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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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노조 홈페이지
1. 개요
2. 기업정신
2.1. 복간 이전
2.2. 복간 이후
3. 사가
4. 역사
4.1. 창간과 1950년대의 전성기
4.2. 고난과 부흥기
4.3. 언론통폐합에서 부활까지
4.4. 복간 이후
5. 특징
6. 역대 임원
6.1. 명예회장
6.2. 대표이사 회장
6.3. 이사회 의장
6.4. 대표이사 사장
6.5. 부사장
7. 역대 주요 간부
7.1. 논설고문
7.2. 주필
7.3. 논설주간
7.4. 논설위원장
7.5. 논설위원실장
7.6. 수석논설위원
7.7. 편집국장
8. 기타
9. 정기간행물
10. 주요 행사


1. 개요


1947년 9월 1일에 창간된 부산광역시동남권 지역의 대표적인 지역 언론사이다. 대주주는 능인선원.
본사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중앙대로 1217 (거제동) 국제신문빌딩 4~7층에 있다. 한국ABC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동향신문 부산일보대구광역시매일신문에 이어 대한민국의 지방 일간지 중에서 발행 부수가 세 번째로 많다. 한동안 부산일보와 달리 토요일에도 신문을 발행하였으나 2019년부터 토요일에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전두환에게 한번 망했던 신문사지만, 같은 사유로 망한 동향기업 국제그룹과는 무관하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이다.

2. 기업정신



2.1. 복간 이전


  • 사시

'''불편부당, 시시비비'''

  • 취재지침

'''국위선양, 언론창달, 문화향상, 경제부흥'''


2.2. 복간 이후


  • 공정한 보도로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한다.
  • 다양한 정보제공으로 삶의 질을 높인다.
  • 창조적 발상을 존중하고 지역발전에 앞장선다.

3. 사가


작사는 양희주, 작곡은 이상근이 맡았다.
(1절)보라 여기 늘푸른 금정산 / 더불어 우뚝한 국제
온갖 시련 이겨낸 오늘 / 그 전통 더욱 새롭구나
(2절)보라 저기 드넓은 태평양 / 더불어 나가는 국제
오늘은 더욱 알차고 새롭게 / 그 모습 더욱 당당하구나
(후렴)도도한 정론의 기상 / 뉘 감히 맞서랴
민주자유의 파수꾼 / 우리의 국제 국제신문

4. 역사



4.1. 창간과 1950년대의 전성기


1946년 대구 10월 사건 특종보도 필화로 민주중보를 떠난 김형두 기자가 종전의 <수산신문>과 <동아산업시보>를 통합시켜 1947년 9월 1일에 <산업신문>이라는 타블로이드판 2면짜리 경제전문지로 창간하였다. 초기 본사는 동광동 2가 261번지에 소재했다.
1947년 12월 30일에는 조선견직 사주인 김지태를 사주로 맞아들여 주식회사로 탈바꿈한 뒤 이듬해 1월에는 부산지역 일간지 중에선 처음으로 갱지를 사용하고 타블로이드판에서 대형판으로 바꾸어 변화를 꾀했으나, 경영이 어려워져 1949년 3월 1일에 지역 사업가 이연재에게 경영권이 인수되어 회복세에 들어서 7월 2일에는 제1회 전국고교야구대회[1]를 주최하는 등 사세확장에 주력하며 당대 부경지역 대표 일간지인 <민주중보>, <부산일보> 등과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1950년에 터진 6.25 전쟁은 뜻하지 않게 본사의 급속한 확장/발전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유는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중앙 신문사들이 부산으로 피난오면서 부산이 언론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8월 19일부터 <국제신보>로 제호를 바꾸어 종합 일간지로 바꾸었고, 1952년에는 사옥을 중구 남포동 2가 28번지로 옮겼다.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1950년대 초반의 국제신보는 상당한 상승세를 자랑했는데, 본사는 현민 유진오, 최호진, 조동필, 주요한, 송지영, 김영진, 박상익, 이건호 등 쟁쟁한 필진들을 논설위원으로 흡수하여 <민주신보>, <동아일보>, <한국매일신문>, <경향신문> 등과 국내 5대 일간지로 자리잡았고, 1953년에는 2.15 긴급통화개혁 소식을 신속하고 상세하게 보도해 연 1주간 가판 10만 부를 돌파하여 신기록을 세웠다.
거기에 본사는 영국제 헬슈라이버 자동수신기, 미제 델리타이프 수신기 등을 완비해 기술향상을 꾀하는 한편, 한국 신문사상 최초로 1951년 7월에 미국의 NANA사, 대만 중앙통신, 9월에 미국 AFP, 이듬해엔 영국 로이터와 뉴스 독점공급 계약을 각각 맺어 외신부문에서도 강세를 보였고, 9월 6일에는 서면에 분공장도 세웠다.
1953년 4월에는 (주)세계통신사[2]를 세우고 10월에는 서울 조선일보 사옥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서울지방 판권을 따내려 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로 허가를 받지 못했다.
1957년에 본사는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회장직에 이연재, 사장직에 김형두를 앉힌 뒤, 이듬해 9월 25일부터 지방지 최초로 조석간제를 단행해 1959 신년호부터 조석간 8면을 내기 시작했고, 2월 4일에는 부산 본사와 서울지사 간 무선송수신시설을 확장 완비하는 한편, 7월 8일부터 사옥을 영도구 대교동 2가 69번지로 옮겼다.

