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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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예술인. 조선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효종의 동복 동생이며 용성대군의 동복 형이다. 특히 둘째 형인 효종과의 우애가 돈독했다.
또한 인조의 막내 남동생이자 원종(정원군)의 막내아들인 능창대군의 양자이다.[2] 그리고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대군#s-2(大君)이다.'''
2. 생애
1622년(광해군 14년) 12월 10일에 한성부 경행방 잠궁에서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가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1629년 12월 26일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고산 윤선도를 스승으로 두어 효경과 소학 등을 배웠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인조를 모시고 수행한 공로로 원종 공신 1등에 올랐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형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갔다가[3] 삼전도의 굴욕 이후, 두 형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2년 뒤인 1638년에 돌아왔고 1646년에 영국공신[4] 1등으로 책봉받았다.
동복형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事恩士)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엄연히 조선의 왕자(대군)이자 사신#s-3이었지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숙을 밥 먹듯 하며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하사(進賀士), 동지사(動指士)까지 합쳐서 총 13번을 다녀왔다.
효종 재위시절, 효종의 유일한 친동생(한배에서 나온 동복동생)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5]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이 감싸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6] 다만, 후술하겠지만 인평대군이 서인들에게 모함을 받은 일 때문인지 그의 아들들인 복평군, 복선군 등은 훗날 남인 편에 선다.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마치 자식처럼 아주 반기며 맛있는 음식도 주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
3. 사망
1658년 5월 13일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 효종은 동생의 죽음을 너무나 크게 슬퍼하여 한동안 인평대군의 집을 떠나지 않아 신하들의 반대로 마지못해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제사를 '''직접''' 돌보려 했으나 역시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신 내시를 보내 위로케 하였으며 제문을 직접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으며 후일 종묘에 있는 효종의 묘정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묘 자리는 원래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의 능 자리로 고른 곳이었다. 그러나 능 조성이 다 끝나갈 무렵, 능참봉 출신인 박자우 등이 그 자리는 '흉지'라는 상소를 올리고 찜찜해 하던 선조는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게하여 현재 건원릉 내 목릉(穆陵)에 자리를 정했다. #
경기도에서는 1992년에 그의 묘를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했다. 2016년 2월 11일 오후 2시 30분께 그의 묘가 있던 야산에 화재가 나 묘가 불타는 사고가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히 옆에 있던 인평대군 치제문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5호)로 화재가 확산하는 것은 막았다고. 당시 기사.
4. 여담
-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낙산 이화장[7] 근처에 있었다. 중종 대에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8] , 저녁볕을 잘 받는 위치에 있어서 '석양루(夕陽樓)'로도 불렸다. 후일 고종 대인 1865년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을 제작, 보관하는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뒷날 이 일대에 이화장이 들어선 이후 이승만이 이 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그 앞에 남아 있었다. 17세기에 인평대군의 집을 그린 《인평대군방전도》
- 도둑맞은 적이 있다. 이광필(李光弼)이란 사람이 그의 집에서 금병풍과 벼루집, 그리고 동물의 털로 짠 붉은색 담요 등을 훔치다 잡혔다. 왕자의 집을 도둑질했으니 당연히 중죄였다. 이에 이광필이 물귀신 작전을 써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복동생 등 여러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금방 들켰다. 그래서 이광필은 절도죄에 무고죄까지 더해져 처형당했다.[9]
- 소용 조씨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효명옹주와 껄끄러운 일화가 있다. 효명옹주는 인조의 유일한 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라 성격이 이기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려 왕실 가족이 다같이 참석했을 때, 효명옹주는 자신의 이복오빠인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오씨는 "작급으로는 내가 옹주보다 아래이나[10] 적통으로서는 내가 옹주보다 먼저이다."라고 주장했고, 효명옹주는 "부왕(인조)이 계시니 내가 먼저이다." 라고 주장했다.[11] 사실 양쪽 말 다 맞다. 인조가 살았든 죽었든 옹주의 품계는 무계이나 정1품인 부부인보다 엄연히 위다. 하지만 오씨는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 오빠이자 적통 대군인 인평대군의 부부인이자 손위 올케였다. 둘의 말이 모두 맞았기에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일이 커지자 인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 인조는 자기 딸의 편을 들어 효명옹주가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12]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효명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13] 인평대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형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의 가족들을 음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인 소용 조씨의 딸인데다, 자신의 부인을 대놓고 무시한 행적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14]
-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헨드릭 하멜 및 그 일행들과 인연이 있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해서 제주에 머물다 한양으로 압송당해 지내던 중,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을 보고 하멜의 동료 2명이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험분자로 여겨 죽이려고 했다. 심지어 이미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 역시 가망없을 거라고 했을 정도.[15] 이에 절망하던 하멜 일행은 마침 지나가던 인평대군을 보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딱하게 여긴 인평대군이 효종에게 간청해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줬다. 이 정도면 인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썼다.
