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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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병주(李炳注)

나림(那林)
본관
합천 이씨
출생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1]#
사망
1992년 4월 3일
첫 작품
내일 없는 그날 (1957~1958)
마지막 작품
별이 차가운 밤이면 (1989~1992)
1. 개요
2. 상세
3. 주요 작품
3.1. 장편소설
3.2. 단편소설
4. 표절 시비


1. 개요


대한민국소설가이자 언론인.
1965년 잡지 '세대'에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특유의 필력과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현대사를 대하 장편으로 엮어낸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등을 집필하여 기록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을 받았으며 동시에 대중문학에서 큰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상세


이병주는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2]
1927년 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후 양보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다. 1936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40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메이지대학에 신설된 전문부 문과에 별과생으로 재학했다. 1943년 9월 메이지대학 졸업 후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간부후보생으로 장교까지 해먹었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했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퇴했다고 밝혔으나 1943년 9월에 졸업하고 바로 징병되어간 이병주에겐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즉, '''학력위조'''.[3]
8.15 광복 직후 귀향하였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진주농림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6년 후 경남대학교[4]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재직 기간동안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부산일보에서 연재했다.
또한 부산에서 국제신문[5]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과 관련된 필화사건으로 인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5년 7월, 감옥에서 구상했던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등단했으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시인 신동집(申瞳集)과 문학평론가 이광훈(李光勳)의 권유로 출간된 것이며, 탈전통적이고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의 소설에는 그가 경험했던 시대에 대한 의식, 남성적인 필체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설들을 출간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과 같은 소설들을 집필했으며, '마술사', '예낭풍물지', '바람과 구름과 비', '행복어사전' 등을 발표했다. 마흔네 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등단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천여 매를 써내면서 8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출간했다. 마지막에는 건강이 나빠지자 구술을 했다고 한다. 1976년 장편 '낙엽'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1977년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창작문학상을,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92년 4월 3일 향년 7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전두환과 인연이 있었으며, 그가 만년에 쓴 수필집에서는 전두환은 옹호하고 있지만 박정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냐는 논리인데 정작 자신이 간부후보생 출신임은 감추고 학병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 고생만 한 것처럼 위조했다.

3. 주요 작품



3.1. 장편소설


  • 관부연락선 (1968~1970)
  • 배신의 강 (1969)
  • 망향 (1970)
  • 여인의 백야 (1970)
  • 언제나 그 은하를 (1971)
  • 지리산 (1972~1977)
  • 낙엽 (1974~1975)
  • 서울 버마재비 (1975~1976)
  • 산하 (1974~1979)
  • 소설 일본제국 (1978)
  • 행복어사전 (1976~1982)
  • 황백의 문 (1979~1982)
  • 바람과 구름과 비 (1977~1980)
  • 유성의 부 (1981~1982)
  • 미완의 극 (1981~1982)
  • 강변이야기 (1982)
  • 무지개 연구 (1982~1983)
  • 비창 (1983)
  • 황혼 (1984)
  • 그해 5월 (1982~1988)
  • 소설 남로당 (1984~1987)
  • 니르바나의 꽃 (1985~1987)
  • 그들의 향연 (1986~1987)
  • 그를 버린 여인 (1988~1990)
  • 별이 차가운 밤이면 (1989~1992)

3.2. 단편소설



4. 표절 시비


이병주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지리산》이 작가 이태(이우태)의 《남부군》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물론 전권에 걸쳐서 일어난 문제는 아니고 후반부[6]에 일어난 문제.
본격적인 표절 시비는 이태의 《남부군》이 출간된 이후 붙었다. 이태는 이병주가 집필한 《지리산》을 읽어본 후 표절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병주는 정당한 인용이라고 주장했다. 이태가 문제 삼은 것은 인용의 정도였는데, 이병주가 인용 허락을 받을 당시 이태는 단순한 참고 수준이라고 생각했었다.
작가 이태에 따르면 표절 경황은 이러하다. 작가 이태는 《남부군》을 주간지에 연재하려 했으나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원고는 주간지에 의해 이병주의 손에 넘어갔으며, 수많은 반환 요구가 있었으나 묵살당했다. 1년 뒤가 되어서야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원저자 이태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원고가 복사되어 표절되었다는 것.[7] 이 주장을 들은 이병주도 곧바로 응수했는데, 원고에 관심을 가졌던 이병주는 이태가 살고 있던 봉천동에 찾아가 인용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기에 인용에 관한 정보가 언급되었다는 것.
당시 이병주는 작가로서 하면 안될 일을 했다며 대중이나 문학계의 많은 질타를 받았다. 이 하나의 사건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대중문학계를 주름잡았던 거인 이병주가 몰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재까지 이병주와 《지리산》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 중 하나.

[1] 독립유공자 문공학도 이 마을 출신이다.[2] 그래서 그의 출생지인 231번지에는 현재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근처에는 이명산이 있으며, 또한 섬진강가에도 그를 기념하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3] 김윤식, 2015, 황용주의 학병세대 이병주≠황용주[4] 당시에는 해인대학교였다. 해인대학교는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대학교.[5] 창간될 당시에는 산업신문이었고, 이병주가 활동할 당시에는 국제신보였다.[6] 총 7권 중 약 2권. 당시 출간되었던 소설과 현재 한길사에서 나온 개정판도 총 7권.[7] 이 원고의 복사본은 《태백산맥》을 집필 중이던 작가 조정래의 손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군》이 출간되면서 인용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