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지왕

 


[image]
이사지왕의 검
'''왕호'''
이사지왕(尒斯智王)
'''성씨'''
김(金)?
''''''
이사(尒斯)?
'''생몰년도'''
? ~ ?
1. 개요
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


1. 개요


태조 성한왕처럼 한국의 사서에선 등장하지 않고 금석문인 금관총(이사지왕릉)의 유물에서 이름이 발견된 신라.
유물 자체는 1921년 일제강점기 발굴 때 출토됐으나 시대가 시대인데다 당시 일제도 철저히 준비하고 발굴한 게 아니라 우연히 시작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현대에 재발굴이 진행되었고, 이 재발굴에서 92년만인 2013년에야 이전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사지왕이라는 인명을 발견했다. 금관총의 주인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금관총의 유물이 5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걸로 보아 5세기 후반에 활동한 왕족으로 보여진다.

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


결론부터 말하지면 '''알 수 없다'''. 무덤의 양식을 볼 때 이사지왕이란 인물이 활동했던 무렵의 왕이면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금관총 조성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볼 경우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 시기에 활동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사지왕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국왕이라면 이 왕들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이 이사지왕이라는 말인데, 자비 마립간이나 소지 마립간이라고 하기에는 음의 연관성도 미약하다. 묘지문이 나오지 않는 이상 금관총=이사지왕의 무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2015년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도'라고 새겨진 칼집 부속구가 추가로 확인되고,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관련 명문 환두대도 3점의 실존이 모두 확인됨에 따라 일단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사람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비록 이사지왕이 "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조성)에서 '차칠왕'이라는 표기나 그 외 여러 갈문왕에서 왕의 용례가 사용된 것을 보면 왕호 자체는 일찍 받아들였으나 확정된 것이 지증왕 무렵이었다. 따라서 고위 귀족인 이사지왕이 '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당시 신라 왕으로 비정되지 않고 있다.
한편 이사지왕과 관련된 연구가 거듭될수록 노태돈이 주장했던 "고대국가 초기부터 일정 시기까지 신라의 왕들은 6부의 대표자였지 통치자가 아니었다."라는 가설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한편, 이사지왕(尒斯智王)의 이사(尒斯)가 이사금(泥斯今)의 이사(泥斯)와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이사지왕은 특정 인명이 아닌 '''단순한 왕으로서의 호칭'''이 된다. 尒와 泥는 중고한어에서 발음이 각각 [nie]와 [nei]로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