- 하마터면 역모로 몰려 큰일날 뻔했다. 1656년에 당시 승지 유도삼이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의 연회에 참석해서 행패부리다가 뒤늦게 대군이 있음을 알고는 사과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하던 중에 그만 칭신, 즉 인평대군에게 신하를 칭한 일이 일어난 것. 원래 칭신은 왕에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거 까딱 잘못하면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거리다. 아니나 다를까 천안군수 서변이 이 사실을 전 군수 홍주일의 아들 홍만시에게 전해 듣고, 오정일 · 허적· 원두표 등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효종은 이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두표는 서인인데 오정일, 허적은 대표적인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 일단 고변에 연루된 자들을 근신시키고는, 서변 및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국문했다. 그 결과 서변이 뜬소문을 듣고 공을 세울 욕심에 무고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서변과 홍만시 등은 혹독한 국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배를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대사간 유철은 유도삼이 인평대군에게 신하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나 사사롭게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며 유도삼의 파면을 청했다. 그러자 효종은 하나뿐인 친동생 인평대군을 없애려는 나쁜 짓이라며 분노했고 오히려 유철이 서변을 사주했다며, 그를 국문하고 절도에 귀양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서변의 옥사 항목 참조.
- 인평대군은 생전에 왕위 계승과는 먼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조선 왕실의 직계는 전부 그의 후손이다.
5. 예술적 기질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군호도 비슷한 데다[16] 같은 적3남이었으니. 사망한 나이도 비슷하다.[17]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점도 닮았으니 바로 예술적 기질이다. 안평대군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인평대군도 그에 못지 않았다. 시와 글, 그림 모두에 실력이 있었고 제자백가[18] 에도 정통했다.
또한 북한산 조계동(漕溪洞)에 별서[19] 를 마련한 뒤 그 일대의 구천은폭(九天銀瀑) 등을 자신만의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 그 곳에서 풍류를 누리며 많은 예술 작품들을 남겼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미술 작품은 매우 드물다. 그 중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일편어주도(一片漁舟圖)》, 전 국립박물관 홍성하 소장이 소유하고 있는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정무묵 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다. 《》고백》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孟永光)의 공필법(工筆法)[20] 과 상통하는 바 크다. 맹영광은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돌아갔는데 이 기간동안 인평대군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인평대군이 그의 화법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산수》란 그림을 보면 다소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런 화풍을 절파풍(浙派風)이라 하며[21] 이로 미루어볼 때 인평대군이 당대 퍼졌던 다양한 화법을 자유자재로 작품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술 작품 이외에 글도 잘 지었다. 《송계집(松溪集)》 · 《연행록(燕行錄)》 · 《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중 2013년 5월 《송계집》의 초고본인 《송계기고(松溪紀稿)》가 발굴 공개되었다.#
그가 지은 시조 3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각각 한 수씩 전하는데 아래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조 2수를 소개한다.
바람에 휘었노라 굽은 솔 웃지 마라.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每樣)에 고왔으랴.
