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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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규모
3.1. 벨라루스의 유대인
3.2. 벨라루스계 미국인
3.3. 벨라루스의 무슬림
4. 문화
4.1.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4.2. 언어
5. 벨라루스인 인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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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인이란 동슬라브계 벨라루스어를 쓰는 민족을 말한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과 차이가 좁혀져서 구분하기가 힘든데, 이는 2차 대전 당시 있었던 벨라루스 초토화의 영향 탓이다. 2차 대전 이전의 벨라루스인은 러시아인과 엄연히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다.
공통성을 가지고 있던 슬라브족들이 이주이후에 분화되면서 동슬라브족, 서슬라브족, 남슬라브족으로 나뉘어진 이후, 슬라브족에서 분화된 동슬라브족은 중세를 거치며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루신인 그리고 벨라루스인으로 갈라지는데, 계기는 몽골 제국키예프 공국 침략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달아난 루스 난민 중 북쪽으로 오늘날의 모스크바 근교로 이동한 사람들은 북부 삼림지대에 핀-우골어족에 속하는 여러 황인종들과 혼혈되면서 러시아인의 기원이 되었고, 스키타이 민족과 혼혈된 상태로 키예프 공국 영토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인이 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근방에 살던 슬라브족들은 발트어를 쓰는 민족들과 혼혈되며 오늘날의 벨라루스인의 기원을 이루었다. 중세에는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을 통틀어서 루테니아인(Ruthenians)이라는 말로 칭해졌으나,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 세워진 이후로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을 서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벨라루스인들도 미녀가 많은 나라로도 유명하다.

2. 기원


키예프 공국를 구성하는 여러 공국 중 흑해와 발트해를 잇는 수운 요충지에 위치한 폴로츠크 공국이 오늘날 벨라루스 일대의 발트어족슬라브족을 아우르는 나라를 건설했다. 폴로츠크 공국이 종주국이었던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후 벨라루스 일대는 독일인들과 타타르인들에게 시달리는 암흑 시대를 겪었으나, 발트 해의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로츠크 공국과 투로프 공국을 병합하며 발트족과 슬라브족을 아우르는 국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건설한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체적인 문자 기록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루테니아인 지식인들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활약했으며, 이 덕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식 행정 언어는 중세 루테니아어 즉 벨라루스어였다.[1]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문화는 리투아니아인의 문화임과 동시에 벨라루스인의 문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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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규모


벨라루스의 인구 84%는 벨라루스인으로, 벨라루스에 거주하는 벨라루스인 인구는 7백만명 정도이다.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영토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꽤 적은데, 이는 벨라루스가 하필이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와 러시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는 바람에 계속 전쟁에 휩싸이면서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인구가 계속 감소했기 때문이다.
벨라루스 외에도 러시아 각지에 벨라루스인 52만명, 우크라이나에는 통계상으로는 27만명의 벨라루스인이 거주한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활약하던 카자크들의 상당수는 벨라루스에서 도망온 농노들이었는데, 뼈빠지게 일해서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 지주한테 수확물을 다 갖다바치는 것보다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 지대에서 자영농으로 농사짓고 사는게 훨씬 더 살기 좋았기 때문.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러시아어로는 체르니고프) 주민 상당수가 벨라루스계 조상을 두고 있다.
한때는 폴란드에도 벨라루스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2차대전 이후 스탈린이 폴란드 동부 영토 상당부분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떼어주는 과정에서 폴란드에 살던 벨라루스인 상당수가 벨라루스에 귀속되었다. 그래도 비아위스토크 같이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도시들은 벨라루스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3.1. 벨라루스의 유대인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벨라루스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른바 리투아니아 유대인이라는 뜻이 "리트박(Litvaks)" 유대인으로 분류되었으며, 폴란드의 하시딤 유대인과 대립하는 사이였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 인구 비중이 제일 높은 지역이었다. 특히 벨라루스 도회지 인구는 절반 가까이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유대인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한 때는 91만명에 달하던[2] 벨라루스 유대인은 2차 대전 직전에는 37만명 정도로 감소한다. 이민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벨라루스 유대인들은 2차 대전 동안 홀로코스트와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의 영향으로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한다. 생지옥을 뚫고 살아남은 유대인 상당수가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면서 오늘날 벨라루스에는 7만여명의 유대인 인구만 남아있다.
마르크 샤갈, 미하일 보로딘이 벨라루스 출신 유대인이었다.

3.2. 벨라루스계 미국인




3.3. 벨라루스의 무슬림




4. 문화


벨라루스/역사 항목 참조. 빌뉴스 대학과 인쇄소를 중심으로 벨라루스 르네상스가 전개되었으나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벨라루스 일대가 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되면서 벨라루스의 르네상스 문화는 한 차례 포맷당했으며, 20세기 초반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면서 벨라루스 민족 문화가 재발견되는 시점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2차 대전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으로 한 번 더 포맷당했던 역사가 있다.

4.1.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근세에서 근현대 기간 벨라루스인 절대다수가 폴란드의 압력으로 정교회에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으로 반강제로 개종당하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에서 1830-31년 폴란드 독립 봉기가 진압된 이후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신도 거의 대부분을 정교회로 재개종시켰다.
20세기 초반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이 벨라루스 르네상스는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의 역사와 겹친다며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상술한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여파로 벨라루스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갈려나가면서 실패하고, 오늘날에는 신도가 약 7천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4.2. 언어


오늘날에는 벨라루스인 상당수가 벨라루스어보다는 러시아어를 선호하며 러시아 제국과 구소련의 영향으로 벨라루스인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구사한다.

5. 벨라루스인 인물




[1] 벨라루스어의 지위는 리투아니아인과 벨라루스인 귀족들이 전부 폴란드화하는 1690년대까지 공식 행정 언어로 유지되었다.[2] 당시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17% 이상[3] 주로 바르셀로나와 밀라노, 발리와 싱가포르 등에서 활동하는 모델로 국내 수원 소재 아주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유학 왔던 적이 있다. 교환 학생 시절에 수도권 대학 유학생들 사이에서 절세 미녀로 엄청 유명했던 사람이다. 모델 업계에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문한 이유로 별로 많이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