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1. 개요
2. 비판과 논란
2.1. 평론가의 자질 문제
2.2.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
2.3. 평론가들의 사상으로 벌어져가는 대중과의 괴리감
2.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
3.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3.1. 국내
3.2. 해외
4.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4.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5. 관련 문서


1. 개요


'''비평은 창조의 정수다.'''

''Criticism is the essence of creation.''

오슨 웰스

'''미술 심사위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가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한 번도 달걀을 낳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걀이 상한 것인지 싱싱한 것인지는 가려낼 수 있다.'''

윈스턴 처칠

'''평론가'''(,,)는 '''비평가'''(,,), '''논평가'''(,,)로도 불리며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작품이나 계획에 대해서 그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거리가 있다면 이에 대해 비평하게 된다. 이를 통해 문학이나 영화 작품, 예술 작품 등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다.
비평가나 논평가라는 명칭보다는 평론가라는 명칭이 덜 부정적이고, 더 널리 쓰인다. 국어 사전의 개념을 살펴봐도 비평보다 평론이 좀 더 무난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평론 : 사물의 가치, 우열, 선악 따위를 평가하여 논함. 또는 그런 글.
비평 : 1)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2)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러쿵저러쿵 좋지 아니하게 말하여 퍼뜨림.
논평 : 어떤 글이나 말 또는 사건 따위의 내용에 대하여 논하여 비평함. 또는 그런 비평.
비평가는 절대 비판만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판이 아니라 비평을 하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나와있지만, 2번의 의미로만 비평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론이나 비평은 내력, 가치, 좋은 점과 나쁜 점, 앞으로의 전망 등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2. 비판과 논란



2.1. 평론가의 자질 문제


어떻게 생각하면 비평이라는 작업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위험부담이 없을뿐더러 우리의 평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젠척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는 나쁜 말들을 잔뜩 적어 놓는다. 하지만 쓴소리를 잘하는 우리 평론가들은 어쩌면 겉모습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비평보다 더 의미가 있는 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평가도 모험을 할 때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때다. 새로운 재능, 새로운 발명에 대해 세상은 불친절하다. 새로움에는 그것을 지지해줄 친구들이 필요하다. 나도 어젯밤에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있는 소스가 뿌려진 아주 특별한 식사! 음식이나 주방장 모두에 관해 내가 느끼고 있는 추잡한 선입견은 모두 배제한 채 얘기하기로 하겠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므로!. 솔직하게 말해 예전에는 믿지 않았다. 구스또 주방장의 유명한 좌우명인 누구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스또에서 요리하고 있는 그 비천한 요리사를 상상하면 이 평론 자체가 정말 힘들겠지만 감히 말한다, 그는 프랑스의 그 어느 요리사보다도 훌륭하다고!. 다시 구스또에 가고 싶다. 더 먹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

- 라따뚜이[1]

비평가가 작가를 모욕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평이라고 한다. 작가가 비평가를 비판한다. 그것은 모욕이라고 한다.

''When the critic insults the author, it’s called criticism. When the author criticises the critic, it’s an insult.''

- 몽테를랑(프랑스의 작가)