풍표표(風飄飄) 설분분(雪紛紛)할 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22]
[23]
《바람에 휘었노라》
또한 한시(漢詩)에도 능했다. 대표작으로는 《봉화낙선재구호》 등이 있다.[25]소원(小園) 백화총(白花蔥)에 나니는 나비들아.
향내를 좋이 여겨 가지마다 앉지 마라.
석양에 숨궂은 거미는 그물 걸고 엿는다.[24]
《소원 백화총에》
이러한 인평대군의 뛰어난 예술적인 면모는 그가 살아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약소국(조선)의 왕자로써 인질(볼모)로 끌려갔다오고 사신으로 자주 청나라에 드나들면서 그가 느꼈던 모멸감과 고통을 시서화 등 예술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一天霜雁送寒聲(일천상안송한성)
서리가 가득하여 기러기 소리 싸늘한 하늘에
河漢迢迢夜氣晶(하한초초야기정)
까마득한 은하수 아래 밤기운은 수정같다.
臥病胡床仍不寐(와병호상잉불매)
청나라에 와 병들어 누웠으니 잠 못 자는데
透簾明月照深情(투렴명월조심정)
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드는 주렴 밖 밝은 달.
《봉화낙선재구호》
6. 가족과 후손
동복 오씨 오단의 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해 슬하에 6남 4녀를 얻었다. 2남, 4남과 3녀, 4녀는 요절했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총 4남 2녀이다. 큰아들이 복녕군 이욱/유(福寧君 李栯)[A] , 3남이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그리고 5남이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이며 6남이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㮒)이다.[26] 복평군은 일찍 죽은 인조의 4남이자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출계했다.[27] 큰 딸은 향주 이금온(李金溫)으로 풍양 조씨 조기수(趙祺壽)와 혼인했고 둘째 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주로 해주 정씨 정중만(鄭重萬)과 결혼했다.
복천부부인 오씨는 인평대군과 동갑으로 임신 중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이를 못낳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군호를 받고 결혼까지 한 어엿한 성인이었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아직 어린이들이었기에 이를 딱하게 여긴 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그러면서 이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깍듯히 잘 대접하였다.[28] 숙종 시기에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일컬어 군호에 다 '복(福)'이 들어간다고 해서[29] '삼복(三福)' 이라 불렀는데[30] 이들은 이후 정계에 몰아치는 폭풍 속에 휘말린다. 자세한 것은 '''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영조 때의 명신 박문수의 두 번째 정실 부인이 인평대군의 현손녀이다.[31]
주목할 것은 '''장남 복녕군'''의 가계이다. 복녕군의 5대손 이채중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 되니 남연군이고 남연군의 막내 아들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 아들이 고종이다. 즉,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이어진다.'''[32]
한편 덕흥대원군의 후손들끼리 서로 입양하는 횟수가 잦는 등 가까이 지내자 1868년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려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은 11세손 이하로 전부 항렬자를 같게 했는데 이 때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로 통일시켰다.[33][34]
그리고 인평대군가의 8대 종손(宗孫)이 이재극인데 대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또한 용성대군의 양자가 된 6남 복평군의 9대 종손[35] 이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며 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언론인인 이해조이며 이해조의 손녀가 기독교 여성운동과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대모 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현재 한국의 맞춤양복점 중 가장 오래된 종로양복점의 창업주 이두용은 인평대군의 9대손이다. 1916년 개업 이래 대를 이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운영 중이다. 현재 사장인 이경주는 이두용의 손자이다.#
6.1. 역대 종주(宗主)
그의 종가는 고종 대에 들어서 이름을 ''''대궁(大宮)''''으로 칭했다. 아마 국왕의 본 뿌리 종가여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듯 하다.
1. 능창대군 이전(綾昌大君 李佺).
2.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 - 실질적으로는 인평대군을 기준으로 종주를 따진다.
3.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 - 인평대군파 1대 사손(능창대군파 기준 2대 사손). 사손(嗣孫)의 대수는 종주의 대수에서 '-1' 하면 된다.
4. 의원군 이혁(義原君 李爀).
