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마립간

 


'''시호'''
'''자비 마립간(慈悲 麻立干)'''
'''성씨'''
김(金)
''''''
자비(慈悲)
'''왕후'''
왕후 김씨[1], 왕후 김씨[2]
'''왕자'''
김소지(金炤知)
'''부왕'''
눌지 마립간
'''모후'''
차로부인 김씨
'''생몰년도'''
음력
425년(?) ~ 479년 2월 3일
'''재위기간'''
음력
458년 ~ 479년 2월 3일 (21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5. 기타
6.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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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0대 국왕. 칭호는 마립간. 이름은 김자비.

2. 생애


눌지 마립간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실성 마립간의 딸 차로부인이다. 자비(사랑하고 불쌍히 여김)와 한자까지 같아서 눌지 마립간이 노렸거나 고구려의 유리명왕과 같이 실제 이름은 한자가 달랐는데 발음이 비슷하고 뜻이 좋은 글자를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본래 신라는 지속적으로 사위가 자주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왔고 이 때문에 왕위 계승이 복잡하게 꼬이고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지만 자비 마립간부터는 눌지 마립간에 의해 확립된 부자 상속제에 따라 큰 다툼없이 즉위하였다. 461년 2월에는 왕비 김씨와 혼인했는데 이 때 왕비 김씨는 자신의 삼촌인 미사흔의 딸로 추정되며 자신의 사촌과 혼인한 것이 된다. 또 다른 기록의 파호 갈문왕의 딸과 혼인했는데 파호 갈문왕은 대체적으로 복호로 여겨지며 복호 역시 자비 마립간의 삼촌이다. 여러모로 내물 마립간계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요소로 서로 간의 혼인을 통한 결합을 맺은 것으로 예상된다.
눌지 마립간 시대에 고구려에 대한 적대 노선을 명확히 정했기에 자비 마립간의 재위기에는 유독 고구려와 왜의 침략이 잦았다. 즉위 2년차인 459년 4월에 왜가 1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이끌고 신라의 동쪽 변경을 습격했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동해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탓에 금방 경주 월성이 포위당했다. 이후 왕성을 굳게 지키며 병력을 내보내 싸우게 하자 왜가 북쪽 바다로 도망갔는데 자비 마립간은 이를 추격했고 이때 왜인들 중 물에 빠져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고 한다.
462년 5월 왜군이 활개성을 침입하여 신라군이 패배해 1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463년 2월에 왜가 남쪽 삽량성(歃良城,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으로 침입했지만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두 장군에게 군사를 주고 복병을 숨겨두어 기습 공격을 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두 장군은 473년 각각 좌장군우장군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격이 와서 변경 두 곳에 성을 쌓았고 463년 7월에는 군사를 순시했다고 한다. 467년에는 전함의 수리를 명령해 전통적으로 신라의 약점이었던 수군을 보강했다. 신라인은 왜군에 비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언급이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데 당장 자비 마립간 재위기에도 왜구가 여러 번 침략했을 정도이니 신라에 수군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468년 고구려의 장수왕말갈 1만 병사와 함께 신라 북쪽 변경의 실직성(오늘날 강원도 삼척시)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루트는 동해안 가를 따라 남진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는 경로다. 장수왕의 신라 공격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서 찾을 수 있는 사건에서 기인한걸로 보인다. 일본서기 464년 기록에 의하면 '신라왕이 집안의 수탉을 잡아죽이게 했다'는 이상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때 신라왕은 자비 마립간이다. 일국의 왕이 닭 1마리 잡은게 기록될리는 만무하고 이는 암호로 봐야하는데 고구려인들이 쓰고 다니던 절풍모자를 수탉의 볏으로 보아[3] 소지 마립간이 경주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습격해 섬멸한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자비 마립간은 처음부터 반고구려 노선을 정하고 고구려 주둔군을 몰살시키는 것으로 고구려의 예속을 끊는다는 선언을 분명히 하였으며 장수왕은 이에 대한 보복에 차후 백제 공세 때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언제든지 서라벌을 노릴 수 있는 실직성을 빼앗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때 백제의 개로왕은 신라의 지원군을 빌릴 수 있다는 상황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469년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광개토대왕 이후 처음으로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건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대규모 백제 침입 때 백제 태자 문주가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에 왔고 나제동맹에 따라 백제의 개로왕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신라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한성은 함락당하고 개로왕은 전장 한복판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비 마립간은 전성기를 맞은 강대한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아직 약한 신라가 할 수 있는 건 축성만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이 때부터 성을 쌓는 기록이 대폭 늘어나기 때문. 훗날 고구려도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에 철벽 수비로 대항했듯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 국력차를 상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수성전이었다. 국경 최전방이었던 죽령, 조령, 동해안 경로를 중심으로 지금의 충청도경상도 각지에 여러 산성을 쌓았으며 고구려 기병의 성을 건너뛰는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지 자비 마립간 본인도 475년 서라벌 인근 명활산의 명활성궁전을 옮겨 살았다고 한다. 474년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전해졌을테고 고구려 앞에 신라도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 전국에 성들을 만들면서 이를 바탕으로 변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하였고 수도권지방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방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에 의해 서라벌의 인구가 늘어나 469년 수도의 행정 구역을 조정하기도 했다.
476년 6월과 477년 5월에도 또 왜의 침략이 있었으나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인지 삼국사기의 기록의 절반이 축성 관련 이야기다. 지금도 크고 아름다운 자태가 남아있는 삼년산성이 축성된 것도 이 왕의 재위기. 물론 이 시기는 백제 정도만 나제동맹 덕분에 사이가 좋았지 북동남 3방향으로 고구려와 왜의 침공에 계속 시달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책이었지만 자비 마립간 치세에 쌓인 성들은 뒷날 신라가 진흥왕 때 영토를 확장할 때나 삼국통일전쟁 때 백제에게 공격당할 때에도 큰 역할을 한다. 자비 마립간 최고의 작품으로 이 방어 라인은 소지 마립간, 지증왕 등의 개축과 보완을 거쳐 난공불락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다만 이렇게 대백제 전선에 축성했던 성들이 약 450년 후에 후백제에게 넘어가 거꾸로 신라를 겨누는 가장 무서운 칼이 되고 말았던 건 웃지 못할 일.[4][5]
  • 463년 2월 변경 두곳에 성을 쌓았다.
  • 468년 9월 하슬라에 거주중인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해 니하에 성을 쌓았다.
  • 470년 삼년산성을 쌓았다.
  • 471년 2월 모로성을 쌓았다.
  • 473년 7월 명활성을 보수했다.
  • 474년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을 쌓았다.
즉위 12년(469년)에는 서라벌을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坊里名)을 확정해 서라벌을 기존의 부족 연합적 성격에서 행정적 성격으로 바꾸었다.

