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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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white,#2d2f34>'''어윤중(魚允中)'''
'''본관'''
함종 어씨[1]
'''출생'''
1848년 조선 충청도 보은현 삼승면 봉비리[2]
'''사망'''
1896년 조선 경기도 용인
'''호'''
일재(一齋)
'''자'''
성집(聖執)
'''시호'''
충숙(忠肅)
'''가족관계'''
증조부 어재상
조부 어명능
친부 어약우 친모 이씨 부인
1. 개요
2. 생애
3. 이야깃거리
4. 대중매체
5. 같이 보기


1. 개요


개화기 조선정치가이자 온건 개화파. 저서로는 종정연표 등이 있다.

2. 생애


1848년 충청도 보은현 삼승면 봉비리(현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봉비리)[3]#에서 아버지 어약우(魚若愚)와 어머니 여주 이씨 이용규(李容逵)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 16세에 아버지를 여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약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별세했으나 사후 1883년 9월 어윤중의 공로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20세되던 1868년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전시를 볼 자격을 주는 칠석제(七夕製)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1869년 정시 문과에 병과[4] 17위로 급제한다.#
정7품 승정원 주서(서기)에서 시작하여 8년만에 정3품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까지 올라간 후 9개월간 전라도탐관오리를 부지런히 징벌하고 돌아와서 매우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는다.[5] 개혁의 중심 내용은 세금 개혁이었는데 후에 본인이 직접 해버린다. 고종은 이 내용을 심도깊게 보았고 어윤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채택은 안 했다.
이후 1881년 일본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간다. 담당 파트는 일본 대장성[6]. 당시 수행원으로 함께한 유길준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7]. 그 후 일본에서 청나라로 가서 미리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을 만나고 중국의 정책을 견문한 후 이홍장과 회담을 하고 왔다.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독수호통상조약 등에 합의하였고 급기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까지 조인을 하였다. 이때 이홍장이 '증서 다 만들어놨으니까 도장만 찍어'에 화가 나서 청나라에 냉담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회담 내내 청나라는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관계를 들어 각종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어윤중은 그나마 끈질기게 요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상품을 쌓아놓고 장사를 하는 곳을 양화진으로 제한하는 등의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장정도 썩 공평하지는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고 김윤식과 함께 청나라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서북 경략사로 임명되어 경제 담당답게 북방 무역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강 무역 장정, 회령 통상 장정을 협정했다. 이때 어윤중의 활동 중 중요한 것은 지역 국경 지대를 조사한 것인데 국경을 보다 확고히 하였다. 이 공로로 종2품 병조참판(국방부 차관)과 호조참판(기획재정부 차관)을 역임하게 된다.
1883년 대담한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무시당했다. 갑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온건 개화파였던 탓에 명성황후 아래서 중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1893년 보은[8]에서 농민 집회(동학농민운동의 서막이기도 했다)가 열리자 '순무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어윤중이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성격을 기술해놓은 것을 보면 당시 조선 농민들의 모든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다. 하여간에 그렇게 군중들을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어윤중은 당시 대신들 중 이례적으로 동학도들을 '민당(民黨 : 백성 모임)'으로 지칭해서[9] 많은 대신들의 빈축을 샀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탁지부 대신(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서 자신이 그렇게 건의하던 조세 개혁안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당시에 얼마나 어윤중이 긴축 정책을 강행하고 조세 개혁을 갈아엎어버렸냐면 당시 사람들이 어윤중을 '전(田)조림'이라고 불렀다. 성인 魚의 중간인 田를 따서 만든건데 이런 별명이 붙어있는걸 보면 얼마나 어윤중이 조세를 짜게 매겼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잡세, 무토 궁방세를 혁파하고 엄격한 조세 법정주의에 의거한 수금은 많은 민중들이 어윤중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춘생문 사건이 터졌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친위대장들과 주모자들을 체포한 것이 다름아닌 어윤중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사건이 터지고 김홍집, 정병하 등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성난 군중에게 구타 후 몸이 찢겨나가는 와중에 어윤중은 망명을 하지 않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한다.[10] 그 와중에 용인에서 과거 산송(묘지) 문제로 원한을 품던 향반 무리가 머슴을 동원하여 결국 49세의 나이에 살해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살당했던 장소가 어비울(魚肥里)이었다.[11] 이름이 '물고기가 살이 찌는 동네' 또는 '물고기가 슬피 운다'라고 해석된다. 어윤중의 성은 魚로 우연이라기에는 기막힌 우연.[12]

3. 이야깃거리


성격은 2번째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청난 법칙주의자인 데다 본성이 강직하고 담대하여서 조금이라도 법률에 어긋나면 고종이고 명성황후고 NO라고 말했던 양반이다. 심지어는 일본이 제안한 300만원의 차관을 "이 아니면 안 받는다."라고 말해버렸던 인물.
의외로 개화기 시절에 동분서주하며 활약했던 인물로 결국에는 자신의 소원이었던 조세 개혁도 재무부의 으뜸이 되어 성취하는 사람이었다.
교육자 겸 계몽 운동가 혹은 친일파로 평가가 엇갈리는 윤치호가 어윤중의 제자였다.
본명이 '어남선'인 배우 류수영항렬 상으로 어윤중의 조카뻘이 된다.

4. 대중매체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태조 왕건신숭겸, 제5공화국김재규 등으로 유명한 배우 김형일이 연기하였다.

5. 같이 보기




[1] 28세손 允(윤) 항렬. 생몰년대에 비해 항렬이 아주 빠르다. 생년이 10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어윤대, 어윤태와 같은 항렬이다.[2]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봉비리, 함종 어씨 집성촌이다.[3] 함종 어씨 집성촌이다.[4] 무과가 아니므로 아니라 3등급.[5] 당시의 문제를 매우 정확히 체계적으로 짚고 있다.[6] 현재의 재무성. 위에서 말한 어윤중의 개혁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7] EBS 다큐프라임 '한국인영어'편 참고.[8] 어윤중의 고향이다.[9] 모든 대신들은 동학도들을 비도(匪徒 : 도적떼)라고 탄압했다.[10] 어윤중은 민중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했는지 여자용 가마를 타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렸다.[11]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12] 맹꽁이 서당에서는 어윤중이 어비울이라는 이름을 듣고 불안해서 떠나는 중 의심을 한 마을 사람들이 때려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