5. 안흥군 이숙(安興君 李俶).
6. 이진익(李鎭翼).
7. 이병순(李秉淳).[36]
8. 이낙중(李樂重).
9. 이연응(李沇應).[37]
10. 이재극(李載克).
11. 이인용(李寅鎔).
12. 이수길(李壽吉).[38]
13. 이한주(李漢柱).
14. 이덕(李德). - 현재 봉사손.
7. 사극에서 인평대군을 연기한 배우
3번 극화되었다. 1981년 KBS 대하드라마 《대명》과 1986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남한산성》 편에서도 나왔으나 당시 역을 맡은 배우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지은성[39] - 2013년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A] A B '''栯'''은 '산앵두 '''욱'''', '나무이름 '''유''''의 두 가지 음으로 읽을 수 있다.[1] 군호는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유래했다.[2] 따라서 후술할 그의 친후손 남연군 이구와 그의 자손들 호적에 남연군이 은신군에게 입적 되기 전 뿌리가 인조의 후손이 아닌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3] 이 당시 두 형제가 겪었던 일들은 그 들을 수행한 문신 어한명이 쓴 《강도일기(江都日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4] '''寧'''國功臣, 역모 사건(이괄의 난)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5] 효종의 또다른 동복형제들인 소현세자와 용성대군은 죽었고, 숭선군과 낙선군은 이복동생들이었다. 심지어 숭선군과 낙선군의 친모는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과 결탁해 반역을 저지르려다 사사된 소용 조씨였다.[6] 예를 들면 청탁을 했다던지.[7]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마을이다.[8] 신광한은 이 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신대동' 또는 '신대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9]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2월 21일 갑오 2번째 기사 : 이광필을 무고죄로 처형하다.[10] 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다.[11] 이때 효명옹주의 나이가 11세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것을 보면 오만방자한 성격이 다 드러난다.[12] 이때 다툼의 상대가 복천대부인이 아니라 민회빈 강씨였다는 판본도 있는데, 신빙성은 매우 낮다. 대부인은 품계상 옹주보다 아래니 애매하지만, 세자빈은 어떻게 쉴드가 안 된다. 세자빈은 차기 국모로써 무품 중에서도 왕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설령 옹주가 아니라 공주고 세자보다 누나여도 손아래 올케인 세자빈에게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 효명옹주가 아무리 오만했어도 세자빈에게 덤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13] 《추안급국안(追安給菊安)》에는 79세 여자 거사 설명(雪明)의 진술에서 "조 귀인(소용 조씨가 귀인이었던 때다)이 자신에게 베개를 하나 줬는데, 보니 꽤나 좋은 베개라 이런 물건은 자신한테 필요없다고 하니, 조 귀인이 인평대군 방에서 보낸 베개라고 하면서 직접 베개를 뜯어서 검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노루의 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했다.[14]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걸려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동복 형제들간의 우애는 좋았다. 인조는 이복 형제자매들간의 사이를 염려했는지 승하하기 전에 효종에게 효명옹주와 그녀의 남동생들을 잘 보살펴주라 당부했다. 소용 조씨는 효종 즉위 직후 '효종 저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지만 효명옹주와 그녀의 동생들은 효종의 보살핌을 받아 국문도 면하게 해주고, 귀양지도 지속적으로 편한곳으로 옮겨주다가 종래에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주었다.[15] 정확히는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 것"이라 말했다. 