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교

 

성명
우하교(禹夏敎)

윤흠(允欽)

노암(魯菴)
본관
단양 우씨[1]
생몰
1872년[2] 5월 1일 ~ 1941년 3월 20일
출생지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3]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3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우하교는 1872년 5월 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권동(禹權東)과 어머니 이석린(李錫麟)의 딸 인천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옥천 전씨 전성녀(全姓女)와 혼인하였다.# 어려서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자라서 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크게 분노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했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박상진·서상일·이시영(李始榮)[4]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조직하였다.
우하교는 임진왜란의병장 우배선의 후손인 대구 지역의 중산층 혁신유림으로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였으며, 사립교육기관 및 곡물상 등지에 의연금을 희사하는 등의 형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917년 군자금 모집활동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3개월 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 또한 조선국권회복단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조선국권회복단은 곽종석·장석영 등의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조국의 독립을 세계 온 나라에 호소하려는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유림들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고향 마을의 같은 문중 사람 우경동·우성동·우승기·우찬기·우하삼(禹夏三) 등 5명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제에 발각되어 1919년 5월 1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검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기소유예를 받고 곧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으며##2, 이어 1919년 6월 30일 대정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다시 대구지검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역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2
그러나 1919년 8월 윤상태가 검거되자, 우하교는 8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사건을 부인하였다가##2 그해 10월 소위 위증죄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1941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고로 『노암문집(魯菴文集)』이 있다.

[1] 판서공파 27세손 하(夏) 항렬[2] 1873년생이라고도 한다.#[3]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성동·우병기·우승기·우찬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 이시영과는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