과거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 칼럼, 유튜브 크리에이터 문화의 발전과 함께 평론가의 자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비평이 더 많은 조회를 불러오기 때문에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비평을 하는 비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들을 비꼬는 말로 양산형 공장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에 갇혀서 그 대상의 역사성, 바탕이 되는 철학(방향성), 소비자들과 창작자들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창작 문화,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상업적, 예산적) 한계, 기술적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까기 위해 까는 이들이다. 자신이 평론을 업으로 삼는 프로 평론가라면, 소비자의 이익과 알 권리를 대변해주고, 창작자가 간과하기 쉬운 소비자의 관점을 불러일으키고,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계를 이어주고, 자신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평가하는 입장을 지적인 상하관계로 오해하고 자신의 주관적 신념, 이데올로기를 창작자와 소비자에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창작계에 열풍처럼 불고 있는 페미니즘 워싱(핑크 워싱)이 있다. 페미니즘과 상관없던 원작들에 2차 창작자가 페미니즘적 색채를 입히고, 기존에 흥행하던 작품의 후속작에 기생하여 고증스토리, 개연성 등등의 작품 내 모든 요소를 페미니즘을 광고하는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비튼다. 평론가들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그 작품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대중들을 [2] '못 배운 놈(Uneducated)', 남성우월주의자취급한다. 이런 행태는 원래 그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원작자와 소비자의 문화를 무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선민의식적인 시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글. 나는 이런 종류의 게임이 사회현상이 되는 흐름은 곧 ‘작가주의 노선의 예술 게임이 인류를 계몽할 수 있는 수준의 미디어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하지만, 정작 창작 쪽 조언은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우선, 작가의 태도에서 출발하라. 해결할 문제가 있거나 주장하는 바가 있거나 혹은 작가가 생각하는 식으로 세상이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 작품이 아닌 논문을 쓰는 게 옳다. 이야기를 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이웃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복잡한 세상에서 발견되는 삶의 모순을 말하고 싶으면 작품을 써라.

-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2007, P. 85

위험 요소는 이런 것이다. 작가가 세상에 널리 증명하고 싶어하는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이야기 한쪽 축을 이뤄야 할 목소리가 질식할 것이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 된다. 계몽주의란, 예술은 사회의 암으로 수술해 내는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천진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 로버트 맥키,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2002, P.189

조언들은 추가적으로 예술가가 설득이나 계몽을 위해 작품을 만들면 이야기가 일방적인 면만 부각할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3]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이런 원칙 자체는 알았는지, 이야기 구조를 보면 어느 한 쪽만 조명하려고 하지 않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캐릭터 간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원칙이 작품에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라스트 제다이의 로즈 티코는 소위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전형이다. 당연히 평가는 좋지 않다.

2.2.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


"정치가가 정치 기자들을 경멸하고 예술가가 미술 평론가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생리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도 대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창조하는 사람이 해설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경멸감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고 명백히 정당한 것이다. 설명이나 비평, 평론 등은 이류급 인간들이나 하는 일이다. "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비평이란 비평가가 예술가의 명성에 자기도 함께 참여하려는 예술이다.

- G.J. 네이딘(미국의 연극 평론가)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묘하다. 평론가는 비평을 통해 다양한 평가를 작품에 내리지만, 대개 작가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작품을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비평가는 작품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기도 하고,[예시]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기도 한다. 문학상 수상 같은 경우 대부분 평론가들이 수상작을 심사한단 점에서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영역에서 평론 대상의 풀이 넓지 않거나 평론가의 풀이 넓지 못하다면, 특히 소비자와 괴리되어 있다면 평론가와 창작자는 공생관계를 가지기가 쉽다. 이 때 평론가는 대상에 대하여 과도하게 칭찬만을 늘어놓고 그 대가를 받고, 생산자는 그 평론을 이용해 마케팅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주머니를 불린다. 서로가 서로의 돈줄을 쥐는 형국이 된다. 이러한 비평 권력은 곳곳에 있으며, 조금만 찾아보면 문학계를 비롯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위 인용문과 같이 비평가가 유명 예술가의 명성에 편승하기 위해 평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자신이 비평하는 사람이 인기가 많고 영향력이 클수록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와 동급이 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모든 비평가가 그런 건 아니고 비평 권력을 깨부수려고 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 등을 내세워 주류 의견과는 일부러 정반대로 나서는 경우도 꽤 있다. 단순히 돈벌이 수준만으로 평론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고 대중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의 경우는 오히려 유착도 거부하지만 대중적 시각을 인정하는 것 역시 거부하는 상황이 되기 쉽다.
당연히 평론이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다. 이해를 하지 못 하는 이들에게 X문가라고 까이는 경우도 있고,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직접 하던가' '악플러네'''' 등등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까이기도 한다. 비평가는 스스로 대단한 뭔가를 만들지 못하며, 남이 만들어 놓은 것에 편승하는 사람이란 견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창작자에게 비평가의 말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도 있다.