즉,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16] 단, 인평대군의 경우 원음은 ''''린'''평대군'이다. '기린 린(麟)' 자.[17] 단, 최후는 다르다. 안평대군은 세조에게 사사당했으나 인평대군은 병으로 집에서 누워 사망했다.[18] 춘추전국시대에 각각의 사상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자 도움이 되려 했던 사상가들을 일컫는 말.[19] 別墅. 별장 비슷한 개념인데 별서는 농사도 겸할 수 있다는 게 별장과의 차이이다.[20] 남종화(수묵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북종화 계열에 속하는 화법이다. 외면적 형사에 중점을 두어 그린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을 지칭한다. 쉽게 말해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기.[21] 역시 중국의 화풍인데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화원이나 직업 화가들이 그렸지만 조선에서는 사인 화가나 신분 상관없이 쓰던 화법이었다. 조선의 풍토를 비추어 볼 때 일반 양반을 넘어 왕족인 인평대군이 절파풍의 화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컬쳐쇼크에 준하는 일이었다.[22] 평시조, 서정시, 단시조다.[23] 현대어 풀이 : 바람이 몰아치기에 할 수 없이 휘었지만, 굽은 소나무야 웃지 말아라! 봄 바람에 피어난 꽃이 언제든지 고왔을 것이랴, 모진 바람 불어치고 눈이 흩날리면 나를, 너만은 부러워 할 것이다.[24] 현대어 풀이 : 작은 동산에 핀 많은 꽃떨기에 나는 나비들아 / 향내를 좋이 여겨서 가지마다 앉지 말아라 / 해질 무렵 음흉(淫凶)한 거미는 그물을 매어놓고 엿보고 있다.’ 즉,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홀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25] '형 효종의 시에 낙선재에서 즉석에서 답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낙선재(樂善齋)는 지금 창덕궁에 있는 건물이 아닌 창덕궁 돈화문 바깥 동쪽에 있던 집으로 효종의 잠저이다.[26] 초명은 '棩' 인데 사촌 형 현종의 이름 역시 '棩' 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다.[27] ...라지만, 실은 '''고종 대에 가서야''' 용성대군의 봉사손을 정하면서 사후 입적 된 것일 뿐, 생존 당시와 사후 200여년 간은 법적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다.[28] 현종과 숙종 모두 외아들이었기에 현종에게 가장 가까운 부계친척은 사촌들이었고 숙종에게는 오촌이 가장 가까웠다.[29] 저 '복(福)'자는 인평대군 부인 복천부부인의 본관지인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유래했다. 복천부부인의 작호 역시 마찬가지이다.[30] 장남 복녕군은 이미 현종 시절인 1670년 35세로 단명했다.[31] 인평대군의 장증손(장남 복녕군의 장남 의원군의 장남) 안흥군의 딸.[32] 고종 이형은 인평대군 이요의 8대손. 단, 양자 관계로 인해 법적으로는 효종 이호가 고종 이형의 8대조이다.[33] 그 전까지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어도 선조 후손이 아닌 덕흥대원군파와, 선조, 인조의 왕자군에서 갈라진 파마다 항렬이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덕흥대원군 11세손을 기준으로 할 때, 능원대군파에서는 '세O(世)', 경창군파에서는 '신(愼)O' 등으로 썼다.[34] 인평대군파의 항렬은 인평대군의 아들 대부터 '木', '火', '土' 가 각각 외자의 부수로 쓰였고 '土' 변 항렬 이후 '진(鎭)O', '병(秉)O', 'O중(重)'으로 나갔다. 그 다음이 'O응(應)'인데 'O응(應)' 부터는 모든 덕흥대원군 후손들의 항렬이 통일된다. 이후 '재(載)O', 'O용(鎔)', '해(海)O',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 'O희(熙)' 순으로 나간다.[35] 장남 완계군 이찬의 8대손.[36] 고종의 생가 친증조부 이병원의 형이다.[37] 7대 종주 이낙중의 양자로, 이낙중의 동생 이화중의 아들.[38] 10대 종주 이인용의 양자로 이인용의 생가 10촌, 족보상 20촌 형인 의친왕 이강의 5남이다. 선대에 의친왕의 증조부 남연군이 효종 라인인 연령군 - 은신군 가계로 입양갔고 게다가 이후 아버지 고종이 익종(효명세자)의 법적양자가 되었으므로. 황실명은 이주(李鑄). 이우#s-2 황손과 친형제간이다.[39] 그로부터 불과 1년후인 2014년 tvN 드라마 삼총사(드라마)에서는 큰형 소현세자의 아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