상을 담당한 구단이사라는 분이[3] 당시 9년동안 95승을 올린 리그의 에이스 투수에게 '''"FA 신청하면 손들고 나서는 구단은 있습니까?"'''라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멍청한 대답을 했고 여기서 빡친 스기우치는 이미 2011년 시즌 들어가기 전에 구단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구단 프런트가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고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직접 나서서 만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스기우치가 FA를 선언한 이후에도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기껏해서 성의를 보인다는 게 요미우리와 같은 대우였다.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스기우치는 호크스를 떠나서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국 그 이사님은 스기우치 이적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내야 했다.
네이버에서 일본프로야구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키무라 고이치 기자는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퍼시픽 리그 관중동원 1위를 기록하면서도 선수들의 연봉 상승으로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소프트뱅크와 당장 선발로테이션을 채울 선발투수가 절실한 요미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피력한 것. 실제로 소프트뱅크는 스기우치에 대한 보상으로 선수 대신 금전을 선택했고 이 점은 두터운 선수층으로 기회를 못 잡는 유망주들이 넘쳐나는 요미우리의 선수층을 생각하면 약간 의혹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뱅이 이후 주축 선수들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돈지랄로 브래드 페니와 윌리 모 페냐를 영입한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듯. 막상 그 둘은 다 망했고, 특히 페니는 NPB 역대급 먹튀 용병[4] 이었기에 전혀 빈자리를 채우진 못했지만.
어쨌든 교진군에 입단, 에이스 번호인 18번을 달고 뛰게 되었다.[5] 그리고 원 에이스인 우츠미 테츠야와 에이스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2012년 5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홈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9회말 투아웃까지 26 up 26 down'''을 시전하다가 마지막 9번 투수 타석 대타 나카시마 도시야에게 풀카운트에서 아쉽게 볼넷을 내주며 노히터에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 해당 경기 장면
결과적으로 2012년 시즌에서는 163이닝을 던지며 12승 4패, 평균자책 2.04, WHIP 0.98, 탈삼진 172개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세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하며 돈값을 톡톡히 했다. 다승에서는 우츠미에게 밀렸으나 그 외 세부성적으로는 에이스로 꼽기에 손색없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WHIP과 탈삼진의 경우는 리그 1위.[6] 특히 시즌 초반 거인이 개삽을 푸고 있을 때 연패를 계속 끊어주며 거의 홀로 팀을 지탱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평가도 매우 좋다. 그러나 정작 막판에 어깨부상이 도지면서 중요한 클라이맥스 시리즈나 일본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대표팀 합숙 훈련 도중 숙소에서 한 여성과 밀회하여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프라이데이에 잡혀 크게 곤욕을 치뤘다. 스기우치는 2003년에 결혼한 유부남. 결국 요미우리 구단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와 함께 벌금 징계에 처해졌고 , 이 때문인지 브라질전에서 2이닝 1실점, 대만전에서는 블론세이브를 할 뻔 하는 등 WBC에서의 폼도 영 좋지 않다.
2013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최종 153이닝 11승 6패 ERA 3.35.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그럭저럭 호투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2경기 선발 등판해서 두 번 다 2이닝도 채우지 못하는 등 대차게 말아먹으며 교진팬들에게 역적으로 찍혔다.
14년에도 10승 6패 방어율 3.16으로 그럭저럭 던졌고 한신과의 클라이막스 3차전에 출전해 5.1이닝 2실점으로 선방했지만 이 날은 불펜이 털리며 팀은 패전하고 본인은 노디시전을 기록했다.