" 세상에는 비평가들을 위해 세운 동상은 없다 "

- 장 시벨리우스[4]


2.3. 평론가들의 사상으로 벌어져가는 대중과의 괴리감


" 비평가를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일반 대중이 대상이다. "

- 월트 디즈니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공연 평론가가 진짜 사기꾼이지. "

- 위대한 쇼맨

대중과 평론가 간의 괴리감으로 인해 대중들이 평론가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역으로 일부 평론가들이 대중들을 개돼지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그 괴리감이 단순히 평론이 리뷰와는 다르게 학문적인 방향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일부 평론가들이 자신의 사상과 동조하지 않으면 교육받지 않은 개돼지로 몰고 가며 노골적인 선민사상을 띄고 있다.
2010년대부터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 영화, 게임 등 문화컨텐츠를 생산하는 창작자들의 주류 흐름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그 들 중 일부는 극단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문화컨텐츠를 보고 있는 독자 및 유저들을 가르치려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평론가도 예술계에 종사하는 만큼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라스트 제다이의 경우 평론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으나, 팬 및 관람객에 있어서 불호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평론가들은 충격적인 내용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 좋은 평가를 내렸지만 팬들에게 있어 이 영화는 많은 설정 파괴와 캐릭터 파괴, 쓸데없는 플롯들, 영화의 메시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하이라이트, 선택적 정치적 올바름, 표절논란 등등등... 여러 문제점이 입소문으로 퍼져 2주만에 드랍률 76.4%를 기록하고 팬덤을 괴멸시켰다.[5]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평가 중 평론가의 호평을 보면 무슨 새로운 스타워즈 시대를 열것 같이 말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복선과 이야기를 끌고나갈 악역, 이전 영화와의 연결고리 전부를 분쇄해버린, 프랜차이즈로서는 사상 최악의 영화였다. 9편에 와서야 전작을 부정하고 처참한 무리수[6]를 둔 끝에 중박이라는 평가를 받을수 있었다. 즉,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인터넷 대중들보다도 내다보는 식견이 떨어지거나, 그게 아니라면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표현하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 다른 예는 바로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있다. 평론가들은 역시 좋은 점수를 주었지만 팬들은 욕을 하는 작품이다. 이는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영화적이고 충격적인 플롯을 선사하는 데 있어서 평론가들은 초점을 맞췄지만 팬들에게 있어서는 개연성을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PC적이지만 혹평 받은 시간의 주름(영화) 같은 사례도 있기 때문에 평론가 쪽이 사회 정의적 사상과 관련해 무조건 호평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7]
이처럼 작품의 완성도나 개연성, 작품의 팬들이 원하는 요소보다는, 영화에 자기가 맞는 사상을 가지고 있냐 있지 않냐라고 판별하는 평론가들이 많아졌다. 물론 평론가로서 자신만의 작품 감식안이 뚜렷해야 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컨텐츠는 소수의 평론가만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함께 소비하는 것이다. 아무리 평론가가 대호평해도 대중이 관심을 끊고 소비를 끊어버릴 경우, 그 작품은 거기서 끝이다.

