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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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1대 임금. 칭호는 마립간. 자비 마립간의 아들[6] 로 다른 한자 표기로 비처(毗處) 마립간으로도 불린다. 炤가 '밝다'라는 뜻이므로 '비처'라는 이름은 고유어 '빛'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炤 자체가 음차로 많이 쓰이던 한자[7] 이고 知가 고유어 존칭어미의 음차이기 때문에 "빛"과 연관이 없는 이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려서부터 겸손한데다 어질어 백성들이 잘 따른 덕왕이었다고 한다. 미사흔의 외손자며 박제상의 외외증손이기도 하다.
왕비는 삼국사기에서는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 삼국유사에서는 기보(期寶) 갈문왕의 딸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삼국사기 내용 기준으로 설명한다.[8] 참고로 내숙은 거칠부의 할아버지인 잉숙(仍宿)과 동일인으로 여겨진다.[9] 그러니까 거칠부는 선혜부인의 조카인 것.
후궁으로 날이군 사람 파로(波路)의 딸인 벽화(碧花)가 있다. 벽화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1명 있었다고 하지만 태어났다면 유복자였을 확률이 높은 아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2. 생애
자비 마립간이 축성에 신경을 많이 썼다면 소지 마립간은 신라의 군주 중 교통 확충에 관심이 많았던 왕으로 즉위 9년(487년) 각 지방에 현대의 우체국과 비슷한 시설인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 기간도로인 관도(官道)를 개척한다.[10] 490년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각 지방을 순행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역의 주민들을 찾아가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편 유랑하는 백성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남진 정책을 꾸준하게 고수했던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잦은 공격에 대항하여 나제동맹에 따라 가야, 백제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으며 493년 백제 동성왕의 결혼 동맹을 받아들여 동생인 이찬 비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를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11] 이후에도 자주 고구려와 교전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삼년산성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자비 마립간에 비하면 축성을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추풍령로를 거의 함락이 불가능한 요새로 완성하고 추풍령로 외곽 방위선이 뚫려도 다음을 방어할 종심 방어선을 선산-상주 일대에 구축한 것은 소지 마립간이었다.
지난번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죽이고 위례성을 무너뜨린 고구려 장수왕은 이번에는 신라를 끝장내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격하는데 480년 11월 말갈이 한 번 북쪽에 쳐들어왔으며 방어선이 어느 정도인지 찔러보기였던 듯하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호명(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등 7개 성을 공격해 빼앗아버리고 미질부(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로 진격한다. 지도를 보면 영덕, 포항과 수도 경주시는 바로 옆이라서 신라 최대의 비상 사태였다. 신라는 급히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백제 동성왕은 개로왕 때 신라가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줬던 걸 고마워해서인지 빨리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가야가 뒤이어 합류해 세 나라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군을 방어했고 고구려군이 이기지 못해 퇴각하자 쫓아가 강원도 강릉 부근에서 승리하는데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1천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신라 수도 기습은 실패했지만 장수왕은 남진을 멈추지 않았다. 즉위 6년(484년)에는 방향을 바꿔 조령을 넘어 문경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백제군의 지원을 받아 격퇴한다. 소지 마립간은 고구려를 쫓아낸 후 방어선을 보강해 구벌성(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에 새로 성을 쌓고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3천명을 시켜 증축했다. 