15시즌엔 방어율 1위 순항을 하기도 했으나 어린이날에 '''0.2이닝 6실점'''으로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 전반적으로 흔들리다 7월 21일 이후로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지에서는 만성적인 엉덩이 통증으로 구속이 저하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10월에 오른쪽 고관절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팀의 다른 선수들은 고관절 수술 후 1년만에 복귀했다고는 하는데, 스기우치는 수년 동안 참았던거라 언제 복귀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15시즌 최종 성적은 6승 6패 ERA 3.95. 결국 연봉이 5억엔에서 5천만엔으로 '''무려 90%나 삭감되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연봉 삭감액.#[7]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2016년 시즌 단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2017 시즌에서도 최종전 기준 1군에 올라온 적이 없다. 2군에서만 3경기 등판.
2018 시즌에서도 2018년 9월 현재까지 1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결국, 2018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3년전 고관절 통증으로 이미 몸상태가 한계였다고 한다.
커리어 최종 성적으로 통산 142승[8] 77패, 평균자책 2.95에 2091.1이닝 2156탈삼진을 기록했다.
2018년 11월, 요미우리 팜(2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은퇴를 기념하여 후쿠오카 방송에 많이 나오기도 했다.
본인이 상대한 최고의 투수 3인 중 한명으로 스기우치를 언급한 이범호.
포심의 최고구속이 150km이긴 하나 평균구속은 140km/h 초반대로 컨디션에 따라서는 130km/h 중반대까지도 떨어지는 편. 이러한 낮은 구속만 보고 좌완 기교파 투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스기우치는 주무기가 포심인 파워피처이다.
그 증거로 탈삼진 능력이 리그 정상급인데 200K 이상 시즌이 4번에 통산 K/9이 9.27개이다.[9] K/9는 NPB에서 1,0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들 중 역대 2위 기록이다.[10] 동시대 퍼시픽리그에서 함께 활약한 다르빗슈의 NPB 통산 K/9이 8.86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기록.[11]
포심의 낮은 구속에도 불구하고 스기우치가 탈삼진 머신이 된 이유는 간결한 투구 템포와 릴리즈 덕분에 포심이 구속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타자의 체감구속은 140km/h 후반대라고 한다. 무엇보다 변화구가 무시무시하다는 점도 포심의 위력을 높이는데 한몫 한다. 스기우치의 커브는 NPB를 대표하는 커브 중 하나였는데,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커브를 밀어냈고 특히 위 영상에서 이범호가 언급했듯이 체인지업은 거의 마구 수준. 탈삼진이 많다고 이닝을 못 먹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 7이닝 이상을 꼬박꼬박 먹어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발투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광의 호크스 시절을 뒤로 하고 요미우리로 FA 이적한 이후로는 만성화된 고관절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첫 2년 이후로는 제대로 출장조차 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1980년생에 2020년 기준 만 39살이지만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등 국제경기에서 한국 대표팀과 자주 마주쳤던 선수.
2013년 WBC 대만전의 불펜피칭하는 장면에서 해설가가 '''ちょっと心配ですがブルペンには杉内がいます(조금 불안하지만 불펜에는 스기우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 뒤 불펜 피칭을 힘차게 던지는데 되받는 장면에서 받지를 못하고 그 순간 NEC의 광고가 흐르는 장면이 절묘해서 니코동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링크 참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A매치 출전자인 미드필더 엔도 야스히토의 가고시마 실업고교 1년 후배이다.
포크볼 그립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한 선수. 보통 포크는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려서 끼우고 던지는데 스기우치는 손이 작아 그렇게 던질 수가 없어서 중지를 세우고 약지와 검지 사이에 공을 끼우고 던졌다고 한다. 스기우치 본인은 체인지업이라고 불렀다는 듯. 여러 투수들이 흉내내보려고 했지만 중간에 중지에 공이 걸려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으며 국내에서도 윤석민이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짧아서 포크를 던질 수 없던 차에 스기우치와 팀메이트였던 이범호로부터 스기우치가 포크볼을 저렇게 던진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배워서 흉내를 내보았는데, 스프링캠프 내내 연습해도 도저히 던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튼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못던지는 특이한 포크 그립으로도 유명한 선수.
