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

 

1. 개요


1. 개요



わんぱく王子の大蛇退治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1963년 3월 24일 개봉한 극장판 영화 애니메이션. 감독 세리카와 유고(芹川有吾). 연출 보조 타카하타 이사오, 야부키 키미오(矢吹公郎). 작화감독 모리 야스지.
스사노오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러 가는 일본 신화를 동화처럼 각색해서 만들었다.
제작비 7000만 엔. 총 스태프 180 명. 작화 매수 25만 장 [1], 그림물감 1 톤이 사용된 희대의 애니메이션. 거의 24 풀프레임으로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일본의 인건비가 싸서 이 정도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나올 수 없는 작품.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달한 작품으로 꼽힌다. 지금 봐도 우수한 작품이다.
당시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은 대충 애니메이터가 그린 걸 모아서 짜맞추면 된다는 주먹구구 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세리카와 유고는 그러면 안 된다면서 자신이 직접 작품 전체의 컨셉과 질을 관리하는 감독 일을 했고 사실상 일본 애니메이션의 감독 시스템이 이 작품부터 자리잡게 된다. [2] 또한 작화 분량이 많아 전부 관리할 순 없었으므로 세리카와가 콘티를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와 야부키 키미오가 현장을 지휘하며 연출 보조를 하는 시스템도 여기서 정립되었다.
그리고 원화작화감독이 수정해서 그림체와 분위기를 통일시킨다는 작화감독 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작품으로 [3]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 모리 야스지가 작화감독을 맡았다. 오오츠카 야스오가 원화를 그리고 츠키오카 사다오(月岡貞夫)가 동화를 그려넣은 클라이막스 전투신은 원화 300컷, 동화 1만장이 사용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면이다. 오오츠카 야스오는 자신의 인생 최고의 작화로 이 장면을 꼽으며 다시는 그릴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을 확립한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 이후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나온 1963년은 철완 아톰, 철인 28호도 제작되어 일본 애니메이션 사의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되었다.
여성 애니메이터 오쿠야마 레이코가 원화로 참여했으며 오쿠야마 레이코를 모델로 한 드라마 나츠조라에 언급되기도 한다. 저작권 문제로 이름은 살짝 변경. 카타부치 스나오는 이 작품을 보고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왜색이 짙어서 한국엔 한 번도 수입 및 방영되지 않아 인지도가 낮다.
2020년 2월 4K 화질로 복원되어 블루레이 박스가 발매되었다.

[1] 비교 대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모노노케 히메조차도 14만 장을 썼는데 이것도 엄청나게 많이 쓴 것이다. 25만 장의 그림이 들어간 애니메이션을 지금 돈으로 만든다면 70억 엔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할 것이다.[2] 아주 최초는 아니고 그 전에도 총괄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방식이 확립되기 전이라 그때그때 하는 일이 달랐다.[3] 이 작품에선 원화감독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