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Prise de la Bastille Storming of the Bastille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1789, 종이에 수채''.
1. 개요
2. 논란
3. 매체에서의 등장
4. 기타


1. 개요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
당시 파리 근교에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국경지대에서 진주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는 군대가 파리로 진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7월 11일, 루이 16세는 재정총감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고 이 소식에 파리는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각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쳤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고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만여명의 시민들은 바스티유로 쳐들어갔고 바스티유 수비군은 15문의 대포를 발포하여 시민 약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제대로 무장한 국민군의 증원과 시민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되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이후 혁명정부는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철거했고 오늘날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프랑스는 매년 7월 14일을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념하여 군사 퍼레이드, 각종 축제나 콘서트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기인 1989년에는 '''200주년''' 기념일(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 (불어)참조)이어서 더욱 더 성대하게 치렀다. 때마침 이 해 G7 정상회의 의장국 순번이 프랑스였던 관계로 루브르 박물관베르사유 궁전에서 정상회담이 열렸고 14일 밤, 파리에서 대규모로 열린 200주년 기념 행사에 당시 해당국 정상들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마거릿 대처, 헬무트 콜 등을 초대하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피라미드와 신도시 라 데팡스 지역에 위치한 신 개선문(La Grande Arche)을 이 날에 맞춰 완공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94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더욱 파격적인 볼거리를 선보였다. '''독일군 부대를 초청해 파리에서 행진을 하게 한 것!''' 이는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50년 만에 독일군이 파리에서 행하는 행진이었다. 이 당시에도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역시 프랑스 국내에서는 엄청난 논란이 일었으나[1] 미테랑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행사를 강행했다. 프랑스 최고의 국가 기념일에 행한 독일군의 행진은, 독일과 프랑스가 역사의 앙금을 완전히 털어내고 협력 관계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하는 모습 중 하나로 남았다. 1994년 당시 독일군의 모습을 담은 뉴스 영상
현재 바스티유 감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의 소속 오페라하우스 중 하나인[2]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1989년 혁명 200주년 기념일 전날인 7월 13일 개관하였다.

2. 논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 대한 이의제기의 핵심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없었다'''는 것이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에 저장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 간 것은 맞지만, 바스티유 감옥의 군대가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저항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은데 바스티유 감옥 탈취에 참가했던 숄라의 그림에서는 시민들의 시신이 그려져 있는데 그럼 숄라가 과장해서 그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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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고 파리 시민들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다. 바스티유는 원래 요새였지만 이후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감옥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파리 북부에 새로 요새가 건설되면서 요새로서의 기능은 거의 사라진 뒤였다. 다만 파리 시민들에게는 요새였다는 이야기와 정치범들이 잡힌다는 이야기만 남아있었을 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바스티유가 수많은 정치범들을 가두고 있지도 않았으며 바스티유 감옥 안의 죄수들은 사복도 입고 하인을 부리고 애완동물을 기르는 등 복지 수준도 심각하게(?) 높았다고 한다.[3] 참고로 습격 당시 수용된 죄수 중에는 '''자원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이런 과도하게 좋은 시설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는 재정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던 시기에는 그냥 폐기하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워낙 수감된 이들이 범털이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습격할 당시 바스티유에는 정치범들은 없었고 그저 7명의 죄수가 있었는데 이중 4명은 사기범이었고 2명은 정신질환자, 1명은 근친상간[4]이었다고 한다. 이 잡범 구성에는 언급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대동소이하다는 것이...결국 일부는 소란을 틈타서 사라졌고, 일부는 이후 혁명정부에서 다시 다른 감옥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만 바스티유 감옥이 그저 높으신 분들의 휴양지에 불과했다는 주장에는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파리 경찰국의 직원이었던 조세프 데므리가 당시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필가 500여명의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정리한 기록부에 따르면 그 중 10%에 달하는 사람들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으며 수감 이유 역시 정치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문필가 중 한 사람이었던 샤를 드 피외에 대한 기록에서 "드 피외는 카페에서 왕과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공격하는 시를 유포시킨 이유로 방금 체포되어 바스티유로 이송되었다." 데므리의 기록이 인명부가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 없이 문필활동을 벌였던 모든 인물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수치는 결코 적지 않다. 비록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바스티유 감옥이 마치 오늘날의 서대문 형무소처럼 한때 정치범 수용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구체제의 압제를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른 사소한 문제는 바스티유 수비대는 저항할 능력이 있기는 했지만 하루분의 식량 밖에 없었던 탓에 오래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바스티유 수비대장인 드 로네이 사령관은 시민대표와 협상한 끝에 무기와 탄약을 내주고 수비대가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지켜지지 못했고 드 로네이 사령관과 3명의 병사들은 파리 시청에서 처형당했고, 시민들은 이들의 목을 창에 꽂아 파리 시내를 행진했다.
이런 점이 밝혀지거나 논란이 된 것은 혁명 과정에서 연금 대상자 선정 등과 관련해서 증거를 찾다보니 하나 둘 씩 튀어나왔다. 문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자체가 신화가 되고, 그 날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 된 판에 신화를 붕괴시킬 수가 없어서 그대로 가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북전쟁로버트 리 등의 '고매한 남부 장군 신화'와 유사한 이야기다.

