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교

 


鄭蘭敎
일본식 성명 : 中原雄三, 中原平吉, 海平蘭敎
1864년 1월 23일 ~ 1943년 12월 28일[1]
1. 개요
2. 생애


1. 개요


조선 말기의 무신이며 개화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2], 자는 윤형(允馨), 호는 벽파(碧波).

2. 생애


정난교는 1864년 1월 23일 충청도 목천현 남면 신촌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덕리 신촌마을)에서 아버지 정광렴(鄭光濂)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병로(李炳老)의 딸 사이의 7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의 영향을 받아 개화 사상을 갖게 되어 개화파가 되었다. 또한 김옥균, 박영효, 유혁로, 서재필 등과 어울려 지냈다.
어려서 지역 유지인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하여, 당시 한성부 동부 어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에 있던 형 정윤교(鄭倫敎)[3]의 집에 머물면서 명문가 자제들과 교류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882년 3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1883년 일본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입학했으며, 같은 해 5월 서재필·서재창, 박응학(朴應學) 등 일본으로 온 유학생과 합류했다. 1884년 8월 육군 도야마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해 8월 남행부장(南行部將), 9월 좌영군사마(左營軍司馬) 등에 임명되었다.#
1884년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온건 개화파 인물들을 제거하고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다가 삼일만에 실패한 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유혁로, 이규완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개화파 인사들을 표적으로 일삼는 수구파의 암살 계획을 알아채고 개화파에게 통보하며 이일직 + 가와쿠보 쓰네요시의 박영효 암살 계획을 저지할 만큼 암살을 열심히 막았다. 그러나 결국 김옥균청나라로 가다가 홍종우(민영소의 자객)한테 암살당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이끌었으며 박영효, 이규완, 우범선 등과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박영효와 달리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은신해 있다가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또다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1907년에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관료로 활동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이후 1944년에 향년 81세로 죽을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참고로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무려 세 개나 있다!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平吉), 우미히라 난로리(海平蘭敎)이다. 그 중 나카하라 유조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망명길에 지토세마루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三郞)(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十郞)의 아들)가 지어준 이름이다. 쓰지 도쥬로는 또한 그의 동료 김옥균, 유혁로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 그리고 우미히라 난로리는 1940년에 창씨 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개명했던 이름이다.

[1] 해주 정씨 족보에는 1944년 12월 26일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다.[2] 종파 19세. 정미수의 13대손이다.[3] 족보에는 둘째 동생으로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