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사건 내용
1. 개요
주소는 사건 당시 기준이므로 지금의 행정 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사건의 주 무대였던 태안읍은 2006년부터 6개 행정동으로 분리되어 지금은 없어진 지명이다. 10차 사건의 발생지인 동탄면도 동탄신도시의 개발로 현재는 동으로 전환되었다.[4]
화성지역에서 10번의 사건에서 총 10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령은 13살 중학생부터 71살 할머니까지 매우 다양했다.
강간과 살인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고, 속옷을 안면에 씌우거나 두 손을 뒤로 묶는 등 대단히 충격적인 범행 수법으로 화제가 되었다. 무조건 목을 졸라 살해한 것도 아니고, 가슴이 9차례나 난도질되거나 음부에 복숭아 9조각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수사에 참가했던 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자상에서 피가 많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 죽은 후에 찌른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은, 화성군민뿐[5][6] 아니라 전 국민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당연히 범인을 빨리 잡으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여론에 떠밀려 경찰은 엄청난 숫자의 용의자들을 잡아들였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심약자주의.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 사진이 있음.)
1, 2차 요약
3, 4차 요약
5, 6차 요약(참고로 여기엔 6차가 빠져있다.)
7, 9차 요약[7]
10차 요약
지금은 게시글이 삭제되었다.
여름인 6월, 7월, 8월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데, 그 대학교는 6월에도 학생들이 나가기 때문에 일용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수사 책임자가 밝히는 자세한 사건 내역 - #2006년 1월 기사(월간조선), 2019년 8월 인터뷰(유튜브 채널)
2. 1986년
2.1. 1차 사건
1986년 9월 13일밤 9시 경~9월 14일 새벽 6시경에 화성군 정남면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모씨(72)가 피살된 사건.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9월 14일 오전 6시에 재배한 채소들을 팔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후 그대로 실종되었다. 실종 약 5일 후인 9월 19일 오후 2시경 목초밭에서 목장 주인이 숨진 피해자를 발견했다. 이씨가 발견된 장소는 딸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였으며, 시신은 하의가 벗겨지고 다리가 X자 형태로 교차된 상태였다.
조사 결과 성폭행은 없었으며 사인은 교살이였다. 경찰은 이씨가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가다가 범인의 눈에 띄어 목초밭으로 끌려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지문, 유류품, 족적, 체모 등의 단서를 발견하는데 모두 실패해 용의자조차 잡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이춘재를 잡고보니 당시 피해자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 전인 9월 13일 밤 9~10시경에 살인을 저질렸다고 진술했고 목격자도 밤 9시경에 살인을 목격했다고 진술을 토대로 범행시각이 변경 되었다.
2.2. 2차 사건
1986년 10월 20일 밤 10시 경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모씨(26)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송탄시 신정로에 거주중이던 피해자는 이날 수양어머니인 허모씨가 거주중인 태안읍 송산리에 버스를 타고 갔고, 소개로 맞선을 보고 오후 8시 50분경 집으로 돌아갔다. 허씨는 마을 입구까지 피해자를 배웅했고, 피해자는 1km 정도 떨어진 버스 정류장을 향해 둑길을 걸어가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약 3일 후인 10월 23일 오후 2시 경 농수로의 콘크리트 수로 안에 숨져있는 피해자를 논주인이 발견후 신고했다. 피해자는 발견 당시 알몸이였고 가슴과 등에 수차례의 자상 흔적이 있었다. 목에는 스타킹이 감겨있었고 사인은 액살로 밝혀졌다. 옷가지들은 농수로 둑에 버려져있었고 강간당한 흔적과 정액이 확인되어 조사했으나 혈액형 분석에는 실패했다. 경찰은 대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유팩, 담배꽁초, 모발을 분석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분석 결과 B형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경찰은 이번에도 유력 용의자를 밝혀내는데 실패했으며 수사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3. 3차 사건 ★
19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에서 권모씨(25)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피해자는 공장에서의 작업이 끝나고 오후 6시경 버스를 타고 남편을 만나러 수원시 세류동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부부는 저녁 식사를 한 후 피해자만 먼저 귀가하기 위해 10시 30분경 버스에 탔고, 11시가 약간 지날 시점에 안녕리 삼거리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4개월 후인 1987년 4월 23일,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던 논주인 김씨에 의해 부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권씨의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였으며, 하의가 벗겨져있었고 입에는 스타킹과 거들로 재갈이 물려있었고 피묻은 속옷이 얼굴에 씌워져있었다. 시신은 부검하기 힘들 정도인 상태였으나 소지품 중에서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이 발견되어 신분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논바닥으로 끌고가 옷을 벗기고 재갈을 물린 후 성폭행했고, 이후 스타킹으로 교살한 후 시신을 둑 밑의 모래 부대 아래에 은닉한 것으로 보았다.
