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치아

 


1. 개요
2. 갈리치아 동부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
2.1. 주요 지역
3.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령 갈리치아)
4. 신갈리치아 (서갈리치아)

영어: Galicia[1]
우크라이나어: Галичина 할리치나
폴란드어: Galicja 갈리치아
독일어: Galizien 갈리치엔
러시아어: Галиция 갈리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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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부를 이르는 역사적 명칭. 중심도시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리비우와 폴란드의 제2도시 크라쿠프가 있다.

2. 갈리치아 동부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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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루테니아에 포함되는 이 지역은 키예프 대공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키예프 대공국이 분열될때 갈리치아 공국이 들어섰고 주변의 볼히니아 공국과 합쳐져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잠시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한다.[2] 그러나 왕위가 끊겨 볼히니아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갈리치아는 폴란드 왕국이 각기 지배하다가 두 나라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합쳐져서 같이 지배를 받았으나 1772년 폴란드 1차 분할 때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갔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브루실로프 공세의 무대였으며 이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되면서 다시 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갈리치아 동부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당시 폴란드 최대의 소수민족이었다(인구의 1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를 다시 갈라먹으면서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소련 우크라이나 SSR 치하로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갈리치아 동부 대부분 지역의 폴란드인들은[3] 새로 설정된 폴란드 영토로 추방되었다. 다만 지금도 갈리치아 동부의 서부지역은 지금도 폴란드 영토이기는 하다.
소련의 해체 후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이 지역은 소련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러시아계 국가와 가장 낯선 지역이다. 하다못해 발트 3국도 양차대전 사이 독립국이긴 했어도 그 이전에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갈리치아 지역은 그 이전까지 줄곧 중·동부유럽 가톨릭 세력의 지배만 받아오다 소련에 편입된 것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폴란드 제2공화국의 지배를 받아서 동방 가톨릭 교회(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가 많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 타지역에서 주로 정교회를 믿는 것과는 대조된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 일대를 다스렸던 시절 폴란드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이나 어느 정도 자치를 누리고, 민족주의 정당 및 단체 설립과 민족주의적 언어, 문화적 교육 같은 것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던 덕분에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 모두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며 활동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민족주의 열풍이 심한 지역으로[4] 유로마이단 때의 핵심 지지 지역이었다. 참고로 폴란드도 옛 갈리치아 동부에 속하는 동남부 지역이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2.1. 주요 지역


  • 리비우(Львів) -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 도시이다. 폴란드어로는 르부프(Lwów), 러시아어로는 리보프(Львов), 독일어로는 렘베르크(Lemberg)로 읽는다.
  • 테르노필(Тернопіль): 폴란드어로는 타르노폴(Tarnopol), 러시아어로는 테르노폴(Тернополь)이다.
  • 이바노프란키우시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원래 이름은 폴란드어인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로 17세기 폴란드의 헤트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Stanisław 'Rewera' Potocki, 혹은 그의 손자)의 이름을 따 건설되었다. 독일어로는 스타니슬라우(Stanislau). 1962년부터 우크라이나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3.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령 갈리치아)


이 지역은 소 폴란드 지역이라고도 하며[5] 폴란드에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카지미에시 1세 때 왕위 계승 분쟁으로 원래 수도였던 포즈난이 파괴되자 이곳으로 천도하였으며 1596년 폴란드 (당시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가기까지 수도권으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근동과 동유럽, 중부유럽, 서유럽의 무역로 중심에 위치하였던 갈리치아 서부는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예술, 과학 분야의 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발전된 지역이었다. 중세 시절에는 소금이 귀해서, 이 지역의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은 이 지역의 황금기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확장해 나간 폴란드 왕국은 위의 갈리치아 동부로도 확장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연합하여 동유럽의 패자가 되지만 후에 찾아온 대홍수폴란드 분할로 오스트리아로 넘어간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로서 갈리치아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그리고 크라쿠프는 예외적으로 크라쿠프 자유시라는 부분적으로 독립된 보호시로 지배받았다. [6] 오스트리아 치하의 갈리치아도 다른 유럽 열강들과 같이 1848년 혁명 이전까지는 심각하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탄압하였으나 1848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구성하면서 헝가리는 물론 보헤미아와 갈리치아도 함께 부분적인 자치를 인정받아서 폴란드를 분할한 다른 열강인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 치하의 폴란드에 비해 자유로웠고 문화적인 탄압도 적었기에 19세기 후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정부와 의회, 학교 등에서 폴란드어의 사용이 허가되었고 갈리치아 지역은 나라없는 폴란드 민족의 문화 및 예술적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1차대전 당시 폴란드의 독립에 이바지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이 지역의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렸다.
1차대전 당시 러시아가 이 지역으로 침공하기도 하였으나 갈리치아 동부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손쉽게 밀려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갈리치아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 당시 크라쿠프는 계속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바르샤바, 포츠난, 크라쿠프, 르부프, 빌노) 신생 폴란드의 문화 예술적 중심지로서 대우받았다. 하지만 2차대전 당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폴란드 총독부의 치하에 들어갔으며 폴란드 다른 지역들과 같이 홀로코스트와 폴란드인들의 강제노동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악명높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도 이 지역에 위치했었다.
전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 치하에서 폴란드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이 지역의 중심도시 크라쿠프 외곽에 들어섰고 이와 함께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공업지대와 함께 건설된 Nowa Huta라는 소련식 계획도시도 세워졌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경제력 향상과 인구 증가를 겪기도 하였다.


4. 신갈리치아 (서갈리치아)


폴란드 분할빈 회의 사이 위의 갈리치아를 제한 오스트라아령 폴란드를 일컫는다. 다만 폴란드 분할 이후 얼마 안가 이 지역은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공국으로 넘어가고 이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로 넘어가며 이 지명은 쓰이지 않게 되었기에 큰 비중은 없는 편이다. 프로이센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원래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땅이었던 곳에 남프로이센, 신동프로이센을 붙였지만 서갈리치아와 같은 이유로 얼마 안가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비슷하다.

[1] 참고로 스페인의 갈리시아와 스펠링이 같다. 그래서 '갈리시아'라고도 부른다. 키릴 문자로 표기할 때는 'ㅊ'발음이 나는 문자로 표기하기에 갈리치아라고 부른다.[2] 중세 유럽에서 왕위는 교황만이 수여 가능한 것으로서 루테니아는 가톨릭이 아닌 정교회였지만, 루테니아 왕국의 다닐로 왕이 가톨릭과 힘을 합쳐 몽골 제국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자, 당시 교황이 힘을 더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왕위를 승인해준 것.[3] 전쟁 전에는 르부프 주 인구의 57%, 타르노폴 주 인구의 50%, 스타니스와부프 주 인구의 23%를 차지했다.[4] 주로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그러나 반폴란드 감정도 만만찮은데 20세기가 되기 전만 해도 귀족, 지주폴란드인들이,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다 해먹고 이 곳의 우크라이나인(당시에는 주로 루테니아인이라고 불림)들은 피지배층이었기 때문. 나치가 갈리치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때려잡았다.[5] 대 폴란드 지역은 초기 포즈난, 그니에즈노 일대. 이 지역에서 피아스트 왕조 초대 군주 미에슈코 1세에 의해 역사에 처음으로 폴란드 국가가 들어섰다.[6] 크라쿠프 자유시도 실패한 봉기 이후 오스트리아의 일부인 크라쿠프 대공국으로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