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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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인 집권기 당시 병권의 상징이었다.
2. 생애
무신 집안 출생으로, 1644년 무과에 급제해 덕산현감과 선천부사를 맡았다. 1653년 6월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고, 이듬해엔 수원부사를 역임했다.
효종이 서인, 특히 산당을 제어하려고+북벌론[1] 을 실행하려 이완(李浣)과 함께 승지로 파격승진된 뒤 북벌론을 지원했다. 이후 충청병사, 삼도수군통제사, 공조참판, 어영대장, 형조참판, 한성좌윤 등을 지냈다.
2.1. 당쟁과 유혁연
남인 계열이라 송시열에게 미움을 샀고,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항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피혐한 뒤 한직 동지중추부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때 어영대장직에선 물러나지 않았다. 1669년엔 어영대장의 직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하여 도제조 잠시 보직을 옮겼다 우포도대장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그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훈련도감 소속 5,000명 군사들에게 쓰이는 운영비가 많이 들자, 그는 훈련별대를 분리시켰다. 급료병의 수는 줄어서 운영비는 덜 들고 군액은 그대로였다. 훈련별대는 금위영(禁衛營)으로 합쳐진다.
이로 인해 공조판서로 다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으나 또 문신들이 반발하여 잠시 중추부로 갔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다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 요직을 지낸 뒤 역임하고 본업인 훈련도감에 훈련대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윤휴의 북벌론에 '윤휴는 일을 맡아보지 못해서 쉽게 말을 하옵니다'라고 여타 당시 대신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보였다.
2.2. 경신환국
허적의 연회 때, 숙종은 비가 오는 것을 보곤 유악과 차일을 가져가 주라고 했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유혁연, 김만기와 신여철을 패초(부름)한다. 여기서 유혁연의 훈련대장직은 김만기에게 넘어가며 유혁연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고, 남인은 병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가 시작된다. 허견과 인평대군의 삼남인 복선군은 김석주를 제거하기 위해 체찰부를 설치하고, 심지어는 숙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복선군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후 고변자 정원로가 말하기를, 2,000명 정도의 군사들을 사적으로 훈련시켜 김석주를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유혁연에게 책임이 갔다. 유혁연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잠시 유배된다. 위리안치까지 갔고,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사사된다.
정조 때 신원된다.
3. 가족관계
- 증조부 : 유용(柳溶)[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