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적 종결 욕구
'''Need for Cognitive Closure''' (NfCC)
1. 개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아리에 크루글란스키(Arie Kruglanski)가 제안한 개념으로,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반증될 여지 없는 확고 불변의 최종 결론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뜻한다. 대량의 정보 속에서 일종의 인지적 과부하(cognitive overload)가 발생되고, 이러한 과부하를 해소하기 위해서 방향과 맥락을 잡아 주는 길잡이를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지적 종결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들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어떤 주제나 쟁점 또는 사안에 확고하고 의심 없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호한다. 쉽게 말해 어떤 긴 글을 보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핵심만 말해.'''' 라고 요구하는 경우를 뜻한다.
집단사고와는 다르다. 집단사고는 동질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소수 엘리트가 어떻게 부적절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좀 과격하게 말하면 피그만 침공에 관련된 사례연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NfCC는 한 개인이 대량의 정보를 어떻게 단시간 내에 처리하는가에 관련된 아이디어로, 종래의 지배적인 정보처리이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대안적 접근법이다. 사실 집단사고 개념 자체가 이곳 나무위키를 포함해서 비전공자 대중들에게 남용되는 신세이기는 하다. 인지부조화 개념과 비슷한 사례.
2. 설명
인지적 종결 욕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식이 도움이 된다. 비전공자들에게는 과학철학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고, 전공자들에게는 이중 과정 모형(dual process model)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양쪽 모두를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연구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칼 포퍼의 이상적인 모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수행한다. 즉,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적절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연구를 하든지 그것은 신뢰할 수 없다. 설령 연구가 제대로 수행되어서 어떤 지식을 획득했다 해도, 나중에라도 자신의 기존 연구를 반증하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타났다면, 그 후학을 향해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날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 며 악수를 건넬 수 있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항상 "그래도 내가 틀렸으면 어떡하지?", "내가 정말로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나?", "내 연구에는 어떤 결함이 있지?", "내 생각이 혹시 설레발은 아닐까?" 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다. 요컨대, '''자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마음의 문을 굉장히 오랫동안 열어두어서 항상 여지를 남겨 둔다.''' 아마 과학자들은 정말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에만 이런 숙고의 과정을 생략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NfCC가 낮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전부 과학자 같은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야 항상 연구를 함에 있어서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일상에서도)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서 대개 1% 이상은 신경을 쓰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이들은 너댓 번쯤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 보고, 내내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생각에 대해 자신이 틀렸을 리 없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두세 번, 어떤 이들은 단 한 번,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예 그 한 번조차 스스로를 따져 보고 회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기 전에 생각의 사이클을 돌리는 시간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자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즐기겠지만, 누군가는 재빨리 마음의 문을 닫고서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으려 할 것이다. 여기서 NfCC가 높은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확고불변한 최종 결론을 형성하고, 그 결론을 바꾸지 않으려 한다.'''
"김치는 항암효과가 있다" 는 진술이 있을 때, NfCC가 높은 사람들은 김치에 관련된 수많은 영양학적 정보들을 전부 다 소화할 여력이 없다. 구글링만 해 보면 정보의 바다가 펼쳐지지만, 그들은 그걸 전부 세세하게 검토하기를 힘겨워한다. 권위 있는 누군가가 그렇다더라 하고 일러주면 얼씨구나 해서 그것만 기억하고, 그것만 의심 없이 신뢰한다. 이를테면 "방송에서 그렇다면 그런 거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김치의 항암효과가 과장됐다는 지인의 일침은 듣지 않는 식이다.
반대로 NfCC가 낮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들을 전부 검토해서 자신의 판단에 반영하길 원한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검토할지는 그 개인의 NfCC가 얼마나 낮은지에 달렸다.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도 "김치는 항암효과가 있다고들 한다, 그래도 나중에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면 또 모르겠지만..." 같은 식으로 여지를 남긴다. 이들은 과학자들이 하듯이 끝까지 자신의 생각에 반증 가능성을 허용한다. 물론 그에 뒤따르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기에 가능한 일.
이번에는 이중 과정 모형에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보자. 사회심리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전공지식을 쌓아 보았다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거대이론이 바로 이중 과정 모형이다. 그 말인즉슨,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은 정말 많은 인지적 자원을 오랫동안 소모하는 '비싼' 정보처리 과정을 거치지만, 그만큼 더 정교하고 신뢰할 만한 결과물이 나온다. 반면에 어떤 생각은 최소한의 인지적 자원만을 들여서 빠르게 넘기는 '값싼' 정보처리 과정을 거치지만, 그만큼 현실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싸잡아 치부하는 투박한 결과물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이 두 가지의 정보처리 과정 사이에서 적절히 왔다갔다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힘의 한계' 를 벌충한다.[1] '''NfCC 개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것이 인간의 사회적 정보처리에 대한 이론의 전부였다.'''
