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도
1. 소개
한국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2. 선수 시절
'''KBO 리그 원년 개막전 끝내기 만루홈런의 주인공'''
중앙고등학교-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1970학번)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 선수로 프로에 입문했고, 팀의 첫 주장이 되었다. 그해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의 당시 명칭)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와의 KBO 리그 원년 출범 개막전에 6번 타자에 좌익수로 선발 출장, 연장 10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이선희의 3구를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장식하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4]
당시 개막전 만루홈런 동영상. 고화질로 보고 싶다면이쪽으로.
이종도는 이날 개막전에서 MBC 청룡-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리그 1호 안타도 기록했다.
이종도는 그해 타율 0.324, 11홈런, 48타점을 남기며 MBC의 중심타자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후 이종도는 1984년 까지 MBC 선수로 뛰다 1985년 OB 베어스로 이적하여 1987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프로 통산 성적은 6시즌 '''482경기 344안타, 타율 0.268, 28홈런, 176타점, 50도루.'''
참고로 MBC 청룡-LG 트윈스,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역사를 통틀어서 '''두 팀에서 모두 주장을 역임한 선수는 이종도가 유일하다.'''
3. 지도자 시절
1988년 MBC 야구해설위원을 거쳐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LG 트윈스(1992~93)[5] 쌍방울 레이더스(1996~99) 코치를 거쳐 2000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감독에 임명되어 2006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였는데 1994 ~ 1995년까지 KBS 라디오 해설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KBS N SPORTS 해설위원으로 프로야구계에 복귀하여,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해설[6] 로 야구팬들의 빈축을 사다 1년만에 그만두었다. 2008~09년엔 엑스포츠 해설가로 이직했지만, 여전히 수준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해설가 경력을 초라하게 끝냈다.
2010년 11월 담관암 진단을 받았으나 다행히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로 제거, 현재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한다.[7]
2011년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 서울 해치[8] 의 코치로 임명되었으나 소속 선수들 다수가 고양 원더스로 빠져 나가며 팀이 활동 중단 상태에 놓이자 코치직을 그만 두고 귀국, 설악고등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2017년까지 재직했다. 2015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의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3위의 성적을 올렸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1] 체육교육학과 (1970학번)[2] 1975~1977년까지 군 복무.[3] 라디오 중계[4] 그 날 이종도는 개막전 수훈선수로 뽑히며 오토바이를 부상으로 받았다.[5] 그 동안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선수였던 윤찬 덕분에 1993년 시즌 후에 잘렸는데,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의 윤찬의 어처구니 없는 본헤드 플레이로 인한 주루사 당시의 3루코치가 그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 경기를 구본무 회장이 직관했었고, 그 어이 없는 플레이에 분노한 구본무 회장이 프런트에 그의 해임을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물론 그 상황은 전적으로 윤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이종도만 결국 윤찬 덕분에 억울하게 잘린 것이다.[6] 심지어 고려대 감독 시절 직접 제자로 데리고 있었던 박용택 이나 정근우 같은 선수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떤 유형의 선수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이를 지켜보던 팬들의 비난세례를 받았다.[7] 담관암이 초기에 발견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굉장히 운이 좋았던 셈. 오죽하면 이종도를 진찰한 의사가 "평소에 좋은 일만 하고 사셨나보죠?" 라며 그의 행운에 감탄했다는 말도 있다.[8] 2009년 코리아 해치로 출범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파탄나는 바람에 서울특별시가 후원자로 나서며 2011년 4월부터 다시 리그에 참여하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