3. 기타


  • 신라 역대 임금 중에서도 주목받는 편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신라 초기의 숨겨진 명군. 축성으로 나라 방비를 튼튼히 했고 왜의 침략도 격퇴했으며 행정적 업적을 남기는 등 전임 군주인 눌지 마립간, 후임 군주인 소지 마립간과 함께 6세기 신라의 국력 신장 토대를 닦은 임금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고대 전쟁사의 저자인 임용한 교수도 자비 마립간을 높이 평가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자비 마립간 본기'''
一年秋八月 자비 마립간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二年夏四月 왜인이 쳐들오자 이를 물리치다
四年春二月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다
四年夏四月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다
五年夏五月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다
六年春二月 왜인을 벌지와 덕지가 매복하여 물리치다
六年秋七月 군대를 사열하다
八年夏四月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지다
八年夏五月 사벌군에 누리의 피해가 나다
十年 전함을 수리하도록 하다
十年秋九月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가다
十一年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성을 습격하다
十一年秋九月 하슬라 사람을 징발해 이하에 성을 쌓다
十二年春一月 서울의 방·리 이름을 정하다
十二年夏四月 나라 서쪽에 큰 물난리가 났다
十二年秋七月 물난리를 당한 주·군을 다니며 위로하다
十三年 삼년산성을 쌓다
十四年春二月 모로성을 쌓다
十四年春三月 서울에 땅이 갈라지고 탁한 물이 솟아오르다
十四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十六年春一月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다
十六年秋七月 명활성을 수리하다
十七年 일모·사시·광석·답달·구례·좌라 등의 성을 쌓다
十七年秋七月 고구려 왕 거련이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왕을 죽이다
十八年春一月 왕이 명활성으로 옮겨 거주하다
十九年夏六月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장군 덕지가 이를 물리치다
二十年夏五月 왜인이 침입해 왔다가 돌아가다
二十一年春二月 밤에 붉은 빛이 하늘까지 뻗치다
二十一年冬十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春二月三日 왕이 죽다

5. 기타


삼국사기에선 왕비의 아버지가 미사흔으로 나오나, 삼국유사에선 다르다. 자비 마립간의 왕비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선 파호 갈문왕, 자비 마립간의 아들인 비처 마립간(소지 마립간)의 어머니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선 미흔(未欣) 각간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미사흔과 동일인물이라는 가설과 김복호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이 존재한다. 자세한 건 미사흔 참고.
즉위 10년의 전함 수리 기사는 삼국사기 내에서도 몇 안 되는 수군에 관한 기록이다. 신라 역시 왜구들 때문에 수군에 신경을 쏟은 건 분명한데, 왜와의 전투 과정에서 수군이 활약하는 장면을 찾긴 어렵다. 수군이 존재했다면 이들이 왜군의 공격을 막아주거나, 혹은 수적으로 중과부적이라 초기 방어에 실패하더라도 퇴각하는 적들을 공격하는 식의 기록이 존재할 텐데 찾기 어렵다. 신라는 왜군에 비해 바다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수전은 피해야 한다는 등 상대에는 수군이 빈약함을 말하는 기록이 많다. 신라 수군이 제대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건 삼국통일전쟁 시기 즈음으로, 이때부터는 당나라 수군을 상대로도 선전이 가능할 만큼 발전하게 된다.

6. 대중 매체


'''본격 축성 매니아.'''

[1] 김복호의 딸.[2] 미사흔의 딸. 소지 마립간의 어머니.[3] 고구려인들은 양쪽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4] 근데 그마저도 결코 후백제가 군사력으로 함락했던 게 아니었다. 견훤이 이 어려운 방어막을 어떻게 해서 수중에 넣었는지는 불분명한 상황이라 김헌창처럼 설득, 회유, 협박을 통해 판도에 편입했을 개연성만 있을 뿐. 고려왕건 또한 후백제와의 쟁패 과정에서 자비 마립간~지증왕이 축성했던 방어 라인만은 자력으로 뚫어내지 못했다.[5] 물론 4세기 반에 가까운 먼 미래 일까지 그의 실책이라고 볼 순 없고, 오히려 후백제가 통일신라의 군사적 자산을 태봉이나 다름아닌 후삼국 시대 신라보다도 더욱 많이 계승하게 되면서 벌어진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