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라시 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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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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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로 셋업맨으로[1] 주로 활동한다. 등번호는 53번.
중학교 시절까지 1루수를 뛰었다가 고등학교때 어깨에 재능을 보여서 투수로 전향, 1997년 야쿠르트에 2순위로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다만 1998년도에는 체력등을 키우느라 실전 투구를 거의 안했기 때문에 1군 등판은 1999년부터 기록이 되었다.
다만 실제적으로는 2000년을 제외하고 거의 죽쑤고 있다가, 2004년에는 야쿠르트의 마무리로 활약. 2005년부터는 좌완투수 이시이 히로토시와 보직을 맞바꾸어[2] 셋업맨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다만 2006년도에[3] 팔꿈치 인대파열로 이쪽도 그해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이 받았던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다. 그리고 2008년, 임창용이 데뷔하던 해에 화려하게 부활. 그전까지 불안했던 제구가 어느정도 되어서 예전처럼 혼자 공 잘못던져서 자멸하는 일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마츠오카 켄이치-오시모토 타케히코와 함께 임창용 앞에서 야쿠르트의 허리를 책임지는 셋업맨으로 자리잡았다.
팀내 중요한 셋업맨이라 2008 시즌부터 등장 테마를 선보였다. 2009 시즌의 등장테마는 무언가 생각나는 그것이라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하지만 2009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제3차전에서 '''야쿠르트의 추격의지를 완전히 꺾는 불쑈'''를 보여줘서 야쿠르트 팬들에게 심하게 까였다.[4]
2010 시즌이 끝나고 FA자격을 얻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도모해, 2년 300만불의 조건으로 뉴욕 메츠로 이적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계약이 종료된 2012 시즌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고 3월 말에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5월 25일에 빅리그에 승격되었지만 2경기만에 탈탈 털리고 방출당했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었다. 결국 양키스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하며 일본으로 복귀한다.
소프트뱅크에서는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를 뒷받침하는 8회 셋업맨으로 정상급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리그,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미국에서 배워온 너클커브를 새로운 주무기로 활용했다고. 다만 호크스가 오릭스 버팔로즈와 시즌 최종전까지 가서야[5] 우승이 결정된 치열한 우승 경쟁을 하던 와중인 9월 2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1이닝 4타자 밀어내기'''라는 절망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2015년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팀의 리그-일본시리즈 연패에 공헌했다. 소속팀인 소프트뱅크와 친정팀 야쿠르트가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만났는데,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3차전, 팀이 1점차로 뒤진 8회에 등판했지만 야마다 테츠토에게 일본시리즈 사상 최초인 1경기 3연타석 홈런이 된 쓰리런 홈런을 맞았고 그 이후로는 등판 기회가 없었다.
아무튼 소프트뱅크에서 1점대 ERA만 3시즌을 찍는 등 야쿠르트 시절보다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2017년까지는 리그 최고급의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2018년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고령과 고액 연봉, 대체 자원의 풍부함 등을 이유로 셋츠 타다시 등의 다른 베테랑 고액연봉자들과 함께 2018년 11월 4일 소프트뱅크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현역 속행 의지를 보였고 다행히도 2019년부터는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게 되었다. 스왈로즈 현역 선수 중 팀 최고령자이자 유일한 노무라 카츠야 감독 시절 현역 선수라는 타이틀(?)도 획득.
2019년에는 선발진이 완전히 붕괴된 야쿠르트에서 그나마 불을 꺼주는 스윙맨으로 활약하였다. 시즌 중 한때는 팀내 최다승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2020년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04년까지는 주로 최고구속 158km/h의 직구를 무기로 하여 드물게 포크볼등을 섞어서 타자를 농락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덕분에 포볼이나 데드볼같은 폭투가 많지만, 피안타는 적고 탈삼진은 많기 때문에 그럭저럭 실점은 하지 않고 넘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토미 존 수술을 받은뒤에 속구를 던질때 팔에대한 부담이 커져서, 야쿠르트 말기에는 속구보다는 포크볼의 비중이 많이 늘어났다. 이것은 이가라시 특유의 던지는 폼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가 던지는 폼은 공에 주는 회전이 빨라지긴 하지만, 팔에 걸리는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포크볼형으로 바뀐 것.