2.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


감히 말하건데 현대문학이론에 대한 이해는 (문학을 포함한) '세계'를 읽어내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익히는 일에 다름 아니다. 소위 '발상의 전환'이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패러다임들은 다른 종류의 '맹목(blindness)'이 보지 못하는 '통찰(insight)'을 제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통찰의 이면에 맹목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이론은 '총체적(total)'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부적(local)' 정당성만을 갖는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정확히 읽어내는 창(window seeing all things clearly)'은 없다...(중략)...이론들은 저마다 맹목과 통찰의 이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폴 드망(Paul De Man)의 주장처럼 때로 맹목과 통찰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中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평론가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펼치되,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따라서 주관에 갇힌 평론은 평론으로서 실격이다. 물론 로봇이 아닌 사람이기에 자신의 취향이 뚜렷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므로, 주관에 치우친 평론을 하면 같은 사람의 말이 어제 오늘이 달라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고전 작품이라 할 지라도 취향을 타는 작품은 분명히 존재한다. 일례로 심지어 김소월의 시도 일부 어르신 중엔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원래 소년, 소녀적인 감성을 싫어하는 성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이에 맞는 태도를 강요하는 우리나라 특성상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을 수 있다. 다만 시인의 명성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는 것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분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 경우, 대놓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치고 애당초 만장일치로 지지받은 작품은 없다. 오히려 일부의 취좆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마니아를 확보하며 살아 남았기에 고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소신과 독선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못하여 키배가 벌어지는 것이다. 예시를 들기엔 다소 위험하지만, 이런 경우는 주관에 치우친 최악의 평론이라 볼 수 있다.
  • 특정 국가의 전통 음식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어그로를 끄는 경우 - 실제로 서구권 네티즌 중에 역겨운 김치 같은 영화라느니 하는 식으로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 나라에서도 비웃음거리가 된다.
  • 독심술 - 작품을 만든 사람의 머릿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탄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경우는 평론을 빙자한 명예훼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이는 표절 논란에도 적용되는데, 결과물에 대한 오리지널리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의견을 낼 수 있겠지만, 대놓고 베낀 정도가 아니라면 고의성을 확신하기 어렵다. 아무리 기준을 교묘히 비껴간 지능 표절이 횡행한다는 심증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의도적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 문서에도 언급되듯이, 모든 창작은 기존에 나온 것을 자기 식으로 다듬으면서 이루어지므로,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론적인 근거 없이 단순히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분위기 표절"이라 모는 것은 전문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 게다가 실제 표절은 못 잡고, 오히려 애먼 작가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표절로 몰린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평론계의 갑질이 심할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창작자를 매도할 위험이 있다.
  • 어릴 때나 심취할 작품이지 나이 들어서 보면 유치하다 - 물론 상당수의 인터넷 소설 같은 경우는 이러한 발언이 들어맞을 수 있지만, 연령을 기준으로 한 평가는 "나이 든 사람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꼰대적인 발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안데르센의 경우도 당대에는 “왜 애들이나 읽는 동화를 쓰느냐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도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명작이 많으며,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의 모티브로도 등장한다.
    • 그리고 저러한 발언이 중장년, 노년층 전체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주로 저러한 이유로 까이는 작가들은 청년기에 요절한 사람들이 많은데, 노년이 되어도 이들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청년기에만 깊이 공감할지라도 이러한 현상이 세월이 흘러 새로운 청년 세대에서도 나타난다면 세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유아용 그림책이 있는데, 이러한 서적은 유아의 언어 발달 과정에 맞춰 개발한 것이므로 나이가 들면 내용의 단순성 때문에 외면하게 되지만, 이 분야에서 세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도 있다. 어디까지나 유아를 위한 장르이므로 이를 어른의 관점[8]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선진국에서는 기획 단계에서 유아들의 반응도 살핀다고 한다.
    • 사실, 역사적으로 청년 문화는 폄하되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심했는데, 서태지, 이현도를 통해 랩, 힙합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90년대에도 저러한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한창 활동 중인 20대 뮤지션들이 이들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것을 보면 당초 기성 세대의 예측은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힙합의 역사 자체가 40여 년이니 이제는 더 이상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 몇 년 전에 유행한 40대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란 류의 글이 대표적인 병크인데 여기엔 심지어 김광석 음악 듣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러한 예측이 빗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수십 년 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개인의 감수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나의 감수성이 이런 식으로 변했다 하여 다른 사람도 똑같은 경로로 그렇게 변하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반면, 평론가의 소신 때문에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 일반적으로 폄하되는 대상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경우. - 브랜드만 보고 편견을 가지는 경우도 많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런 소수 의견이 가치가 있다.
    • 일례로 와인의 경우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을 때 의외로 저가 와인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훌륭한 소믈리에라면 가격대를 막론하고 좋은 와인을 고를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야지, 무조건 고가 와인이나 특정 와이너리만 추천한다면 오히려 의도를 의심해 볼 만하다.
    • 사실, 허세, 스노비즘에 의해 억울하게 폄하당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카펜터스 같은 팝의 고전도 당대 락꼰대들은 너무 대중적이라며, 일부러 싫어하는 척을 했다고 한다.
    • 복면가왕에서 가창력을 재평가받은 아이돌 가수들도 그러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평론가가 주관과 객관이 균형을 이룬 평론이 가능한지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약 음식을 평론할 경우, 화려한 미사여구로만 현혹하려는 평론가라면, 음식의 재료, 조리 방식, 여러 맛의 조화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고, 추상적인 표현만 남발할 것이다. 반면 전문성이 있다면, '''이 음식은 고수가 들어가 있어 대중적인 맛이 아니다'''라고 실제 사실에 근거한 평을 내릴 것이다.[9] 그런데 식재료의 맛을 가려낼 능력이 없으면서 단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다고 '''화학 조미료 맛이다'''라고 평가했다면 객관적인 사실에 어긋난 것이다.[10]
클래식음악평론에 대한 필요성과 객관적인 잣대에 대한 분석기사가 실렸다. 타 예술영역에 비해 클래식음악은 평론이라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건 그만큼 클래식음악을 듣는 계층이 엷다는 방증이라고 한다. https://www.horse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822