이제 고구려의 공격도 몇 번 막아내고 소지 마립간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487년 7월 경주 월성을 수리하고 488년 1월 원래 궁전이었던 경주 월성으로 환도했다. 고구려군의 위협이 한창 있던 자비 마립간 때 경주 동쪽의 명활산성으로 궁전을 옮긴 상태였는데 12년만에 산 아래의 원래 궁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489년 9월 고구려가 신라 북쪽을 공격해 호산성을 빼앗는다. 491년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이끌던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지만 뒤를 이은 문자명왕도 남진을 계속해 494년 신라를 공격했는데 백제 동성왕이 지원군을 보내 같이 싸워 막았다. 495년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공격했는데 소지 마립간은 장군 덕지를 지원군으로 보내 같이 막았다. 매년 연례 행사처럼 일어나는 고구려의 공격을 나제동맹이 잘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제동맹이 다소 흔들리는 듯한 사건이 일어난다. 백제와 당시 가야의 맹주 반파국(대가야)은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난 때 맞붙는 등 사이가 안 좋았는데 496년 2월 가야가 희귀한 흰 꿩을 가야에서 신라에 선물로 보낸다. 직후 496년 7월과 497년 8월에 고구려가 신라에 쳐들어왔는데 백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소지 마립간이 죽은 뒤의 이야기지만 501년에는 백제가 신라 국경선인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는 기록이 나오며 이후 진흥왕 이전까지는 서로 지원군을 보내는 것이 없어진다. 물론 나제동맹이 완전히 깨지는 정설은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이고 이전에는 백제와 신라가 특별히 싸운다는 기록도 없지만 소지 마립간 재위 후반기가 되면 나제동맹의 끈끈함은 전보다는 확실히 약해지는 듯한게 사실이다.[12] 어차피 백제와 신라 사이는 옛날부터 안 좋았으니 장수왕이라는 공공의 강적이 없어지고는 멀어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동해 바다 건너 일본의 침략도 482년, 486년, 497년, 500년 4번이나 있었는데 경주까지 전선의 확대없이 소탕에 성공했다. 신라 상대에는 왜군의 침략 기사가 많이 등장했고 경주 월성이 포위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소지 마립간 시기 이후로는 왜군에 패하는 기록이 거의 사라지게 되는데 동쪽 해안의 방비를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 시기에 줄곧 강화하여 더 이상 왜군의 침략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듯 활발한 전투 기록이 남아있던 소지 마립간은 500년에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 고대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직전에 벽화부인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면 그의 건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은 64세로 당시로는 상당히 연로한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래서 예상해볼 수 있는 점은 아래의 일화들과 같은 소지 마립간 재위 말년의 여러 기행들이 당시 왕실 내부의 여러 불만을 야기시켰고 복호계의 수장으로 왕비족의 일원이 되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지대로가 결국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나 복호계의 경우 지속적으로 미사흔계에게 왕비 자리를 내주는 상황으로 보이는 편이라 이런 점도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벽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지만 당시 왕비족의 일원이었던 미사흔계나 복호계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왕비족에서 모두 거부하고 복호계의 지증왕이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아들과 관련하여 이사부라는 설이 있는데 해당 항목을 직접 참고하길 바란다. 지증왕 같은 경우에는 박씨인 연제부인을 왕비로 두었는데 이는 박씨 집안 역시 지증왕 즉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법흥왕의 경우 지증왕의 장남이 되기 어려운 나이임에도 장남으로 기록되고 이후 왕위 계승까지 간다는 점은 결국 지증왕과 박씨 집안이 손을 잡고 소지 마립간을 축출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겠다.
3. 일화
특이하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두 가지의 일화를 남겼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오기일(烏忌日)'과 관련된 '사금갑 설화'이고 또 하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처녀 벽화와의 이야기다.