3. 매체에서의 등장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의 최후반부 이벤트로 다뤄진다.
베르나르 샤틀레가 지휘하는 파리 시민군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하지만 튼튼한 성벽과 대포 등으로 수비대가 저항을 하자 공격이 막힌다. 12문의 대포가 있기는 했지만 시민군들 중에는 대포를 다뤄본 사람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상황에서, 앙드레 그랑디에의 죽음이 불러온 슬픔을 떨쳐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가 이끄는 위병대가 대포를 운용해 수비군의 포대를 타격하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 로네이의 지시 하에 수비군이 포격을 지휘하던 오스칼에게 집중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은 오스칼은 후방의 골목길로 옮겨졌으나 결국 알랭, 로잘리, 베르나르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숨을 거두게 된다. 오스칼의 죽음으로 분기탱천한 알랭과 위병대의 맹렬한 포격과, 시민군의 진격으로 바스티유가 함락되며 전투가 마무리된다. 주인공인 오스칼이 죽게 되는 만큼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사실상 최후반부나 다름없는 사건으로, 이후에는 알랭과 베르나르, 로잘리의 입을 빌려 바스티유 함락 이후~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서 끝이 난다. 제갈량 사후 급 마무리 되는 삼국지 관련 매체들의 이야기와 왠지 비슷한 느낌.

18세기 말 혁명기 프랑스가 배경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초반에 다루어진다.
주인공 아르노 빅토르 도리안이 누명을 쓰고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먼저 수감되어있던 암살자 피에르 벨릭을 만나게 된다. 그와 만나게 됨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아버지 또한 암살자였음을 알게 된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르노는 벨릭한테 격투와 검술 등 교육을 받다가 바스티유 감옥 습격 때 벨릭을 따라 탈출하게 된다.
작품 외적으론 유니티가 대차게 욕먹은 수많은 이유중 하나이다. 위 트레일러에선 어쌔신들이 시민 봉기를 일으키고 도와준 것처럼 묘사 해놓고선, 정작 인게임에선 이미 감옥에 잡혀 있고 난리 덕에 탈출한다는 스토리를 박아놓아(...) 시작부터 플레이어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워낙에 압도적인 퀄리티와 간지폭풍을 선사했던 트레일러인지라 더더욱...

4. 기타


밴드 바스틸은 이 감옥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1] 이 당시의 일화로. 미테랑의 전임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행사를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TV 등에 출연해 미테랑과 독일 측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런데 데스탱 본인도 나중에 치명적인 꼬투리를 잡혔다. '''데스탱이 집권한 시절에도 독일군을 초청한 전례가 있었다.''' 데스탱 정권 때인 1978년 독일군 군악대가 프랑스에 들어와 퍼레이드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데스탱은 웃음거리가 되었다.[2] 다른 하나는 가르니에 극장[3] 대표적인 예로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도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감옥 습격 바로 전날에 다른 감옥으로 이송됨.), 그 당시 사드 후작의 감방에는 엄청난 숫자의 장서와 자위도구(자신이 만든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반입한 것들) 및 각종 가구들이 있었다. 거기다 거기서 유명한 소돔의 120일이라는 작품까지 썼으니...이건 뭐 감옥도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7월 2일, 사드 후작이 들끓기 시작한 감옥 밖의 군중을 향해 "시민 여러분, 간수들이 우리 죄수들을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감옥 습격을 선동하는 고함을 질렀고, 그 탓에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를 다룬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이 대사가 실제 등장한다(...).[4] 다름아닌 사드 후작(...)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