2.4. 4차 사건 ★
1986년 12월 14일 오후 11시경 정남면 관항리 논둑에서 이계숙씨(22)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3차 사건 이후 불과 이틀만에 벌어졌다.
피해자 이씨는 이날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수원 시내의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맞선은 잘 진행되면서 밤 10시 이후에 끝났고, 이씨는 11시경 집이 있는 종점인 정남면 면소재지에 내려 1km 떨어진 집으로 가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냈고 경찰은 관항리 일대를 샅샅히 뒤졌고, 약 일주일 후인 12월 21일 오후 12시 반 경 관항천 둑에서 들깻단으로 덮인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여있었으며 거들은 머리에 씌워져있었고, 블라우스를 벗기고 다시 겉옷을 입힌 것이 확인되었다.[8] 조사 결과 피해자는 스타킹으로 목을 졸려 살해당했으며, 하체에서 성폭행 흔적과 우산으로 난행당한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비가 왔고 사망한지 일주일이나 지나 혈액형 판독에는 실패했다. B형의 혈액형이 검출되기는 했으나 피해자의 혈액형도 B형이였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3. 1987년
3.1. 5차 사건 ★
1987년 1월 10일 오후 8시 50분경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홍모양(18)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일 홍씨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려 간 후 수원시 북문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고, 8시 30분경 태안읍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 50분경 반정리 정류소에서 내렸다. 이후 집으로 돌아가던 피해자는 범인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아침 볏짚을 옮기던 논주인이 볏단 속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피해자는 양손이 속옷으로 묶여있었고 다른 사건과는 달리 옷이 모두 입혀져있었다. 조사 결과 피해자는 목도리로 교살당했으며 성폭행 흔적이 나왔다. 정액이 검출되긴 했으나 혈액과 섞여있어 혈액형 판별이 어려웠고, 대신 천조각과 음모 등에서 나온 혈액형은 모두 B형으로 나왔다.
이 사건을 포함해 4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사본부가 있는 태안지서에서 반경 2km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경찰은 이때부터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스템적인 한계로 연쇄살인의 시점에서 수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3개월 후 3차 사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3.2. 6차 사건
1987년 5월 2일 오후 11시 경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모씨(29)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진안리에 거주중이던 피해자는 폭우가 내리는 밤에 남편을 우산 마중을 나갔다. 밤 9시에 집을 나선 피해자는 9시 30분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했고, 10시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이때 남편은 야근때문에 밤 10시 30분에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으며 11시쯤에 버스정류장에 내렸으나 정류장에도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남편은 이틀 후 실종신고를 냈고, 경찰은 수색 도중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스정류장에서 바로 밑 논바닥에서 피해자의 샌들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시신은 실종된지 약 일주일 후인 5월 9일 수업을 마치고 산을 넘어 집으로 귀가중이던 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피해자의 집에서 200m 떨어진 무덤 옆 나무더미였고, 시신은 상체가 벗겨지고 양손이 뒤로 묶여있었으며 목에는 블라우스와 속옷이 감겨져있었다. 조사 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교살이였다. 현장에서 234mm 정도의 족적이 나왔고, 츄리닝 상의에서 발견된 정액을 조사결과 A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피해자의 남편이 A형이였기 때문에 경찰은 결과를 확신할수 없었다고 한다.
4. 1988년
4.1. 7차 사건 ★
19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 경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모씨(54)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피해자는 이날 장남이 운영하는 수원 시내의 분식집에서 일손을 도운 후, 저녁 8시 40분쯤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다가 실종되었다. 밤이 늦도록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남편은 날이 밝자마자 친척들에게 연락해 피해자를 찾아 해맸고, 실종 다음날인 9월 8일 아침 9시 30분쯤에 남편의 사촌동생이 풀숲에서 피가 흥건한 피해자의 시신을 찾아냈다.
피해자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있고 입은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린 상태였으며, 쥐색 치마를 벗겼다가 도로 입힌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사 결과 성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 끈으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나타났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피해자의 질 내부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잘려있는 복숭아 7조각이 발견되었으며, 4차 사건에 이어 또다시 우산으로 하체를 난행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난데다가 더욱 잔혹해진 수법에 여론은 난리가 났고, 당시 화성 경찰서장이 교체되었다.