3.1. 오기일(정월 대보름)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에 나오는 이야기로 무진년(488년)에 마립간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놀란 마립간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오늘날 경주 서출지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자 마립간은 처음에 "둘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지 않나?"라고 했는데 이때 일관(점쟁이)이 "두 사람은 일반 백성이지만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마립간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써 있었다.'''"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마립간이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자 그 속에서는 내전의 분향을 수도하는 승려[13] 와 왕비[14] 가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가 숨어 있었다.[15] 그래서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16]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첫 날),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다. 이것으르 속어로는 달도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오기일은 바로 오늘날의 '''정월 대보름'''이다. 사실 대보름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천 년 이상을, 어찌보면 설날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있어 성대하게 놀면서 치르는 큰 명절이었는데, 현대에 들어 대보름이 공휴일에서도 제외되고[17] 의미가 약해지면서 소지 마립간의 오기일 설화도 약간 묻힌 감이 있다.'''"射琴匣(사금갑)"'''(거문고 갑을 쏴라)
또 노인이 나와 글을 바쳤다는 그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게 했다고 하는데 서출지 연못은 지금도 있는데 경주 시가지 남동쪽에 있고 통일전 바로 옆이다. 호수에는 조선 시대에 지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현대에는 경주의 야경 명소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종전에는 불교 세력과 토착 종교 세력의 갈등으로 풀이했지만 이러한 연구는 문제가 있었다. 우선 토착 종교 세력으로 간주되는 '노인'에게선 전혀 반임금, 반왕실 그리고 반불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사실. 중과 비빈이 간통한 것과 소지 마립간이 죽을 것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당시 신라의 주적이었던 고구려 장수왕 측의 간첩을 통한 소지 마립간 암살 시도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소지 마립간은 재위 내내 밝혀진 아들이라곤 벽화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 뿐이었고 게다가 저 사금갑 사건 때는 아들이 없었다. 10대 후반에 즉위했는데 30대 중반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었다는 건,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던 소지 마립간의 6촌형 김지들, 즉 훗날의 지증왕 집안에게 왕좌를 향한 모종의 희망을 주는 큰 정치적 불안요소였다.[18] 이런 상황에서 틈을 엿보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앞서 개로왕에게 써먹어서 성공했던 수법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동원하였다. 즉 백제에 도림을 보내서 백제를 흔들었듯 첩자 승려를 보내서, 그때까지 아들을 낳지 못해 폐출 위기에 몰려 있던 선혜부인에게 접근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이런 흉계를 소지 마립간의 친불교 정책에 반감이 있었던 전통 종교 세력이 포착했고, 소지 마립간은 위기를 벗어났지만 대가가 있었다. 이 당시에 포교를 위해 오던 신라 내 승려들은 대부분 고구려에서 오는 승려들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신라는 법흥왕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완전 반불 국가가 되고만다. 이후 간첩이 아닌, 포교를 위해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흥분한 신라 군인들에게 맞아죽는 일이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 나중에 불교를 공인하지만 그것도 고구려와는 관련없는 경로로 받아들였다.
3.2. 소지 마립간과 처녀 벽화
이는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서기 500년)에 나오는 이야기. 이 해 9월 소지 마립간은 날이군(지금의 영주시)에 행차했는데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라는 사람이 소지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한 것을 알고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들것에다 태우고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를 덮어 씌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줄 알고 열어보니 어린 여자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리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지간히 미인이었는지 왕은 궁궐에 돌아와서도 벽화를 잊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벽화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자 그리움을 못 이겨 수행원 몇 사람만을 데리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몇 차례에 걸쳐 벽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고타군(지금의 안동시)을 지날 즈음 해가 기울어 어느 할머니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서 할머니에게 나라 사람들이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지를 묻자 할머니는 "모든 백성이 성군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며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이라고 충고하였다.
