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왕후(꽃들의 전쟁)
1. 개요
JTBC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등장인물로 인조의 계비.
실질적으로 봉림대군과 함께 이 드라마의 최종 승리자로,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경선군, 경완군, 귀인 조씨, 인조 등 드라마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이 죽어나갔지만 수많은 위험을 뚫고 결국 왕대비에 자리에 올라 자신을 지켜냈다.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는 대부분의 사극에서 희빈 장씨가 나오는 숙종 시대의 대왕대비일 때의 늙은 모습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최초로 젊었을 때의 장렬왕후가 나왔다. 숙종 대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그저 조용한 뒷방 늙은이로 나오지만, 그녀도 왕비의 자리에 있을 때는 어느 왕실의 여인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 작중 행적
조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인조의 새 중전을 뽑을 때, 아버지 조창원은 딸에게 "무조건 밉보여 왕비 후보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했으나, 장렬왕후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본인 스스로 왕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김 상궁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대답도 어른스럽게 하고,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 결국 왕비로 간택된다.
이 때문인지 이내 인조의 후궁 조얌전을 적으로 인지하게 되고, 청나라에서 돌아온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와 손을 잡게 된다. 그러나 장남 소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강빈이 자신보다 우위에 서게 되자, 강빈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며 강빈을 증오하게 된다. 결국 소현세자 사후 차남 봉림대군과 손을 잡아,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이 세자위를 계승하도록 돕는다. 강빈이 모함을 받아 내쳐지고 원손 형제가 위기에 몰릴 때도 도와주지 않는 등 모진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인조가 죽기 전 봉림대군에게 "얌전을 죽이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봉림대군이 이를 받들려하자, "나의 도움 없이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며 봉림대군과 기싸움을 벌인다.
조얌전이 죽게 되었을 때 "조얌전은 곱게 죽어서는 안 된다"며 궁 밖으로 내몰아 백성들에게 맞아 죽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죽음을 전해듣고 일말의 동정심을 보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초반에는 전태수와 함께 소울리스한 연기를 보여 양대 연기구멍이라며 까였지만, 후반부가 되자 실력이 향상하여 안정된 사극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대궐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미 얌전이 인조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 이미 인조가 신하들의 등쌀에 떠밀려 나이 어린 중전을 맞게 된 것에 대하여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기도 했다. 얼마 후 "후궁들의 품계를 높여달라"고 인조에게 요청했지만 인조는 앞에서는 "알았다"고 하면서 뒤로는 "중전이 나를 가르치려 든다"면서 불쾌한 내색을 한다.
조얌전은 겉으로는 중전을 위하는 척을 하면서, 뒤로는 "중전이 나와 숙원 이씨를 독살하려고 해서, 나의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모략하였다. 그래서 중전은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경덕궁으로 쫒겨나간다. 이 때문인지 얌전을 적으로 인지하게 되었고, 궁중의 이들을 경계하여 얌전이 직접 봐서 올리는 수라상마저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수라상을 올리자 안심하고 수라를 드는 안쓰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얼마 후 누명이 풀려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고, 일시 귀국한 강빈과 담소를 나누며 친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와 첫 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인조 앞에서 춤을 추면서 인조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인조는 슬슬 중전에게 마음이 옮겨가 중궁전을 찾는 날이 많아지지만, 중전은 '중궁전 드나들기를 나인 처소 드나들 듯 하셔서야 체면이...'라며 인조와 합방을 거부하며 다시 인조와의 관계는 흐지부지된다. 중전 역시 인목왕후[1] 의 일을 떠올리며 인조와 아이를 갖지 않길 바랐다.