4.2. 8차 사건
1988년 9월 16일 새벽 2시 경 태안읍 진안리 주택에서 박모양(13)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5. 1990년
5.1. 9차 사건 ★
1990년 11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모 양(14)이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태안읍 능리에 거주중이던 피해자는 오후 5시경 친구와 헤어져 하교하던 중 실종되었다. 밤 9시가 되도록 피해자가 돌아오지 않자 매우 불안해진 가족들은 인천에 있는 친척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 밤을 새며 주변 근방을 모조리 뒤지며 피해자를 찾았으나, 결국 피해자는 다음 날인 11월 16일 아침 9시경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는 피해자의 삼촌이었다. 피해자가 발견된 야산은 밤에 늘 경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였다.[9]
피해자는 교복으로 덮여있었으며, 양손과 양발이 스타킹으로 묶여있었고 속옷으로 재갈이 물려있었다. 부검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피해자의 필통에 있던 문구용 칼로 가슴을 20여 회가량 난행한 후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질 안에서 피해자의 소지품이었던 수저, 포크, 볼펜 등이 나왔다.
거기다 피해자의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잡채가 발견되었는데, 이 말은 피해자가 잡채를 먹은 지 2시간 내에 살해됐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피해자가 이날 점심 도시락으로 잡채를 싸왔지만 점심에 먹은 것은 진작 소화가 됐어야 했고 저녁에는 바로 하교를 하기 때문에 먹을 만한 타이밍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피해자의 도시락에서 지문이 발견되었고, 이 때문에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잡채를 먹이거나 혹은 억지로 먹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에는 40개 정도 되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고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6. 1991년
6.1. 10차 사건
1991년 4월 3일 오후 9시경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모(69)씨가 성폭행 후 피살된 사건.
당시 권씨는 수원시 매탄동에 있는 큰딸의 집에 갔다가 6시 반경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오후 8시경 동탄면 오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이 있는 반송리 쪽으로 귀가하던 중 피살되었다. 다음날 밭둑을 올라가던 중인 중장비 운전기사가 피해자를 발견하고 신고했다.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집에서 200m 떨어진 곳으로, 하의가 벗겨지고 검은 스타킹이 목에 감겨있는 상태였으며, 음부에는 양말이 삽입되어 있었다.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재갈도 없고 손을 결박하지도 않았으며,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 역시 교살이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모방범죄를 의심받기도 했다.
경찰은 양말에서 B형의 정액과 지문을 채취했고, 이 지문을 3천명 가량의 용의자와 약 4만명의 참고인과 대조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1] 전문가들은 이것이 연쇄 강간만 저지르던 이춘재가 저지른 첫 살인일거라고 분석했다.[2] 다만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당시 경찰이 은닉 하였기 때문에 성폭행 사실은 이춘재의 자백에만 근거한다.[3] 강도 미수사건의 대한 화풀이+등화관제로 인한 목격자 부재+ 피해자가 범인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시너지로 인해 가장 잔인하게 살해되었다.[4] 당시에 반송리인 것으로 보아 동탄1신도시인 듯.[5] 범인이 저렇게 끔찍한 범죄를 수차례 이상씩 저질렀음에도 잡히지 않아, 그로 인해서 몇 년 동안 가족이나 지인들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두려움을 떨어야 했고 밤에 길거리로 나가기 힘들었으며 특히 여학생의 경우에는 범죄를 우려해서 아예 외지로 전학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수사방식도 살인의 추억에 나온 것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가 초상권 개념도 미비하던 시절이다 보니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하면 '''실명 및 얼굴을 진범이든 범인이 아니었든 간에 그냥 막 공개하여''' 실제로는 별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용의자로 특정되었다가 아닌 것을 밝혀져 풀려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트라우마를 가지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여성은 여성대로 죽음의 공포를 마주봐야 했고, 남성은 남성대로 경찰에게 얻어맞거나 용의자로 특정되어서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어 트라우마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화성이 개발되고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되었지만 중년층 이상의 토박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나 다름 없다.[6] 화성시로의 승격은 2001년에 이루어졌다.[7] 본문엔 7, 8차로 되어 있으나 편의상 9차로 서술한다. 본문 작성자도 8차 사건이 모방범죄였다는 것을 감안해서 저렇게 적어둔 듯하다.[8] 이 겉옷이 빨간 투피스였는데, 이 사실은 이후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노린다는 루머의 시작점이 된다.[9] 이 때 경찰에게 범행이 발견되지 않은 건 등화관제때문이다. 왜냐면 등화관제 시기엔 불빛을 모두 차단을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