왕은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부끄럽게 여겼으나 벽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조를 보면 벽화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 해 11월에 소지 마립간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9월에 만났는데 11월에 죽었다면 소지 마립간은 벽화와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게 된다. 이 당시의 소지 마립간은 나이가 대강 30대 후반으로 한창 활동할 나이였지만, 이 당시는 다들 평균 수명이 짧았고 소지 마립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즉위했기에 재위기가 이미 20년은 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고령으로 죽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
벽화의 출신지는 일명 '''고구려 고지'''라는 별명으로 그 당대부터 자주 불렸던 영주-봉화 지역인데, 이 지역은 명목상으론 신라 영토였어도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를 50년 이상 받아왔던 지역이기에 다른 신라 지역으로부터 상당히 그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 호족들은 신라 왕실에게 적극적으로 충성을 바치면서도 지위 상승의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고, 그 맥락에서 딸을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아래 지역 안동 지역을 위시한 신라 중앙 왕실에선 충성심이 의심되는 지역 호족 딸을 별실에 데려와 후궁으로 삼는 소지 마립간의 행태에 크게 의심을 품었고, 이것이 소지 마립간의 실각 원인으로 추측된다.[19]
한편 영주 지방에 전해지는 설화에서는 엔딩이 다르다. 이 설화에 따르면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스토리가 갈라진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데려오지만 이 설화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결국 벽화와의 만남을 그만둔다. 벽화는 계속 왕을 기다렸지만 왕은 끝내 오지 않았고 벽화는 크게 상심해서 왕을 원망하다가 영주 중심부에 위치한 구성산성 건너편에 있는 서구대(西龜臺)위에 무신탑을 세우고 연모의 정을 삭이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유복자를 낳은 벽화가 자애롭고 인내심도 강했던 지증왕에 의해 목숨만은 부지했을 개연성은 높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 말엽까지 존재했던 모양으로 공민왕 때 지영주사로 부임한 정습인이라는 사람이 이 탑을 헐어서 관청을 수리하는 데 써버리자 신돈의 미움을 받아 하옥되었으나 다른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후 그 탑을 다시 쌓도록 했다고 하는데 무신탑은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름이 재수없다는 이유로(無信 ) 헐어버렸다고...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본기'''
一年春二月 소지 마립간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작을 올려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서울에 가뭄이 들다
二年冬十月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다
二年冬十一月 말갈이 북쪽 변경에 침입하다
三年春二月 비열성에 행차해서 군사들을 위로하다
三年春三月 고구려와 말갈이 쳐들어왔으나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이를 격퇴하다
四年春二月 큰 바람이 불고 금성 남문에 불이 나다
四年夏四月 비가 오랫동안 내리다
四年夏五月 왜인이 변경에 침입하다
五年夏四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五年秋七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五年冬十月 왕이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다
五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다
六年春一月 오함을 이벌찬으로 삼다
六年春三月 토성이 달을 침범하다
六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하자 백제와 함께 물리치다
七年春二月 구벌성을 쌓다
七年夏四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수묘 20가를 추가로 설치하다
七年夏五月 백제가 와서 예방하다
八年春一月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삼년과 굴산 두 성을 고쳐 쌓다
八年春二月 내숙을 이벌찬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다
八年秋八月 낭산 남쪽에서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다
九年春三月 사방에 우편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다
九年秋七月 월성을 수리하다
九年冬十月 천둥이 치다
十年春一月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다
十年春二月 일선군에 행차하여 환·과·고·독을 위로하다
十年春三月 주·군의 옥에 갇힌 죄수를 사면하다
十年夏六月 눈이 여섯 개인 거북을 바치다
十年秋七月 도나성을 쌓다
十一年春一月 놀고먹는 백성들을 농사일로 돌아가도록 하다
十一年秋九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과현에 이르르다
十一年冬十月 고구려가 호산성을 함락하다
十二年春二月 비라성을 다시 쌓다
十二年春三月 용이 추라정에 나타고고 서울에 시장을 열다
十四年 봄과 여름에 가물고 왕이 반찬 가짓 수를 줄이다
十五年春三月 백제 왕 모대가 혼인하기를 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다
十五年秋七月 임해와 장령진을 설치하여 왜적에 대비하다
十六年夏四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六年秋七月 고구려군에 포위당한 실죽을 백제 왕 모대가 구해 주다
十七年春一月 왕이 신궁에 제사지내다
十七年秋八月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다
十八年春二月 가야국에서 흰 꿩을 보내다
十八年春三月 궁실을 거듭 수리하다
十八年夏五月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치다
十八年秋七月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자 장군 실죽이 이를 물리치다
十八年秋八月 남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보다
十九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다
十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의 피해가 발생하다
十九年秋八月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二年春三月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二年夏四月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황색 안개가 끼다
二十二年秋九月 왕이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二十二年冬十一月 왕이 죽다
기록이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 제3권은 내물 이사금부터 시작하여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다.