숭선군이 중전의 품에서 크고 있었는데, 숭선군을 되찾고 싶어진 얌전이 대뜸 중궁전 뜰에서 석고대죄를 올렸고, 그동안 얌전에게 당한 것을 알고 있던 중전은 일부러 석고대죄를 풀지 않아 얌전이 결국 혼절하게 되었다.[2] 이 때, 얌전을 구하러 온 인조에게 꾸중을 듣고, 빈궁과 서찰을 주고 받은 것이 들통나 인조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한다. 이 사단으로 중전은 기절하여 몸져눕는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부부가 아예 귀국을 하게 되자 소현세자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를 가지고, 소현세자 부부와 친해지면서 강빈과 손을 잡게 된다. 강빈의 친정아버지 장례 문제로 강빈과 인조가 대립하자, 중전은 강빈을 꾸짖으며 인조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현숙한 모습을 보인다.
강빈은 중전을 위한 친잠례를 열어주고[3] 중전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머지않아 강빈의 속내를 알게되자 분개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소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강빈이 자신보다 우위에 서게 되자 강빈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며 강빈을 증오하게 된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더욱 멀어지자, 소현세자를 비호하려 석고대죄를 하다가 결국 인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4] 두 부자 간의 사이가 너무 멀어지자 결국 중전마저도 포기하고 인조의 편에 서게 된다.
폐출된 이숙원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통하면서 얌전을 단죄할 기회를 노리나, 얌전이 이숙원을 죽여버리면서 그 일은 요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숙원이 남긴 서신을 근거로 얌전을 대전에서 끌어내어 묶어놓고 문초할 수 있었지만 얌전이 발작을 하며 쓰러지고, 인조가 대노하면서 그 기회는 완전히 날아가고, 도리어 폐출 위기에 놓이게 된다.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가 이틀만에 탈상한 일을 칭찬하며 인조의 눈에 들려고 애쓰고, 강빈을 경계하여 봉림대군을 차기 왕위 후보로 내세운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사인을 정확히 밝혀내라며 인조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얌전의 임신 기간 사이에 인조에게서 얌전을 떼어놓으려 새 후궁 후보를 들이고, 후궁들에게서 "피검사를 하면 숭선군의 친자 여부를 밝힐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궁전에서 숭선군의 피검사를 하는데, 인조에게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았던 상선이 얌전을 도우면서 중전의 처지는 곤란해진다. 게다가 얌전이 중궁전에서 나오다가 낙상하여 유산을 하게 되자, 그 책임을 물어 경덕궁으로 다시 쫒겨나 한 발짝도 못 나오는 처지가 된다.
떠나면서 봉림대군에게 경선군과 강빈을 꼭 지켜달라고 하지만, 결국 경덕궁에 가있는 사이에 경선군과 민회빈 강씨가 차례로 죽음을 맞게 되고, 민회빈 강씨와는 마지막에 만나서 해후를 한다.
인조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자, 얌전은 인조를 창경궁의 외딴 전각에 감금하고, 인조의 살아생전에 중전을 폐위하고 자신이 대비가 되려는 계획을 실행한다. 경덕궁의 상궁내인들은 자기 사람으로 채워 중전이 물 한 모금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도록 만들고, 중궁전 제조상궁에게 소화제를 내밀며 "이게 독약인데 중전의 수라에 타서 중전을 독살하라."고 한다. 이 작전이 먹혀 중궁전 제조상궁이 중전에게 "조귀인이 독약을 올렸다"고 말하고, 중전은 이틈에 얌전을 없애려고 생일에 얌전을 불러 독살 혐의를 묻는다.
얌전은 독약이 아니고 소화제를 준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순식간의 중전의 모함으로 몰아갔고, 결국 폐위의 위기에 다시 몰리게 된다. 이 명분으로 얌전은 멋대로 폐위조서를 반포하려고 드는데, 신하들의 반대에 거세게 부딫힌다.
봉림대군의 계략에 얌전이 걸려들면서 인조가 임종 전에 대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대전 앞에서 인조를 내놓으라고 발악하다가 끌려나가는 얌전과 마주치는데, 이때 뺨을 때리면서 "이건 빈궁의 몫이다. 내 몫은 아껴놨다가 천천히 갚을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거라."라면서 처절한 보복을 예고한다.