소프트뱅크의 에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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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군 입단회견. 왼쪽은 하라 타츠노리 감독
1. 소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前 좌완투수이자 現 코치.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활약한 당대 NPB 최고의 좌완 선발투수 중 한명. 왼손 스리쿼터 투수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깨끗한 투구폼을 지니고 있으며, 이상적인 릴리즈포인트에서 뿌리는 포심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타입의 투수. 1980년생 선수들을 통칭하는 '''마쓰자카 세대'''에서 팀 동료였던 와다 츠요시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선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뒤 FA 자격을 얻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이적 초기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시즌도 있었지만 차츰 부상의 연쇄에 시달리며 출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튀 테크를 밟은 끝에 2018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 선수 경력
2.1. 후쿠오카 호크스 시절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여름 고시엔 가고시마 현 예선에서 47.2이닝에 64탈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보여주며 '남국의 닥터 K(南国のドクターK)'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98년 여름 고시엔에서 1회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나 2회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요코하마고등학교에게 8이닝 6실점(마쓰자카에게 허용한 홈런 포함)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현 대회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지라 촉망받는 유망주로 손에 꼽혔다.
고교 졸업 후 일본 실업야구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에 입사한 뒤 사회인 신분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데뷔 시절부터 투구폼 자체가 매우 깨끗하고 안정적이라 그런지 기복이 거의 없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조정기였던 데뷔 첫 해의 성적을 빼고 보면, 2003년부터 FA이적 전인 2011년의 기간동안 손가락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2004년을 제외하면 한 해도 부진한 적이 없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중흥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2003 시즌에 사이토 카즈미-와다 츠요시-스기우치 도시야-아라카키 나기사로 이어지는 황금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며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 파리그의 수준급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 2004년의 부상이 강판된 후 분에 못이겨서 양 주먹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하다 셀프골절을 당한 흑역사급 경험이긴 하지만 # 그래도 넘치는 승부욕을 보여준 일화이며, 그 이후로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스기우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 바로 다음해인 2005년 26경기 196.2이닝(8완투) '''18승''' 4패 '''ERA 2.11''' 218탈삼진[1] 으로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고승률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퍼시픽리그 MVP,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은 물론 퍼시픽리그 좌완 투수로는 사상 최초의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되며 명실상부한 일본 대표 사우스포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한 것.
호크스에서 남긴 성적만으로도 10년 통산 평균자책 2.92에 103승 55패 42완투 17완봉 1597탈삼진 WHIP 1.15라는 실로 괴물같은 기록. 이는 한때 센트럴리그를 풍미했던 6대 에이스 우에하라 코지(전 요미우리), 이가와 케이(전 한신), 카와카미 겐신(전 주니치), 이시카와 마사노리(야쿠르트), 미우라 다이스케(요코하마 디엔에이), 쿠로다 히로키(전 히로시마)랑 비교해봐도 그 누구보다 좋은 성적이다. 동갑내기인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비교해도 완투기록을 빼면 떨어질 게 없는 수준. 능력, 실적, 꾸준함 등 모든 면에서 실로 최고의 투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왠지 일본야구, 아니 퍼시픽 리그에서조차도 최고의 투수라는 느낌은 거의 없는데, 안 그래도 호크스가 워낙 투수 강팀인데다가 전성기가 시작된 2003년은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4선발 투수진이 결성된 해이기 때문.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자면 다르빗슈 유에 맞먹는 괴물로 평가받던 사이토 가즈미에게 포커스가 워낙 집중된 경향이 커서 상당히 손해본 감이 있다.[2] '''사이토와 아이들'''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한 탓에 온갖 야구 커뮤니티가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사이토 가즈미의 비교로 들끓었던 시대였으니. 팀 내에서 사이토의 입지가 워낙 독보적이라 그가 부상으로 잠정은퇴하게 되는 2007년까지는 단 한번도 개막전 투수를 맡아본 적이 없다. 이후 마쓰자카는 메이저로 떠나고, 사이토는 잠정 은퇴하게 되어 드디어 파리그를 좀 호령해 보게 되나 싶더니 다른 괴물이...