5. 창작물
- 전우치(영화)에서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장면이 중요한 부분으로 나온다.
- 소지 마립간이 대하드라마에서 등장한 적은 없었지만 2017년 3월 13일부터 방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황금기사의 성' 1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본 다큐멘터리에서 소지 마립간은 부왕인 자비 마립간 시절 고구려의 남진을 피해 명활산성으로 옮겨갔고 즉위 후 다시 월성으로 복귀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월성을 비롯한 경주 일대를 계획도시로 건설한 것으로 그려지는데 우역과 관도를 설치한 등의 업적을 고려하여 경주를 건설한 왕으로 등장하는 듯.
[1] 충주 고구려비에 등장하는 마립간. 해당 비문에 나온 간지를 환산하면 약 480~481년경 비문이 세워진 것으로 보이고 이 시기의 신라 마립간은 소지이다.[2] 삼국유사 기준. 김복호의 아들인 김습보의 딸.[3] 삼국사기 기준. 미사흔의 아들인 김내숙의 딸.[4] 소지 마립간의 어머니인 미사흔의 딸이 461년에 자비 마립간의 왕비가 되었으므로 소지 마립간은 461년 이전 생일 수가 없다.[5] 소지 마립간의 6촌형인 지증왕은 437년생이지만 4~6촌간에 이 정도 나이차는 얼마든지 가능하다.[6] 삼국사기에서는 1남, 삼국유사에서는 3남으로 나오는데 역사학계에서는 1남을 정설로 여긴다. 자비 마립간 왕비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가설이 있다.[7] 그중에서도 여성인명에 접사급으로 많이 붙던 조이를 이 글자로 많이 표기했다.[8] 일단 역사학계에서는 기보 갈문왕과 선혜부인의 아버지 내숙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낮게 본다. 따라서 내숙의 딸 선혜부인과 기보 갈문왕의 딸을 선후해서 왕비로 맞은 것으로 보는 편. 기보 갈문왕은 습보 갈문왕과는 동일 인물로 여겨지는게 보통이다(자세한건 지증왕 참고.).[9] 仍(잉)과 乃(내)의 자형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10] 신라 시대의 도로는 경주와 대구에서 폭 9m의 대로 유적이 발굴되어 그 존재가 입증됐다.[11] 즉 동성왕은 자비 마립간의 손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12] 삼국시대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없던 사건이 많이 기록된 일본서기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6세기에 가야를 사이에 두고 백제와 신라가 마치 훗날의 냉전처럼 외교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 때쯤 가면 나제동맹은 '위에 고구려 있으니 서로 직접 싸우지는 말자' 정도.[13] 소지 마립간 때는 아직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시점이지만, 공인 이전에도 불교는 이미 신라에서 포교가 진행되고 스며들고 있었다. 법흥왕의 공인은 불교를 나라의 국교로 지정하는 것이었다.[14] 삼국유사에서는 애매하게 궁주라고 칭해지고 이를 후궁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절요에서는 확실하게 왕비라고 나온다. 삼국유사는 김소지의 왕비를 김습보의 딸로, 삼국사절요는 김소지의 왕비를 김내숙의 딸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사강목에서는 왕후 선혜부인(善兮夫人)이라고 직접 서술하였다. 김소지 사후 왕위를 김내숙의 아들 김물력이 아니라 김습보의 아들 김지대로가 계승하는 것이 이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15] 일본 정창원에는 현존하는 신라금 유물이 있는데 케이스인 금갑의 길이가 무려 187cm나 되므로 충분히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16] 왕을 살해하려는 자객 둘이 거문고갑 안에 숨어있었는데 그 화살에 맞아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7] 북한에서는 지금도 대보름이 공휴일이다.[18] 결국 소지 마립간의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만다.[19]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은 훨씬 훗날 후백제가 신라를 겁박할 때 아주 일찍부터 고려에게 귀순하여 적극적으로 후백제를 저지하였으며, 고려 시대 때도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자발적인 근왕군을 조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