메이저리그 도전이 실패한 뒤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는 미국에서 배워온 너클커브를 새로운 무기로 활용하며 제 2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다. 야쿠르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속구와 포크볼에 일본 야구계에서는 드문 너클커브가 더해져 효과적인 투구를 할 수 있었다.
야쿠르트의 광팬인 아다치 미츠루가 크로스 게임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작중에서 츠키시마 아오바가 동경하는 '시속 160km/h짜리 공을 던질 수 있는 남자'의 모델로 등장하는데, 벽에 붙은 브로마이드에 윤곽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으나 투구폼이나 한자 모양이나 영락없는 이가라시이다. 브로마이드 속 유니폼에 떡하니 스왈로즈 53이라고 적혀있기도 하고
아내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마스코트걸을 했었으며 이때 만나서 결혼해서 슬하에 2명의 아이가 있다고 한다. SMAP의 기무라 타쿠야와 얼굴이 비슷하여 '''야구계의 기무라 타쿠야'''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등 은근히 인생의 승리자.
미국 현지에서는 '이기'(Igg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기(Iggy)"라는 애칭은 "이가-"로 시작하는 일본인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때 뉴욕 양키스의 소속이었던 이가와 케이도 덕아웃 애칭도 "이기"였다.
뉴욕 메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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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로 셋업맨으로[1] 주로 활동한다. 등번호는 53번.
2. 커리어
중학교 시절까지 1루수를 뛰었다가 고등학교때 어깨에 재능을 보여서 투수로 전향, 1997년 야쿠르트에 2순위로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다만 1998년도에는 체력등을 키우느라 실전 투구를 거의 안했기 때문에 1군 등판은 1999년부터 기록이 되었다.
다만 실제적으로는 2000년을 제외하고 거의 죽쑤고 있다가, 2004년에는 야쿠르트의 마무리로 활약. 2005년부터는 좌완투수 이시이 히로토시와 보직을 맞바꾸어[2] 셋업맨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다만 2006년도에[3] 팔꿈치 인대파열로 이쪽도 그해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이 받았던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다. 그리고 2008년, 임창용이 데뷔하던 해에 화려하게 부활. 그전까지 불안했던 제구가 어느정도 되어서 예전처럼 혼자 공 잘못던져서 자멸하는 일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마츠오카 켄이치-오시모토 타케히코와 함께 임창용 앞에서 야쿠르트의 허리를 책임지는 셋업맨으로 자리잡았다.
팀내 중요한 셋업맨이라 2008 시즌부터 등장 테마를 선보였다. 2009 시즌의 등장테마는 무언가 생각나는 그것이라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하지만 2009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제3차전에서 '''야쿠르트의 추격의지를 완전히 꺾는 불쑈'''를 보여줘서 야쿠르트 팬들에게 심하게 까였다.[4]
2010 시즌이 끝나고 FA자격을 얻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도모해, 2년 300만불의 조건으로 뉴욕 메츠로 이적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계약이 종료된 2012 시즌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고 3월 말에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5월 25일에 빅리그에 승격되었지만 2경기만에 탈탈 털리고 방출당했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었다. 결국 양키스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하며 일본으로 복귀한다.
소프트뱅크에서는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를 뒷받침하는 8회 셋업맨으로 정상급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리그,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미국에서 배워온 너클커브를 새로운 주무기로 활용했다고. 다만 호크스가 오릭스 버팔로즈와 시즌 최종전까지 가서야[5] 우승이 결정된 치열한 우승 경쟁을 하던 와중인 9월 2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1이닝 4타자 밀어내기'''라는 절망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2015년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팀의 리그-일본시리즈 연패에 공헌했다. 소속팀인 소프트뱅크와 친정팀 야쿠르트가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만났는데,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3차전, 팀이 1점차로 뒤진 8회에 등판했지만 야마다 테츠토에게 일본시리즈 사상 최초인 1경기 3연타석 홈런이 된 쓰리런 홈런을 맞았고 그 이후로는 등판 기회가 없었다.
아무튼 소프트뱅크에서 1점대 ERA만 3시즌을 찍는 등 야쿠르트 시절보다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2017년까지는 리그 최고급의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2018년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고령과 고액 연봉, 대체 자원의 풍부함 등을 이유로 셋츠 타다시 등의 다른 베테랑 고액연봉자들과 함께 2018년 11월 4일 소프트뱅크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현역 속행 의지를 보였고 다행히도 2019년부터는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게 되었다. 스왈로즈 현역 선수 중 팀 최고령자이자 유일한 노무라 카츠야 감독 시절 현역 선수라는 타이틀(?)도 획득.
