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1867)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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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훈련대 간부'''[2]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초대)

제1대
이진호

제2대
스즈키
다카시

제2대
유혁로

제3대
이진호

제4대
유혁로
제4대
유혁로

제1대
이진호[3]

제2대
이스미
나카조
[2] 대한제국으로 개칭되기 전에 없어졌기에 정확히는 대한제국군이 아니다. 후에 대한제국군 친위대로 개편되었다.[3] 1919년 8월부터 도지사로 개칭됨.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진호
李軫鎬 | Yi Chin-ho'''

'''이름'''
<colbgcolor=#FFF> 이진호 (李軫鎬)
리노이에 신코 (李家軫鎬)
'''본관'''
전의 이씨
'''호'''
성재(星齋)
'''출생'''
1867년 8월 2일 (음력)
조선 한성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1946년 9월 3일 (향년 79세)
'''직업'''
군인, 관료, 정치인
'''붕당'''
'''친일반민족행위자''']] (1905 - 1946)}}}
'''주요 경력'''
조선군 훈련대 간부
경상북도 도장관
전라북도 도장관
전라북도 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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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교육 제도가 점차 정비되고 또한 학교가 보급되며 (...) 시대 밑 민도에 적합하게 조직적으로 교육의 진보와 보급을 이룬 것은 1910년 일한병합 후의 일이다"

"1906년에 우리 조선반도는 일한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장치로 되고 여기에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등박문 공이 처음 통감의 직임에 취임하자마자 예의 조선 정치의 개혁을 꾀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력하였다."

구한말 개화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7년생. 본관은 전의이고, 호는 성재이다.

2. 생애


1867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도 배웠다.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의 신임을 받아 계속해서 승진했다.
1894년 10월 정부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앞장섰다.
1년 후 훈련대 제1연대 제2대대장을 맡다가 훈련대가 해산된 이후 친위대 제2대대장을 맡았다.
을미사변 직후 미국인 훈련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와 임최수, 이도철, 이윤용, 이완용, 윤치호, 청안군 이재순 등과 춘생문 사건을 계획했다. 그는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고 김홍집 내각의 중심 어윤중에게 계획을 밀고했다. 이때 친미 성향을 버렸다고.
하지만 아관파천이 일어나며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을 때 유길준의 반역 계획에 협력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 때 망명자 처리 문제가 논의될 때 고종이 박영효 등의 망명자 14인의 귀국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세워지자 사면을 받고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 귀국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맡았다. 계속해서 친일 세력으로 활동했다.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경상북도 장관을 지냈다.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해 여러 관직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을 저지하려 관료와 지주 등을 모아 전북자성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 뒤 그는 조선 총독부의 학무국장에 취임하는데 조선총독부의 국장 급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이다.'''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그는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는데 앞장섰다.
몇년 뒤인 1929년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양근환에 인해 암살된 민원식의 추도회를 열었고 그 후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 해달라고 했다.
나치 독일의 몰락 이후 일제는 모든 국민을 국민의용전투대로 편성했다. 이때 그도 박중양, 한창룡 등과 함께 활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신이 버리고 갈아탄 미국이 일본 제국을 쳐바르고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며 조선에 진주해 군정을 세우는 것까지 보고 간 것이다. 다만 해방 직후였던 1946년은 좌우익의 대립이 격심했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고 [1]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는 친일파로 낙인이 찍혔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8년에 이진호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3. 평가


'''"일찍부터 동양의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에 의뢰해야 함을 꿰뚫어 보아 조선의 영원한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분기한 사람."'''

「조선공로자명감」(1935)

여기서 '''그가 일제의 근대화 논리에 함몰되어 힘에 굴복함으로써 일제가 선전하는 대로 식민통치에 앞장선 전형적인 친일파'''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가 기회주의자였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임은 틀림없다.

4. 여담



5. 같이보기



[1] 알다시피 반민특위는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창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