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야마 레이코

 


奥山玲子
일본애니메이터. 생년월일은 1936년 10월 26일 ~ 2007년 5월 6일. (향년 70세) 미야기 현 출신.
일본 최초로 작화감독의 자리에 오른 여성 애니메이터이다.
남편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슈퍼 마리오를 디자인한 코타베 요이치.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잉꼬부부였다고 한다.
동화 책같은 작화가 특징으로 주로 동화 책 원작 애니메이션이나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담당했다.
아버지는 교사가 되라고 했지만 반항기라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림에 흥미가 있어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토에이 동화를 '''동화책을 만드는 회사'''로 잘못 알고 [1] 1957년에 임시채용으로 입사했다. 당시 토에이에서는 여성 직원은 임시직으로 고용해서 쓰다 버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정직원과 임시직원 사이에는 임금차별이 심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 낮은 급료로 잔업을 하며 일해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직원은 동화만 그리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은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었고, 직장이란 남편감을 찾는 곳 또는 결혼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일하는 곳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토에이 회사 입장에서도 결혼하면 그만 둘 것이 뻔하고 여성은 기술이 필요없는 단순노동인 시아게(채색)팀에서 일을 시켰기 때문에 굳이 정직원으로 뽑지 않았다고 한다. 오쿠야마 레이코는 이런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오기로라도 토에이에서 계속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원화에서 작화감독까지 승격되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나 토에이 측에서는 그녀가 출산 휴가를 끝내고 돌아오자 아이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고 오쿠야마 레이코가 이를 거절하자 남편을 트집을 잡아서 해고를 시키고 사내 이지메를 하기에 이른다. 오쿠야마는 이에 반발하며 사내에서 노동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여성 애니메이터의 대우를 개선하고 부당 해고된 직원들을 복직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오쿠야마는 목적을 다 달성하고 할 일을 끝냈다며 토에이를 퇴사한다.
토에이를 퇴사하기 전, 1973년 무시 프로덕션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슬픔의 벨라돈나>에 가명으로 참여한다.
이후로는 주로 남편을 도우며 애니메이터 활동을 하고 동화책, 동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부터 패션 센스가 매우 좋았다고하며[2] 가난한 후배 애니메이터 들에게 비싼 밥을 대접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로선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은퇴하는 게 일반적인 사회 인식이었는데 끝까지 일을 하겠다고 했고 남편 코타베도 그 의지를 알기 때문에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2019년 남편 코타베 요이치가 시대 고증 자문으로 참여한 드라마 나츠조라의 주인공의 모델이 된다. 남편이 주인공의 이미지를 오쿠야마 레이코로 잡은 것이다. 대신 드라마의 내용은 대부분 픽션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매우 히트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애니메이터이자 노동 운동가로 재조명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애니메이터 츠노다 코이치와 친해서 공동작업한 적이 많았다.

1. 대표작



[1] 일본어로도 저 두 단어는 한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다. 심지어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서 잘못 읽을 가능성이 크다.[2] 토에이 동화의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녀가 출근할 때 입은 옷을 스케치한 그림들이 남아있다. 매일 옷이 바뀌니까 도대체 옷을 몇 벌이나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날 입고 온 옷을 그림으로 스케치해 봤는데, 한달 정도 후에야 같은 옷을 다른 옷과 겹쳐입으면서 돌려입는 것을 알고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오쿠야마는 처음엔 무슨 스토킹인가 생각했으나 의도를 알고 허락했다고 한다. 이 노트는 남아있어 그의 저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드라마 나츠조라에도 나오는 에피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