4.2. 고난과 부흥기


그러나 1959년부터 본사는 우울한 시대를 맞이했다. 그해 7월 17일에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본사가 야심차게 주최한 '시민 위안의 밤' 행사 도중 폭우가 몰아닥쳐 우왕좌왕하던 시민 67명이 압사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고, 설상가상으로 9월 17일에 불어닥친 태풍 '사라'로 인해 신문용지 창고가 물에 잠기는 불운을 겪었다. 1960년 3.15 마산항쟁 때 타 신문사보다 먼저 나서서 취재하던 특파기자 3명이 경찰에 붙잡혀 감금당하기도 했다.
4.19 혁명이 끝난 이듬해인 1961년 4월 25일에는 자금난으로 용지를 못 구해 사흘씩 신문 발행이 중단되고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하는 등의 어려움을 맞다가 <한국일보> 사장 백상 장기영의 지원과 독자들의 의연금으로 계속해서 신문을 속간했다.
1961년 5.16 쿠데타 후 이병주 주필이 필화사건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964년 5월 11일부터는 럭키그룹에 인수되면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대대적인 확장을 시도했다. 그해 11월에 먼저 대교동 사옥을 증설하고 이듬해 1월 25일에 미국 AP 및 동화통신과 특약을 맺는 동시에 전송사진수신기를 설치했고, 4월에는 미국 스틴손제 L-5 E형 경비행기를 들여와 명칭을 '비둘기'로 명명했고, 11월 29일에는 일본 지지통신과 국내 최초로 독점 특약을 맺으며 팩시밀리 수신기를 설치하였다.
1966년 3월 30일에는 일본 하마다제 다색도초고속윤전기를 설치하고 4월에는 사진제판시설도 보완하는 등 신문 쇄신을 위한 시설보완에 힘을 기울였고, 1967년 5월 10일에는 이흥배가 사장직에 취임하여 8월 31일부터 20년간 사용해 온 구 자모를 버리고 새 서체로 바꾸었으며, 1968년 6월 1일에는 UMSI VI형 초고속도윤전기를 증설하는 한편 미국 파이퍼 체로키식스 300형 7인승 비행기를 들여와 명칭을 '비둘기 2호'로 명명했다. 1973년 10월 11일에는 C-2조형 자동연판주조기 및 사상기를 도입/설치하였다. 1979년 9월 1일에는 같은 럭키 계열사인 부산문화TV와 함께 중앙동 신사옥으로 이전하였다.

