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로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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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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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작위 수작 거부 ||}}}}}}}}}

}}}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유혁로
柳赫魯 | Ryu Hyok-ro'''
'''이름'''
유혁로 (柳赫魯 / 柳赫老)[1]
야마다 유이치 (山田唯一)
'''출생'''
1851년 (철종 6) 3월 9일
충청남도 아산
(현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사망'''
1945년 5월 15일 (향년 94세)
경성부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뇌일혈으로 인한 병사
'''직업'''
무관, 관료
'''주요 경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전라북도 도장관
충청북도 도장관
전라북도 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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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본관'''
진주 류씨 (晉州)
'''호'''
설악 (說嶽), 설강(雪岡)
설강산인 (雪岡山人)
'''국적'''
일제강점기 조선
'''종교'''
유교 (성리학)
'''소속'''
조선총독부 중추원#s-4
'''붕당'''
'''친일파''']] (1910 - 1945)}}}
'''부모'''
부 : 유상오(? - 1884?)
모 : 상씨(? - ?)
'''배우자'''
아내 : 박씨(? - ?)
'''자식 관계'''
아들 : 유기영 (柳冀暎)[4]
아들 : 유기성 (柳冀星)
아들 : 유기진 (柳冀辰)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평가
3.1. 일본의 평가
4. 둘러보기

[clearfix]
'''1916년 3월 30일'''[2]

1. 개요


조선, 대한제국의 무신이며 개화파이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설악, 본관은 진주 류씨이다.
조선 후기의 정치가로 박규수, 오경석 등의 영향을 받았고 김옥균, 서광범 등과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갑오개혁 이후 귀국해 박영효와 개혁을 주도하고 을미사변에도 참여한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거절하였지만 그 뒤로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등에서 활동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

2. 생애


1851년 3월 9일, 유상오의 아들로 조선 충청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가 되었다. 또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에 들어가 급진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1882년 어윤중,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도쿄를 갔다왔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884년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수구파, 온건 개화파 인물들을 제거한 뒤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으나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정난교, 이규완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의 암살 계획을 알아채고 그들에게 알려 암살을 열심히 막았다. 그러나 결국 김옥균홍종우에 의해 청나라로 가다가 암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여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894년 박영효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일어난 을미사변에도 참여했다. 을미사변 직후 망명하게 된다.
그는 1910년 이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사망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매일신보에서는 1940년 유혁로가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한 반명,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94세라는 고령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3. 평가



3.1. 일본의 평가


"한국의 국운이 다난(多難)한 때부터 몇 번인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면서 온갖 풍상을 고루 겪어 몸과 마음이 자연히 갈고 닦인 인물"

"인품이 온후하고 순박하며 조선인 중에서 보기 드문 인격자"

"일을 행함에 있어서 지성(至誠)으로 관철하는 신조(信條)를 가지고 있으므로 완수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

"공무(公務)를 행할 때 자신의 이해득실을 전혀 따지지 않았고, 오로지 근무에 열중"

조선총독부의 평가로, 인품이 좋고, 가식적이지 않으면서도 겸손했다고 한다. 다만,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평가이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4. 둘러보기


'''1851~1945'''
<colcolor=#fff> '''복무'''
조선 오위도총부
대한제국 육군
<colbgcolor=#2e8b57> '''기간'''
<colbgcolor=#8fbc8f> 1873년 ~ 1884년 12월 12일,
1894년 8월 ~ 1907년 9월 19일
'''임관'''
무과 급제
'''최종 계급'''
오위장
조선 조련국 교관
대한제국 육군 부령
'''최종 보직'''
?





제1대
이두황

제2대
유혁로

제3대
이진호
제3대
이진호

제4대
유혁로

제1대
이진호[3]

제1대
스즈키
다카시

제2대
유혁로

제3대
장헌식

[1]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으면 '류혁로'이다.[2] 每日申報 1916년 03월 30일자 2면, 정치면.[3] 1919년 8월부터 도지사로 개칭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