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택

 


성명
이수택(李壽澤)
이명
이각(李覺)
자 / 호
덕윤(德潤) / 일몽(一夢)
본관
광주 이씨[1]
생몰
1891년 2월 17일 ~ 1927년 7월 4일
출생지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2]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수택은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약목면 소재 동락의숙(同樂義塾)과 경성부 소재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항일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으나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같은 해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한훈·유창순·유장렬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 및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박중화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11월 10일 길림(吉林)에서 김원봉·곽재기·이종암(李鍾岩)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관리를 맡았으며,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진영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과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같은 달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벙어리 행세를 하여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의열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취체벌칙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2년 6개월형의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9일경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그해 7월 4일 칠곡군 자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같은 달 10일에는 왜관면 각 사회단체의 연합장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일제 당국의 금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8.15 광복 후 1951년 12월 9일 사회부에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 21대손 수(壽) 항렬.[2]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항진도 이 마을 출신이며, 이수일은 관터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