2019년에는 선발진이 완전히 붕괴된 야쿠르트에서 그나마 불을 꺼주는 스윙맨으로 활약하였다. 시즌 중 한때는 팀내 최다승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2020년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2004년까지는 주로 최고구속 158km/h의 직구를 무기로 하여 드물게 포크볼등을 섞어서 타자를 농락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덕분에 포볼이나 데드볼같은 폭투가 많지만, 피안타는 적고 탈삼진은 많기 때문에 그럭저럭 실점은 하지 않고 넘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토미 존 수술을 받은뒤에 속구를 던질때 팔에대한 부담이 커져서, 야쿠르트 말기에는 속구보다는 포크볼의 비중이 많이 늘어났다. 이것은 이가라시 특유의 던지는 폼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가 던지는 폼은 공에 주는 회전이 빨라지긴 하지만, 팔에 걸리는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포크볼형으로 바뀐 것.
메이저리그 도전이 실패한 뒤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는 미국에서 배워온 너클커브를 새로운 무기로 활용하며 제 2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다. 야쿠르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속구와 포크볼에 일본 야구계에서는 드문 너클커브가 더해져 효과적인 투구를 할 수 있었다.
4. 여담
야쿠르트의 광팬인 아다치 미츠루가 크로스 게임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작중에서 츠키시마 아오바가 동경하는 '시속 160km/h짜리 공을 던질 수 있는 남자'의 모델로 등장하는데, 벽에 붙은 브로마이드에 윤곽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으나 투구폼이나 한자 모양이나 영락없는 이가라시이다. 브로마이드 속 유니폼에 떡하니 스왈로즈 53이라고 적혀있기도 하고
아내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마스코트걸을 했었으며 이때 만나서 결혼해서 슬하에 2명의 아이가 있다고 한다. SMAP의 기무라 타쿠야와 얼굴이 비슷하여 '''야구계의 기무라 타쿠야'''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등 은근히 인생의 승리자.
미국 현지에서는 '이기'(Igg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기(Iggy)"라는 애칭은 "이가-"로 시작하는 일본인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때 뉴욕 양키스의 소속이었던 이가와 케이도 덕아웃 애칭도 "이기"였다.
[1]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선발 등판 없이 구원승으로만 통산 50승을 넘겼다. 공식전 선발 등판 경험은 미-일 통산 커리어 내내 한 번도 없고 오프시즌의 멕시코 윈터리그에서 몇 차례 선발등판한 게 전부. 참고로 통산 1002경기 등판을 자랑하는 이와세 히토키(59승)는 프로 2년차이던 2000년 10월 8일 히로시마전에서 커리어 유일의 선발등판을 해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기에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2] 당시 이시이와 이가라시는 각각 일본인 좌완/우완투수 최고구속 기록 보유자라, 팬들 사이에서 '로켓 보이즈'라는 애칭이 붙었다. 하지만 이들이 차례로 부상당하며 결국 야쿠르트 마무리 쟁탈전 최후의 승자는 130km/h를 겨우 던지던 베테랑 타카츠 신고... 였다가, 이쪽도 2007년 부상당한 뒤 방출되고 결국 우리 히어로즈로 가게 된다. 그리고 불펜 보강을 위해 영입된 게 당시 한국에서는 전성기가 끝난 걸로 여겨지던 임창용이었는데...[3] 같은 해 로켓 보이즈의 일원이던 이시이 히로토시는 어깨수술을 받았고 커리어가 끝장났다. 2011년까지 은퇴경기를 빼면 1군 마운드를 한 차례도 밟지 못하고 재활만 반복하다 그대로 은퇴. WBC부터 어깨에 이상을 보이며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기에 반쯤 농담으로 큰 대회에서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고 몰락한 투수들의 하나로 같은 대회에서 박살난 돈트렐 윌리스와 함께 거론되기도.[4] 한국프로야구로 치면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불지른꼴(....)[5] 심지어 1위 호크스가 잔여경기 1경기를 남긴 상태에서 매직넘버 점등이 안 된 반면 2위 오릭스가 잔여경기 5경기를 남기고 매직넘버가 켜지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