그렇다고 사와무라 에이지나 사이토 가즈미처럼 비운의 에이스라든가, 미우라 다이스케나 쿠로다 히로키처럼 약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안타까운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와쿠마 히사시처럼 화려하게 재기한 것도 아닌 그냥 꾸준히 잘 하는 선수이기에 호크스 팬이나 타팀 팬이나 스기우치가 잘 던져서 이겨도 져도 그냥 스기우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11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행사, 당시 최고 수준의 대우라고 할 수 있는 4년 총액 20억엔의 계약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어제까지는 FA 신청할 생각도 없었다. 평생 호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발언으로 신나게 까이는 중(...). 가고시마 출신이라 호크스의 홈보이인데, 고향팀을 져버린다는 자체가 호크스 팬들의 멘붕을 불러 일으킨 건 당연하다.
이미 FA 권리 취득을 1년 남겨둔 2010년 시즌 후부터 이적 조짐은 보였다. 소프트뱅크에서 LG 트윈스의 이른바 신연봉제와 비슷한 연봉시스템을 채택하면서 연봉산정에서 커리어 고과의 비중이 줄어들고 직전 해 성적의 비중이 높아진 것. 그때문에 스기우치는 연봉산정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했고 연봉협상 석상에서 "구단이 이 시스템을 고집하면 나도 FA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협상을 담당한 구단이사라는 분이[3] 당시 9년동안 95승을 올린 리그의 에이스 투수에게 '''"FA 신청하면 손들고 나서는 구단은 있습니까?"'''라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멍청한 대답을 했고 여기서 빡친 스기우치는 이미 2011년 시즌 들어가기 전에 구단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구단 프런트가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고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직접 나서서 만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스기우치가 FA를 선언한 이후에도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기껏해서 성의를 보인다는 게 요미우리와 같은 대우였다.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스기우치는 호크스를 떠나서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국 그 이사님은 스기우치 이적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내야 했다.
네이버에서 일본프로야구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키무라 고이치 기자는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퍼시픽 리그 관중동원 1위를 기록하면서도 선수들의 연봉 상승으로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소프트뱅크와 당장 선발로테이션을 채울 선발투수가 절실한 요미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피력한 것. 실제로 소프트뱅크는 스기우치에 대한 보상으로 선수 대신 금전을 선택했고 이 점은 두터운 선수층으로 기회를 못 잡는 유망주들이 넘쳐나는 요미우리의 선수층을 생각하면 약간 의혹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뱅이 이후 주축 선수들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돈지랄로 브래드 페니와 윌리 모 페냐를 영입한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듯. 막상 그 둘은 다 망했고, 특히 페니는 NPB 역대급 먹튀 용병[4] 이었기에 전혀 빈자리를 채우진 못했지만.
어쨌든 교진군에 입단, 에이스 번호인 18번을 달고 뛰게 되었다.[5] 그리고 원 에이스인 우츠미 테츠야와 에이스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2012년 5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홈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9회말 투아웃까지 26 up 26 down'''을 시전하다가 마지막 9번 투수 타석 대타 나카시마 도시야에게 풀카운트에서 아쉽게 볼넷을 내주며 노히터에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 해당 경기 장면
결과적으로 2012년 시즌에서는 163이닝을 던지며 12승 4패, 평균자책 2.04, WHIP 0.98, 탈삼진 172개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세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하며 돈값을 톡톡히 했다. 다승에서는 우츠미에게 밀렸으나 그 외 세부성적으로는 에이스로 꼽기에 손색없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WHIP과 탈삼진의 경우는 리그 1위.[6] 특히 시즌 초반 거인이 개삽을 푸고 있을 때 연패를 계속 끊어주며 거의 홀로 팀을 지탱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평가도 매우 좋다. 그러나 정작 막판에 어깨부상이 도지면서 중요한 클라이맥스 시리즈나 일본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대표팀 합숙 훈련 도중 숙소에서 한 여성과 밀회하여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프라이데이에 잡혀 크게 곤욕을 치뤘다. 스기우치는 2003년에 결혼한 유부남. 결국 요미우리 구단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와 함께 벌금 징계에 처해졌고 , 이 때문인지 브라질전에서 2이닝 1실점, 대만전에서는 블론세이브를 할 뻔 하는 등 WBC에서의 폼도 영 좋지 않다.