3.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3.1. 국내



3.2. 해외



4.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대중문화에서는 매우 독설적이고 비판을 많이 해 주인공들의 어그로를 사는 경우가 많고 충돌이 잦다. "어디 네 놈이 뭘 만들지 기대되는구나"라고 말하면서 쓰레기라고 평가를 하려하지만 맨 마지막에 그들을 감동시키는 클리셰가 담겨있다. 츤데레라는 설도 있다.

4.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5. 관련 문서





[1] 위의 글은 픽사의 라따뚜이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까다로운 평론가 캐릭터인 "안톤 이고"의 독백으로# 과거에는 혹평으로 오귀스트 구스토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등 악랄하게 그려지기도 했으나, 평범한 라따뚜이 요리를 먹은 뒤 이에 감명하고, 작중 요리와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된 뒤의 내용. 음식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평론가의 위치 및 스스로의 선입견에 갇힐 수 있는 한계와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창작물의 입장, 그리고 이를 극복한 자신의 심정을 하나의 독백 속에 잘 표현해냈다.[2] 페미나 PC와 같은 사상 자체가 나쁜 건 아니고 그러한 주제 의식과 요소를 훌륭히 전달하는 작품들도 분명히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이 비판하는 작품들은 대개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들이 뜬금없이 등장하여 몰입을 방해하고, 극의 개연성을 파괴시키며,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특징을 가진다.[3] 출처는 마찬가지로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2007, P. 85>와 <로버트 맥키,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2002>[예시] 새로운 의미부여의 대표적인 예시로 이어령이 진달래꽃을 비평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참조[4] Bengt de Törne, "Sibelius: A Close-Up" (Houghton Mifflin, 1937), p. 27.출처[5] 흥행에 실패했다는게 아니다. 영화의 완성도와 흥행은 별개이고 이 영화 자체는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세계 최대의 영화 프랜차이즈'''였다'''는걸 감안해야한다. 이 작품은 전작과 비교해 기대 미만의 성적을 냈으며 이후 영화들의 흥행과 작품성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6] 깨진 복선을 말을 바꿔 쓸어담고, 시체가 행성만한 건물과 함께 폭발했던 전작최종보스를 아무 설명없이 꺼내고, 개연성을 살리기위해 조연의 희생을 희대의 도박으로 됐던 거라고 퉁쳤다.[7] 위의 두 작품은 작품의 개연성은 조금 희생하더라도 보는 사람에게 충격(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은 선사했으나 이 작품은 그냥 지루한 영화라는것.[8] 한 마디로 어른들이 뽀로로를 즐겨 보지 않는다 해서 뽀통령의 장기 집권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9] 대한민국과 같이 고수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국가들의 경우.[10] 사실 고수 같은 식재료는 비누나 화장품 맛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히려 화학 조미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맛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품위있는 그녀에 등장하는 김치 전문점에서는 화학 조미료를 몰래 썼으면서도 자연 레시피라고 속였다.[11] 지식의 기록자 내에서 각종 안건에 대한 비평을 제시하는 것이 본래의 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