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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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
KOREA UNIVERSITY
[image]
교훈
자유, 정의, 진리
LIBERTAS, JUSTITIA, VERITAS

상징
동물
호랑이
교목
잣나무
교화
철쭉
교색

국가
[image] 대한민국
분류
[image] 사립대학
개교
1905년 5월 5일
설립자
이용익[1]
총장
제20대 정진택[2]
재단 및 법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주소
서울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안암동5가)
재학생
학부생
20,822명(2020년)[3]
대학원생
8,544명(2020년)[4]
교직원
4,276명(2020년)
국내 분교
세종캠퍼스
대학기본역량진단
자율개선대학(2018년)
대학혁신지원사업
A등급(2020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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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문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2020)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Welcome to KU’ (2020)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교.
1905년 충숙공 이용익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근대적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광복 후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개칭하였다.
약칭은 고대(高大)이며, FM구호민족고대[5] 이다.
198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6]분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참고.

2. 역사





3. 소개



3.1. 교명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이다.
대학의 이름을 '고려(高麗)'로 정한 것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인촌 김성수의 발상이었는데, 이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만드는 대학은 반드시 우리나라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는 만큼 교명도 반드시 그러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조선」이나 「한국」[7]

은 역사상 이민족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어서 싫고, 「고려」도 실은 여진, 몽고 등의 시달림을 받은 일은 있지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여 좋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명칭인 Korea, Corea, Corée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진오, <養虎記>. 231쪽-232쪽)

한편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고려대학교'라고 적힌 문패가 없다. 그 이유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굳이 대학의 이름을 적지 않아도 누구나 이곳이 고려대학교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를 소재로 한 시(詩)도 존재한다.[8]

3.2. 학풍


[집단연구] 고려대 106년의 자화상 : 월간조선
1. 야성, 저돌성, 중후함, 수수함
고려대학교의 교풍은 야성, 저돌성, 중후함, 수수함 등으로 대표된다. 대학의 상징동물인 호랑이, 이른바 석탑(石塔)으로 일컬어지는 육중한 석조건물, 사실상 대학의 상징주로 여겨지는 막걸리 등 고대를 대표하거나 '고대' 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은 대부분 이러한 특징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2. 협동적, 끈끈함
고려대에서는 졸업생을 '동문', '동창' 등의 단어 대신 '교우'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려대를 같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라는 의미이다. 사회에서 고려대 출신 사이에는 선후배간의 유대가 매우 강한 편이다.
고대에는 자기 이익만 앞세우려 하기보다는, 타인과 소통하며 서로의 장점을 살려 일을 분담함으로써 시너지를 내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또한 일대일 간의 관계보다는 폭넓은 집단주의적 관계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9], 그렇다 보니 자신과 감정적으로 잘 안 맞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려 노력한다. 구성원들의 애교심이 워낙 커서 그런지, 정치적 이념 및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더라도 같은 고대 동문 사이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려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고려대는 동아리 조직이 발달하여, 그 구성원이 인간관계를 다지고 팀플레이를 하는 풍조가 강하다. 공부도 물론 중요시하지만, 개인의 성적만을 챙기는 능력보다는 사회 속의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능력, 남을 복종시키고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지도력, 또는 친화력 등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대인관계와 신뢰감을 중시하는 습관, 총대 메는 일을 두려워 하지 않는 기질이 이런 문화 속에서 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과거에 '고대는 집단주의, 연대는 개인주의'라는 말이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요즘은 서울 주요 명문학군 내지 명문고 출신자가 많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기질이 많이 희석되었는지 고대생들도 다른 대학에 비해선 여전히 전체주의적이나 개인주의적 면모가 매우 강해졌다고 느껴진다.
3. 개방적, 포용적
사실 고대생의 끈끈한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고려대 교수들 가운데 자교 출신 비율이 60% 정도에 불과한 것[10], 타 학부 출신 고려대 대학원생에 대한 대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대는 사실 이러한 부분에서 매우 개방적인 학교이다. [11]
더불어, 각 교수 및 학생들의 특기와 전문성 등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 조직이나 단체가 크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 모임 내부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한 시도가 고려대 특유의 상술한 분위기에 의해 힘을 받아, 지금처럼 구성원의 도전정신을 장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4. 집념
연구에 있어서는 특유의 집념과 저력으로 장기간의 꾸준한 연구를 요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는 본교 특유의 집단적 역할분담 문화가, 애매한 '멀티 플레이어' 또는 '제너럴리스트'보다는, 확고한 '스페셜리스트'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보여진다. 물론 ‘석탑’으로 대표되는 본교 동문의 '불굴의 기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고대 출신 인물들은 날렵함, 또는 눈치 싸움으로 승부하는 분야보다는 지구력이나 참을성, 우직함으로 승부를 보는 분야에서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본교가 자랑하는 법학은 장기간의 지루한 공부를 견뎌내야 하는 분야이므로, 강세를 나타내 온 것이다.
5. 저항정신
고대의 학문적 기조는, 기성 학문의 대세를 따르기보다는 독자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데이터분석을 통한 수리논증이 대세가 될 때에 그에 맞서 이론분석의 방법론을 동등하게 강조하기도 했고, 미국/일본 유학파가 주류를 이룰 때에는 그에 맞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더불어 미국이나 일본에서 새로운 사조가 들어와서 우리 학계 전체를 휩쓸 경우에도 거기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전통적, 기본적,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일제 시절에는 일본문화가 워낙 주류를 차지하다보니 학문에 있어서도 민족주의적 경향이 매우 강했다. 사학과의 경우, 제국대학시절 영향으로 실증사관 중심의 논증을 중시하는 서울대의 가장 대척점에 서는 대학이 고려대이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일공동역사연구회의 주축은 고려대 출신과 고려대 교수들인 조광 김현구 조법종 등 이었고, 식민사관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비판하는 이희진 교수 또한 고려대 사학과 출신이다. 임나일본부설에 가장 실랄히 비판을 가하는 학자중 한명인 이재석 교수 또한 고대 학부 출신이다. 한편 민족주의의 병폐가 오히려 두드러진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차차 희석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사이비 까지는 아니지만 이희진 교수나 최재석 교수 같은 경우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비판 받아왔다. 일례로 해방 이후 한글전용운동이 큰 흐름을 타자, 고대는 이에 반대했다.[12] 그리고 대한민국 교육이 한문을 점점 소홀히 하기 시작할 때 고대는 오히려 학생들의 한문 실력을 대단히 중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 교내 졸업요건에 한자 급수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어 오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때 본교의 학풍이 '보수적'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이는 오히려 새로운 대세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당당하고 굳건한 기질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현재 고려대의 학풍은 자유로우며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스탠스에 한국 특유의 정(情)이 합쳐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실제 대학 생활에서는 여전히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많다. 실제로 동문 모임이나 학교 생활 대부분에서 '고대인다운 모습'이 강요된다. 더하여 학생들에 비해 학교를 구성하는 교직원, 또는 운영주체의 스탠스가 상당히 보수적인 면이 있으며, 이것의 예로 모바일 학생증 및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의 제작 규제를 들 수 있다.

