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네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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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Necker'''
1732년 9월 30일 ~ 1804년 4월 9일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의 경제인이자 정치인. 프랑스 혁명 직전 루이 16세 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173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법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0대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은행에서 점원으로 경력을 시작한다. 1762년에는 아예 독립하여 개인 소유의 은행을 창립한 네케르는 대부업과 곡물 투기를 통하여 30대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다. 그리고 아내의 권유[1] 를 받고 정계에 투신할 것을 결정하여 동인도회사[2] 의 이사를 지내기도 한다.
1775년부터는 아예 본업인 금융업을 때려치고 국왕 루이 16세의 재정고문 겸 재정장관이 된다. 네케르가 재정장관에 올랐을 시기 이미 프랑스의 국고는 루이 14세와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바닥난 상황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프랑스는 '파산을 하더라도 영국에게 복수해야한다.'는 이상한(?) 발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엄청난 액수의 전비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었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민생을 고려하여 네케르는 국채를 발행하는 한편, 세금제도를 개혁하여 프랑스 인구비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빈농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시도하기도 한다.
네케르가 1781년에 간행한 재정보고서(Compte rendu au roi,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해외에 프랑스에 대한 대출을 장려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동시에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 국가의 재정 상태를 알려준다는 발상을 프랑스 최초로 실행에 옮긴 사례였다. 이 보고서는 당시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프랑스 혁명의 간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당 보고서에 적힌 자료는 프랑스 왕실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면서 지게 된 막대한 적자를 누락한 분식회계였다. 이러한 분식회계로도 파탄 직전인 왕실의 재정 상태를 숨기거나 극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네케르는 왕실 높으신 분들의 분노를 사서 재정장관직에서 사임한다.
그 후임자인 드 칼롱은 재정 개혁과 증세를 통해서 적자를 해소하려 하였고 루이 16세 역시 이에 적극 찬성하였으나, 증세의 대상이 될 귀족과 가톨릭교회 측의 극렬한 반발에 부딫혀 개혁안은 좌초되고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결국 드 칼롱이 추방된 뒤 네케르는 1788년에 다시 재정장관으로 임용된다. 네케르 또한 드 칼롱의 재정 개혁안을 실행하려 하였으나 마찬가지 이유로 성과를 내지 못한다.
네케르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신분간 의석수 배정 문제로 인해 삼부회는 결렬됐고 평민들은 독자적인 국민의회를 설립해버린다. 국민의회 설립에 대한 책임은 네케르에게 모두 전가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1789년 7월 11일에 또 재정장관에서 해임됐고, 이는 평민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었다. 결국 평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정부는 평민들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7월 16일에 네케르를 다시 복직시킨다.
하지만 네케르 역시 당시의 절망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진 데다가, 혁명 세력과의 의견충돌도 빈번했던 탓에 1790년 최종적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아예 은퇴를 해버린다.
은퇴 후에는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1804년에 사망했다.
'''Jacques Necker'''
1732년 9월 30일 ~ 1804년 4월 9일
1. 개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의 경제인이자 정치인. 프랑스 혁명 직전 루이 16세 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73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법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0대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은행에서 점원으로 경력을 시작한다. 1762년에는 아예 독립하여 개인 소유의 은행을 창립한 네케르는 대부업과 곡물 투기를 통하여 30대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다. 그리고 아내의 권유[1] 를 받고 정계에 투신할 것을 결정하여 동인도회사[2] 의 이사를 지내기도 한다.
1775년부터는 아예 본업인 금융업을 때려치고 국왕 루이 16세의 재정고문 겸 재정장관이 된다. 네케르가 재정장관에 올랐을 시기 이미 프랑스의 국고는 루이 14세와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바닥난 상황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프랑스는 '파산을 하더라도 영국에게 복수해야한다.'는 이상한(?) 발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엄청난 액수의 전비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었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민생을 고려하여 네케르는 국채를 발행하는 한편, 세금제도를 개혁하여 프랑스 인구비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빈농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시도하기도 한다.
네케르가 1781년에 간행한 재정보고서(Compte rendu au roi,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해외에 프랑스에 대한 대출을 장려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동시에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 국가의 재정 상태를 알려준다는 발상을 프랑스 최초로 실행에 옮긴 사례였다. 이 보고서는 당시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프랑스 혁명의 간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당 보고서에 적힌 자료는 프랑스 왕실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면서 지게 된 막대한 적자를 누락한 분식회계였다. 이러한 분식회계로도 파탄 직전인 왕실의 재정 상태를 숨기거나 극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네케르는 왕실 높으신 분들의 분노를 사서 재정장관직에서 사임한다.
그 후임자인 드 칼롱은 재정 개혁과 증세를 통해서 적자를 해소하려 하였고 루이 16세 역시 이에 적극 찬성하였으나, 증세의 대상이 될 귀족과 가톨릭교회 측의 극렬한 반발에 부딫혀 개혁안은 좌초되고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결국 드 칼롱이 추방된 뒤 네케르는 1788년에 다시 재정장관으로 임용된다. 네케르 또한 드 칼롱의 재정 개혁안을 실행하려 하였으나 마찬가지 이유로 성과를 내지 못한다.
네케르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신분간 의석수 배정 문제로 인해 삼부회는 결렬됐고 평민들은 독자적인 국민의회를 설립해버린다. 국민의회 설립에 대한 책임은 네케르에게 모두 전가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1789년 7월 11일에 또 재정장관에서 해임됐고, 이는 평민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었다. 결국 평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정부는 평민들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7월 16일에 네케르를 다시 복직시킨다.
하지만 네케르 역시 당시의 절망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진 데다가, 혁명 세력과의 의견충돌도 빈번했던 탓에 1790년 최종적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아예 은퇴를 해버린다.
은퇴 후에는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1804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