4.3. 언론통폐합에서 부활까지


1980년 5월 계엄상황 속에서도 편집국 기자들은 총회에서 편집권에 대한 사내외의 부당한 간섭 배제와 급여 인상 등 9개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6일부터 4일간 철야 농성과 신문 제작 2시간 지연 투쟁을 벌여 편집권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해 5.18 민주화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국보위가 집권한 뒤 사측은 권력에 굴복해 7~8월 사이 언론인 자율정화에 따라 양심적 기자 35명을 해고시켰다.
그러나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은 본사의 종말을 재촉하게 되었는데,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국제신문은 부산일보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는데, 럭키그룹 소유로 경영도 안정되었고 발행 부수도 22만부로 20만부인 부산일보를 앞섰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5.16장학회 소유로 친정부 논조를 취한 부산일보에 비해 언론으로서의 신뢰도 더 높았다.
그러나 보안사 측 보고서는 국제신문을 '비판적 성향', 부산일보는 '자발적 협조' 성향으로 분류했고, 결국 국제신문은 "대정부 비판으로 시류에 영합하고 시시비비를 주장하면서 편파성을 노정했다"고 하면서 소유주인 럭키를 겨냥해 '럭키그룹 부정 은폐에 선봉적 역할을 한' 신문으로 보고되어 통폐합 대상사로 선정되었다. 반면 부산일보가 살아남은 데는 소유주인 5.16장학회에 대한 배려도 작용됐을 수도 있었는데, 이미 5.16장학회가 소유한 MBC 주식 중 민간주식 65%가 KBS로 넘어갔고, 부산MBC 지분 중 51%가 MBC 본사로 넘어간 관계로 자산 태반을 잃은 장학회를 배려해 부일을 살려둔 것이었다.
반면 국제신문 측은 객관적 조건에서 불리할 게 없다고 자신했지만, 11월 12일에 정순민 사장 등 경영진 3명이 보안사로 불려가 2시간을 버티다 수사관의 강압으로 결국 양도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게 되었다. 이에 본사 기자 50여명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별다른 대응책을 내지 못하고 당월 25일에 부일과 합병되는 형식으로 창간 33년, 지령 10,992호로 폐간되었고, 1983년 6월 29일부로 법인 자체가 청산되었다.
합병 이후 부산일보로 편입된 국제 출신 사원들은 여느 통폐합 대상 언론사 출신이 그렇듯 진급과 급료에서 안 좋은 대우를 받다가, 1986년부터 본사 해직기자들과 부일로 이직된 일부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복간운동이 벌어져, 1987년 4월에는 '국제상조회'를 결성해 복간에 필요한 자본주의 물색 및 법적 절차 등을 추진하였다.
그해 6.29 선언 뒤 언론기본법 폐지로 1도 1지 제도가 사라지면서 그해 12월 하순에 럭키금성이 본지 복간의 의지를 밝혀 이듬해 3월 중순에 법인 등기까지 마쳤으나 시간만 질질 끌었는데, 1988년 5월부터 럭금의 중앙지 인수설이 유포되면서 다시 상조회 중심의 복간운동이 재개되었고, 6월 2일에는 최식림을 중심으로 한 본사 해직사원 10명이 '복간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이틀 뒤에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7월 4일에는 복준위는 '복간추진위원회'로 개편하고 범일동에 사옥을 마련했다. 8월 19일에 럭금과의 끈질긴 협상으로 법인을 인수하여 소식지를 내는 등 복간을 위한 밑밥을 깔았고, 같은 시기에는 문공부에 복간 신청을 내 10월 12일에 등록필증을 교부받았다. 복추위 측은 대기업의 언론 소유가 편집권의 독립성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토착 중견기업인 태광, 부광, 삼도물산 등을 주주로 참여시킨 뒤, 폐간 8주년을 맞이해 ‘국제부활식’을 열었다. 이후 1989년 2월 1일에 마침내 복간되어 결실을 맺었다.