4. 재단




5. 상징




6. 학생운동




7. 교우회




8. 학사제도




9. 강의




10. 학부




11. 대학원




12. 총학생회




13. 동아리




14. 시설




14.1. 식당 및 매점




15. 고려대학교의료원




16. 캠퍼스의 교통





17. 각종 행사




18. 사건사고




19. 노동조합 현황



20. 출신 인물




21. 관련 문서



[1]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자세한 생애는 문서 참조.[2]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본교 기계공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공과대학장, 공학대학원장, 기계공학부 학부장, 교수학습개발원장, 대외협력처장 등을 역임하였다.[3] 휴학생 6,961명 미포함[4] 휴학생 980명 미포함[5] 1970 민주화 운동 당시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본교 총학생회가 모여 처음으로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또한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하는 마음으로' 총학생회의 이름 앞에 자주, 민주, 민족, 해방 즉 자주-민주 민족해방 별명을 붙이게 된 것이였고, 각각 자주관악, 민주연세, 민족고대, 해방이화이었다.[6]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7] 여기서의 '한국'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문맥상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8] 이 시를 읽으며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정문에도 문패가 없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으나, 관악캠퍼스로 통합 이전하기 전 서울대학교 대학본부가 위치해 있던 동숭동 캠퍼스의 문리과대학 정문, 법과대학 정문 등에는 원래 문패가 있었다. 옛 동숭동 캠퍼스 자리 맞은편의 연건캠퍼스를 꾸준히 지키고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문의 경우 정문 자체의 원형을 현재도 잘 간직하고 있다.[9] 흔히 고대는 인성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분위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인성이란 일대일로 짝짓는 관계에서의 배려심이라기보다 전체주의적 사회성이나 수직적이고 복종적인 리더십-팔로워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10] 고려대학교의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교수들 가운데 다수의 교수들, 예를 들어 김병로, 현상윤, 안호상, 오천석, 유진오, 손진태, 이상은, 김상협, 김준엽, 현승종, 윤천주, 김충렬, 김우창, 문국진, 이필상, 김화영 등이 타교 출신이다.[11] 타 학부 출신 편입생이나 대학원생이라 하더라도 뭔가 능력을 갖고 있다 하면 주류로 편입시켜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외대에서 고법으로 편입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12] 연세대에서 외솔 최현배 교수가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주도하였을 때, 고려대에서 중국철학 및 유학사를 가르쳤던 경락 이상은 교수가 그에 대해 반대한 얘기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