하지만 크루글란스키는 이중 과정 모형의 패권적 위치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의 NfCC 개념이 기존의 이중 과정 모형의 관점에 가장 크게 대비되는 점이라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정보처리 방식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하나의 방식을 얼마나 끈질기게 사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이중 과정 모형에 대조시킬 때는 단일모형(unimodel)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이 (이중 과정 모형에서 상정하는) 과학자들의 사고방식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때는 일반인 인식 이론(lay epistemic theory)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먹물 많이 먹은 심리학자들이야 항상 만나는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들 고학력자이다 보니 '깊은' 생각과 '얕은' 생각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뿐이지, 처음부터 그런 '깊은' 생각을 할 여력이 별로 없는 일반인들은 두 생각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인지적 여유가 있다 해도 그저 한 번쯤 "어, 이게 맞나?" 하고 슬쩍 생각해 보고는 "뭐, 맞겠지" 하고 넘긴다는 것.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크루글란스키는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 변인으로서 "자신의 인지적 자원의 투입을 가능한 한 빠르게 중지시키려는 욕구(need)가 존재한다" 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NfCC가 낮은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NfCC가 높은 것은 사회과학적으로 꽤 큰 문제가 되곤 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그 '결론' 이 틀렸을 때, 그것이 틀렸음을 납득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것이 타인을 해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에는 더욱 심각해진다. 크루글란스키는 NfCC가 높은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으로 '''붙잡기'''(seizing)와 '''얼어붙기'''(freezing)의 두 가지 단어를 들어 요약 설명했다. 즉, 어떤 그럴듯한 정보가 들어왔을 때 개인이 그것을 당장 "붙잡고", 그것을 붙잡은 채로 고스란히 "얼어붙어서" 절대로 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대개 외적인 권위로 뒷받침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지적했다.
현대 들어서 NfCC는 (짐작하겠지만) 지지리 말 안 통하는 꼴통(…)들의 심리를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개인차 변인으로서 자리잡았다. 또한 크루글란스키 본인부터가 정치극단주의자들의 심리분석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NfCC가 이중 과정 모형을 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 과정 모형이 사회심리학계에서 갖는 위상이 아직도 엄청난 것 역시 사실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는 이거 아니면 저거 식으로 무 자르듯 잘리기보다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발상 자체는[2] 설득력이 있지만, 태생이 개인차 변인이다 보니 이걸 어떻게 설득(persuasion)과 같은 광고심리학적인, 속칭 '돈 되는' 문제에 써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ELM 등의 이중 과정 모형보다 확연히 밀린다. 응용학문적이기보다는 순수학문적인 논리가 더 강하다 보니, 아주 외면받지는 않고 대학원 세미나 중에 이런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 정도는 한 타임 정도 진지하게 소개하고 넘어가는 정도.
아무튼 이런 학술적 대립관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정보처리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이중 과정 모형과 NfCC를 서로 엮어서 소개하면 안 된다. 이중 과정 모형을 NfCC가 보완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쪽의 인식론이 거부되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예시
-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가 범람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작품의 공급 속도를 독해력으로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인기작에 올랐거나 심사에서 상을 탄 작품, 즉 작품성을 보장하는 카테고리에 들어간 작품을 위주로 찾는다. 평론가 및 심사위원 및 편집자는 위와 같은 시스템 때문에 대중이 찾지 못하는 모래 속 진주를 일일이 선별하여 대중에 알리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4. 같이 보기
[1] 물론 어떤 사람들은 비싼 정보처리를 남들보다 자주 사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값싼 정보처리 과정에 더 자주 의존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 상황이 허용하는 한에서는 최대한 신속하면서도 또 최대한 정확한 생각을 하려는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누구든 이 두 가지의 처리과정은 서로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것이 요지.[2] 쉬운 예로 사람들은 무조건 외향적이거나 무조건 내향적인 게 아니라 정규분포의 형태로 적당히 외향적이거나 적당히 내향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일수록 흔치 않다.[3] 나무위키의 볼드체 요약문이 대체적으로 간결체 형식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