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1. 대한민국의 상법학자 이기수
1.1. 개요
대한민국의 상법학자. 고려대학교 제17대 총장.
1.2. 생애
1945년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났다. 1965년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69년 고대법대를 졸업한 후 197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72년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로 군복무를 대체하였으며, 1974년에 다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1977년까지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77년 독일 튀빙엔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1983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84년 3월에 고려대학교 상법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상법 경제법 지재법 등을 강의하였다.
성품이 워낙 소탈하고 친화력이 대단하여,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문적인 면보다는 학교행정분야 및 대외교류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고려대학교 학생처장을 역임했고, 1995년까지는 기획처장을 역임했다. 1998년에는 법과대학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외부활동에도 열심이어서 한국상사법학회, 한국경영법률학회, 한국저작권법학회,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고대 총장 선거에 무려 세 번이나 도전했는데, 마침내 2008년 2월에 제17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취임 당시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화두로 제시하고,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글로벌 프론티어 정신을 새로운 고대인상으로 정립하면서, "영어는 기본이고, 유럽권 1개 언어, 아시아권 1개 언어 등 3개 외국어능력을 졸업 조건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재임기간 동안 5000억원을 모금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임기 중에 약학대학, 그린스쿨 전문대학원, 융합소프트웨어 전문대학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등을 신설했다. 사회봉사단을 창설하여 피지와 광양 등에서 해비타트(집 지어주기) 활동에 직접 참여해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등록금 인상, 기여입학제 허용 등을 주장하며 "우리나라 대학의 등록금은 싼 편"이라는 등 몇 차례의 망언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에게 지나치게 협조적이어서, 학생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그닥 좋지 않은 편이었다.
2011년 2월 정년퇴임하면서 고려대학교 총장직에서도 물러났다. 퇴임 후 2011년 4월 제3기 대법원 양형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외에도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한일법학회장,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3. 저서
“상법” “회사법” “어음법·수표법” “보험법·해상법” “상업법규”(共) “지적재산권법”(共) “기업법의 행방”(共) “상법학”(상·하) “경제법” “국제거래법” “기업법” “객관식 경제법”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역서로는 “독점금지법” 등이 있다.
1.4. 여담
- 고대 총장으로 재직중이던 2009년 4월 2일, 당시 고대 신입생이었던 김연아 선수가 처음으로 고대를 방문했을 때, 김연아에게로 몰려온 취재기자들 앞에서 김연아 옆에 착 달라붙어 마치 수행비서라도 되는 양 포즈를 취해 구설수에 올랐다. 관련 기사 이에 대해서는 대놓고 "총장으로서 체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비난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관련 글
- 2009년 5월 6일, 이른바 ‘김연아 마케팅 신문광고 논란’이 일자, “김연아의 우승은 고대정신을 주입시킨 결과이며, 고대가 김연아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구설수에 올랐다. “내가 직접 김 선수와 통화를 하며 앞으로 21세기를 살아갈 지도자는 민족정신과 개척정신, 승리에 대한 확신 등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대 정신을 팍팍 집어넣은 것”이라는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인데,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김연아가 올해 고대에 입학해 고대생인 것은 맞지만 입학한 지 한달도 안되는 김연아를 고대가 낳았다는 것은 무리다. ‘낯뜨거운 광고’가 아니냐” “김연아는 고대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글로벌 인재였는데 이런 홍보를 하기 위해 김연아를 데려간 것이냐” 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 교수 초년 시절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 1987년 6월에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서 이문영·이만우·윤용·김채수·김기영·배종대·김일수·송옥·김기목·김우창·정규복·김충열·조광 교수와 함께 시국선언에 서명하고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전체에서 시국선언에 서명한 교수가 겨우 18명 밖에 안 됐고, 전두환 정권기간 내내 교수가 시국선언 같은 것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권에 밉보여 해직될 위험이 대단히 컸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기수 교수의 이러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 아들 이병준 교수도 아버지와 같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89학번)이며, 튀빙엔 대학교 법학박사 출신이며, 대한민국의 법학교수이다. 이병준 교수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민법 담당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총장 재임 시절, FM을 굉장히 좋아했다 학생들 앞에서도 "FM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를 외치고 학생들의 FM 연호를 즐길 정도. 다만 학생들이 사용하는 FM 구호인 '민족고대, 정의법대'가 아닌 '세계고대, 민족법대'를 구호로 했다. 고연전 당시 '65'학번 이기수를 외치니 학생들의 반응이 꽤 좋았다.
2. 동북항일연군 독립투사 이기수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를 바탕으로 한 항일무장단체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으로 6년여간 중국인들과 함께 독립투사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의해 지린성 훈춘 지역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하얼빈에 위치한 731 부대로 넘겨져 강제로 생체실험을 당한 후 희생된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