2013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최종 153이닝 11승 6패 ERA 3.35.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그럭저럭 호투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2경기 선발 등판해서 두 번 다 2이닝도 채우지 못하는 등 대차게 말아먹으며 교진팬들에게 역적으로 찍혔다.
14년에도 10승 6패 방어율 3.16으로 그럭저럭 던졌고 한신과의 클라이막스 3차전에 출전해 5.1이닝 2실점으로 선방했지만 이 날은 불펜이 털리며 팀은 패전하고 본인은 노디시전을 기록했다.
15시즌엔 방어율 1위 순항을 하기도 했으나 어린이날에 '''0.2이닝 6실점'''으로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 전반적으로 흔들리다 7월 21일 이후로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지에서는 만성적인 엉덩이 통증으로 구속이 저하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10월에 오른쪽 고관절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팀의 다른 선수들은 고관절 수술 후 1년만에 복귀했다고는 하는데, 스기우치는 수년 동안 참았던거라 언제 복귀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15시즌 최종 성적은 6승 6패 ERA 3.95. 결국 연봉이 5억엔에서 5천만엔으로 '''무려 90%나 삭감되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연봉 삭감액.#[7]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2016년 시즌 단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2017 시즌에서도 최종전 기준 1군에 올라온 적이 없다. 2군에서만 3경기 등판.
2018 시즌에서도 2018년 9월 현재까지 1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결국, 2018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3년전 고관절 통증으로 이미 몸상태가 한계였다고 한다.
커리어 최종 성적으로 통산 142승[8] 77패, 평균자책 2.95에 2091.1이닝 2156탈삼진을 기록했다.
2018년 11월, 요미우리 팜(2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은퇴를 기념하여 후쿠오카 방송에 많이 나오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본인이 상대한 최고의 투수 3인 중 한명으로 스기우치를 언급한 이범호.
포심의 최고구속이 150km이긴 하나 평균구속은 140km/h 초반대로 컨디션에 따라서는 130km/h 중반대까지도 떨어지는 편. 이러한 낮은 구속만 보고 좌완 기교파 투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스기우치는 주무기가 포심인 파워피처이다.
그 증거로 탈삼진 능력이 리그 정상급인데 200K 이상 시즌이 4번에 통산 K/9이 9.27개이다.[9] K/9는 NPB에서 1,0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들 중 역대 2위 기록이다.[10] 동시대 퍼시픽리그에서 함께 활약한 다르빗슈의 NPB 통산 K/9이 8.86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기록.[11]
포심의 낮은 구속에도 불구하고 스기우치가 탈삼진 머신이 된 이유는 간결한 투구 템포와 릴리즈 덕분에 포심이 구속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타자의 체감구속은 140km/h 후반대라고 한다. 무엇보다 변화구가 무시무시하다는 점도 포심의 위력을 높이는데 한몫 한다. 스기우치의 커브는 NPB를 대표하는 커브 중 하나였는데,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커브를 밀어냈고 특히 위 영상에서 이범호가 언급했듯이 체인지업은 거의 마구 수준. 탈삼진이 많다고 이닝을 못 먹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 7이닝 이상을 꼬박꼬박 먹어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발투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광의 호크스 시절을 뒤로 하고 요미우리로 FA 이적한 이후로는 만성화된 고관절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첫 2년 이후로는 제대로 출장조차 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4. 여담
1980년생에 2020년 기준 만 39살이지만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등 국제경기에서 한국 대표팀과 자주 마주쳤던 선수.