4.4. 복간 이후


복간 이듬해인 1990년 2월 1일에는 국내 지방지 사상 최초로 중국 <흑룡강신문>과 협력했고, 5월 22일부터 롯데그룹에 인수되었다. 1991년에는 기획시리즈 '한려수도를 지키자'를 연재하며 당국의 한려수도 토석채취 허가와 희귀식물 남획 등 무분별한 개발에 제동을 걸었다.
1994년 8월 14일에는 복간 이후 부흥의 열망을 다졌던 범일동 시대를 마감하고 거제동 신사옥으로 이전한 뒤 12월 27일부터 전면 CTS 제작방식으로 바꾸었고, 1996년 7월 1일에 가로쓰기로 바꾸어 11월부터는 인터넷 신문서비스를 실시했다. 1997년 5월 1일에는 부산일보보다 먼저 조간으로 전환하고 같은 해에 국내 신문사 최초로 '해양수산부(현 해양수산팀)'를 신설하였다.
1999년에 9월 1일부터 롯데로부터 독립하여 독자경영체제로 전환하였다. 2004년 3월 31일에는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청, 역사회 등 학계 대표들과 함께 '부산과학기술한림원'을 설립하였다. 2006년에는 능인선원장 지광 스님이 회장직에 취임하여 대주주 지위는 능인선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5. 특징


부산일보와는 선의의 경쟁관계이며, 1980년 폐간 때까진 야당색이 짙었으나 1990년 롯데그룹 인수 이후 논조는 대체로 부산일보보다 보수색이 강해졌다.
환경과 해양수산 보도 쪽에서 강세를 보이는 신문인데, 1991년 '한려수도를 지키자', 1994년 '산업폐기물 대란 이대로 안된다', 1998년 '생태계 보고, 늪을 살리자' 등의 기획시리즈를 마련해 당국의 무분별한 자연개발과 환경정책 부재를 호되게 비판했으며, 1997년에 국내 언론사 최초로 설치된 해양수산팀은 1999년 한일어업협상 쌍끌이 제외 사실을 특종 보도한 바 있었다.

6. 역대 임원



6.1. 명예회장


  • 송석구 (2008~2011)

6.2. 대표이사 회장


  • 이연재 (1957~?)
  • 구인회 (1964~1969)
  • 구자경 (1970~1982[3])
  • 지광(이정섭) (2006~ )

6.3. 이사회 의장


  • 하종배 (1976~1978)

6.4. 대표이사 사장


  • 김지태 (1947~1949)
  • 이연재 (1949~1957)
  • 김형두 (1957~1962)
  • 오종식 (1962~1964)
  • 서정귀 (1964~1967)
  • 이흥배 (1967~1970)
  • 하종배 (1970~1976)
  • 구자학[4] (1976~1980)
  • 정순민 (1980~1982)
  • 최식림 (1988~1990)
  • 이광우 (1990~1991)
  • 남정식 (1991~1996)
  • 남상조 (1996~1999)
  • 이종덕 (1999~2006)
  • 김광삼 (2006)
  • 송석구 (2006~2008)
  • 권명보 (2008~2012)
  • 차승민 (2012~2017)
  • 송문석 (2017~2018)
  • 박무성 (2018~ )

6.5. 부사장


  • 박순조 (1947~?)

7. 역대 주요 간부



7.1. 논설고문


  • 김규태 (1995~1998)
  • 이철호 (1997~1999)
  • 최화수 (2005~2007)
  • 장병윤 (2012~2014)
  • 박희봉 (2015~2017)

7.2. 주필


  • 김형두 (1952~1957)
  • 김한성 (1957~1958)
  • 황용주 (1958)
  • 이병주 (1959~1961)
  • 이광우 (1978~1980)
  • 변노섭 (1988~1990)

7.3. 논설주간


  • 이백우 (1978~1980)
  • 김규태 (1990~1995)
  • 전상수 (1995~2000)
  • 배승원 (2000~2002)
  • 최화수 (2002~2005)
  • 김주남 (2007~2008)
  • 박희봉 (2014~2015)
  • 송문석 (2016~2017)
  • 박무성 (2018)

