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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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 Ucraino-brasileiro, Ucraniano-brasileiro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ські бразильці

1. 개요


60만여 명 정도 되는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은 브라질 내 다른 민족들과 잘 통혼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고수하며 파라나 주 일부 지역에 자신들끼리 모여산다고 한다.

2. 이민사


19세기 초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비옥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인구가 희망했던 지역이었던 남부 팜파스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유럽 각국으로부터 이민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이민 정착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방 출신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서 브라질로 이민하였다. 갈리치아 출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은 이미 브라질로 이민 오기 이전부터 정교회를 믿는 다른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이나 로마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들과 충돌할 때가 많았었고, 이는 후에 이들의 브라질 정착 후 폐쇄적인 민족 문화를 유지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민 온 지 4~5세대가 지났지만, 이들이 사는 시골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의 갈리치아(할리치) 방언이 많이 통용된다고 한다.
브라질은 구소련 구성국과 캐나다, 미국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나라인데, 캐나다나 미국의 경우와 다르게 상술한 것처럼 자신들끼리만 모여서 사는 편이다. 이른바 “콜로니”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르[1]와 어느정도 흡사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서, 밀과 쌀, 콩을 재배해 판매하고, 이 외에도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먹던 호밀과 메밀 등을 경작한다. 이들 상당수는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재세례파 공동체 못지 않게 출산율이 높고, 또한 배타성이 강해 우크라이나계 외 다른 브라질인들을 걍 다 쵸르니(우크라이나어로 흑인)이라고 불렀다. 다만, 쿠리치바 등 도시 지역에 사는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은 이탈리아계, 포르투갈계, 스페인계, 독일계, 폴란드계 등 주류 백인들과 교류가 상당한 편이고, 주류 라틴계 브라질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었다.
또한 20세기 초반 소련 영토 볼린에서 온 우크라이나계 개신교 신도[2]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정착한대다 배타성이 약했고, 오늘날 기준으로는 우크라이나계 정체성은 상실하고 다른 브라질인들과 완전 동화된 상태이다.

3. 여담


브라질의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에는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들이 30만여 명 정도 거주하는데, 이들은 시기적으로 브라질계보다 이민 역사가 늦고 종교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아니라 정교회 출신이었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정교회를 믿은 많은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루신인 소수민족 인구가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가 폴란드 제2공화국 내의 차별을 피해 1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유럽계 이민을 환영하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중 절반이 정교회 신도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처럼 폐쇄적인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현지 아르헨티나인들과 동화되었다.

4. 관련 항목



[1] 전통적인 슬라브 농민 공동체로 제정 러시아 말기 스톨리핀의 부농 육성 개혁과 소련의 콜호스 건설 과정 및 숙청을 통해 현대 동유럽 일대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2] 원래 우크라이나에서 개신교는 주로 독일계가 믿었으며, 이들은 1920년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선교사들이 귀국하여 선교한 경우이다. 물론 소련 국가무신론 정책 및 개신교에 대한 러시아/우크라이나계의 반감까지 겹쳐 심각한 탄압을 당하고, 거의 지하로 숨거나 해외로 도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