2013년 WBC 대만전의 불펜피칭하는 장면에서 해설가가 '''ちょっと心配ですがブルペンには杉内がいます(조금 불안하지만 불펜에는 스기우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 뒤 불펜 피칭을 힘차게 던지는데 되받는 장면에서 받지를 못하고 그 순간 NEC의 광고가 흐르는 장면이 절묘해서 니코동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링크 참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A매치 출전자인 미드필더 엔도 야스히토의 가고시마 실업고교 1년 후배이다.
포크볼 그립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한 선수. 보통 포크는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려서 끼우고 던지는데 스기우치는 손이 작아 그렇게 던질 수가 없어서 중지를 세우고 약지와 검지 사이에 공을 끼우고 던졌다고 한다. 스기우치 본인은 체인지업이라고 불렀다는 듯. 여러 투수들이 흉내내보려고 했지만 중간에 중지에 공이 걸려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으며 국내에서도 윤석민이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짧아서 포크를 던질 수 없던 차에 스기우치와 팀메이트였던 이범호로부터 스기우치가 포크볼을 저렇게 던진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배워서 흉내를 내보았는데, 스프링캠프 내내 연습해도 도저히 던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튼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못던지는 특이한 포크 그립으로도 유명한 선수.
5. 연도별 기록
[1] 최다탈삼진은 마쓰자카 다이스케(226K)가 차지했다.[2] 사이토 가즈미는 96년 드래프트 1라운더로 구단에서 애지중지하던 유망주였으나, 어깨부상으로 오랜동안 제 활약을 못한 '비운의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깨고 나온게 바로 2003년 시즌.[3] 고바야시 이타루라는 사람으로 치바 롯데 출신의 선수였다. 드래프트 때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도쿄대학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 때문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해서 도쿄대 들어갈 정도인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를 목표로 단련해온 괴물들과 상대가 될 리는 없고 결국 1군에서 등판 못하고 은퇴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았는지 은퇴 후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프런트로 활동했었다.[4] 플로리다 말린스에서는 2003 월드 시리즈 우승 멤버였고 입단 시점에서 메이저 통산 119승(최종적으로 MLB 121승)의 실적이 있는 우완 선발. 추정 연봉 2억 2500만엔을 받은 거물 용병이었지만, 소프트뱅크에서는 '''1경기 3.1이닝 64구'''를 던지고 '''6실점'''(자책점 4)한 뒤 어깨 통증을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한 뒤 5월에 방출되었다. 투수판 마이크 그린웰.[5] 잘 알다시피 18번은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에서 이어진 교진 에이스 세습번호로, 교진이 얼마나 스기우치에게 건 기대가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당대에는 순혈도 아닌, 교진에서 활약이 검증되지 않은 이적생에게 18번을 덜컥 내주는 데에 반발도 있었으나, 스기우치가 이적후 몇 년간 에이스다운 활약을 보여주면서 사그라들었다.[6] 양대리그 탈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라고 한다.[7] 다만 이러한 연봉 대폭 삭감은 스기우치의 동의를 얻은 것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연봉 1억엔 이상이면 40%까지만 삭감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라고 하는데, 뭐 동의를 한 건 맞지만 사실상 강제로 스기우치가 을이라 구단이 제안한 금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방출이기 때문에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8] 2018 시즌 종료 기준 마쓰자카 세대 중에서는 최다승.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미일 통산 170승이다.[9] 14시즌 동안 2091.1이닝을 던지면서 잡은 탈삼진은 2156개이다.[10] NPB 역대 1위는 통산 5시즌 동안 1051/1이닝을 소화하면서 1204개의 탈삼진을 잡은 노모 히데오의 10.3개.[11] 다르빗슈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NPB에서 7시즌 동안 1268.1이닝을 던지면서 잡은 탈삼진이 1250개이다. 같은 기간 동안 스기우치는 1268이닝을 던지면서 1331개의 탈삼진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