7.4. 논설위원장


  • 이광우 (1974~1975)

7.5. 논설위원실장


  • 전상수 (1994~1995)
  • 강종원 (1995)
  • 배승원 (1995~2000)
  • 장병호 (2005~2006)
  • 김주남 (2006~2007)
  • 장병윤 (2008~2012)
  • 박희봉 (2012~2014)
  • 송문석 (2015~2016)
  • 장재건 (2017~ )

7.6. 수석논설위원


  • 이백우 (1970~1978)
  • 전상수 (1992~1994)
  • 최화수 (2000~2002)
  • 김미선 (2007~2008)
  • 장병윤 (2008)
  • 박희봉 (2008~2011)
  • 김찬석[5] (2015~2016)

7.7. 편집국장


  • 김형두 (1947~1950)
  • 이석우 (1950~1951)
  • 장수봉 (1951~1953/1953~1954)
  • 정윤조 (1953)
  • 김한성 (1954~1957)
  • 이석우 (1957~1959)
  • 이병주 (1959~1961)
  • 하종배 (1961~1964/1966)
  • 이광우 (1964~1966/1968~1974/1975~1977)
  • 김창식 (1966~1967)
  • 조창수 (1967~1968)
  • 이형기 (1974~1975/1978~1980)
  • 이철호 (1980/1990~1991)
  • 이상윤 (1980)
  • 최식림 (1980)
  • 천기일 (1988~1989)
  • 오병규 (1989~1990)
  • 강종원 (1991~1993)
  • 배승원 (1993~1994)
  • 설정수 (1994~1995)
  • 진강수 (1995~1997)
  • 황동규 (1997~2000)
  • 박두기 (2000~2001)
  • 정원영 (2001~2002/2005)
  • 권명보 (2002~2004)
  • 김철하 (2004~2005)
  • 윤종섭 (2005~2007)
  • 박성권 (2007~2008)
  • 이처문 (2008~2011)
  • 성현철 (2011~2012)
  • 송문석 (2012~2013)
  • 고기화 (2013~2015)
  • 박무성 (2015~2017)
  • 배재한 (2017~2018)
  • 강춘진 (2018~ )

8. 기타


국제신문사는 2001년조갑제[6]의 추천을 받아 당대 지한파였던 구로다 가쓰히로를 논설위원으로 영입한 적이 있다. 구로다는 그 해 3월 칼럼에서 "영도다리6.25 전쟁의 상징이지 일제강점기 착취의 상징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논란이 있었으며 민언련과 새천년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국제신문은 구로다를 퇴출시키고 산케이 신문은 서울지국을 폐쇄하라"라는 성명을 냈다.
여담으로, 이 신문사 사옥 1층 로비는 24층 뷔페 고객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반인의 출입이 아주 자유롭다. 본사 바로 앞에 있는 교대역이 구조적인 문제로 화장실 찾아가기가 매우 까다로운데, 그때 본사 사옥에 있는 화장실을 많이 사용하는 편.

9. 정기간행물


  • 주간국제 (1978.5.19. ~ 1980.7.)
  • 국제연감 (1975~1980/1992~1997)

10. 주요 행사


  •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949~1980[7])
  • 부산마라톤대회
  • 한낮의 U; 콘서트
  • 국제어린이백일장
  • 국제신문 골프대회

[1] 1974년부터 '화랑대기'로 명명.[2] 이후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7년에 경영난으로 이철원 전 공보처장에게 매각되었고, 같은 시기 이기붕이 실질 소유주로 참여하면서 관제통신사로 변모했다가 1960년 5월 23일 자진해산됨.[3] 등기상 재임기간.[4] 이후 (주)럭키, 금성사 대표 역임. 현 아워홈 회장.[5] 퇴사 후 2017년도 부산광역시 사회복지직 9급에 합격했다. 이와 관련하여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76화에 출연.[6] 1971년부터 1980년까지 기자 생활을 했다.항목 참고.[7] 언론통폐합 이후 부산일보가 주최권 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