중전은 봉림대군에게 "지금 당장 숭선군과 조귀인을 죽이라"고 하는데, 봉림대군은 "그럴 수 없다"고 맞선다. 중전은 '내 허락 없이는 세자도 보위에 오를 수 없다.'고 맏받아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그 사이 인조가 승하하고, 대비가 되자 바로 조귀인의 첩지를 거둔다. 그러나 대비전으로 옮겨가지 않고 경덕궁에 살거라고 떼를 쓰면서 봉림대군의 즉위는 늦어진다.
하는 수 없이 창덕궁의 대비전으로 옮겨왔지만 얌전의 처리를 두고 효종과는 날로 대립했다. 인조의 유지를 받들어 얌전을 살려주려는 효종이었지만, 결국 얌전이 효종을 저주하는 일을 저질러 효종으로서도 얌전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얌전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대비 조씨는 '이런 년은 사약 가지고는 안 된다.'면서 '소현세자를 흠모하는 백성들에게 내줘야 한다. 그래야 부왕의 오명을 씻을 수 있다.'며 효종을 압박한다.
얌전이 결국 백성들에게 맞아죽게되자, 늦은 저녁 대비전에 홀로 앉아 '그리 될 것을 어찌 그렇게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라며 무거운 눈물을 흘렸다.
3. 평가
그냥 보면 후궁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불쌍한 중전이지만, 실상을 뜯고보면 부정적인 모습이 많다. 물론, 엄혹한 궁중생활에 있어서 나 하나 챙기기도 힘들겠지만 한 나라의 국모로서는 그릇이 부족한 느낌이다.
소현세자 부부와 인조의 사이가 멀어지자 세자 부부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가 이틀만에 탈상을 하자 잘 하셨다며 인조의 심기를 긁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였다. 다만, 봉림대군과 짜고 조귀인의 품에서 인조를 빼내어 소현세자의 사인을 밝히라고 인조에게 압박을 넣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경선군이 보위에 오르면 왕대비가 된 민회빈 강씨의 기세에 눌려 지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차차 민회빈 강씨와는 거리를 두었고, 잠시 얌전과 손을 잡기도 한다. 차기 왕위 후보로 경선군이 아닌 봉림대군을 지지함으로서 경선군과 민회빈 강씨의 입지가 더욱 불안해졌다.[5] 결국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경선군은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죽게 되었다. 이 때, 중전의 아버지가 중전에게 "이리 하시면 훗날 마마의 처지가 매우 외롭게 되실겁니다."라고 조언하였는데 실제로 권력에서 멀어져 허수아비 대왕대비 신세로 지내다가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이것은 민회빈 강씨의 권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뿐이지 민회빈 강씨에게 결코 나쁜 마음은 없었다고 봐야한다. 경선군과 민회빈 강씨가 권력에서 한참 멀어져 버리자 더 이상 경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회빈 강씨가 사가로 쫒겨나고 궁에 남은 경선군, 경완군, 경안군을 중궁전에서 지내게 하며 보호하려 했다. 얌전의 모략으로 경덕궁으로 폐출되면서도 봉림대군에게 강빈과 경선군을 지켜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결국 두 모자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의 지혜롭고 기품 있던 중전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져갔다. 봉림대군은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자고 했지만 그마저도 중전은 봉림대군이 수수방관만 한다면서 괘씸해 하고 결국 성급하게 얌전을 불러 자신에 대한 독살 모의 혐의를 물으려다가 되려 역풍을 맞아 하마터면 인조의 죽음을 앞두고 그 전에 대비가 되려는 얌전의 계획이 그대로 실행될 뻔하였다. 그 뿐 아니라 봉림대군이 차차 실행하려는 계획에 오히려 방해만 되는 모습을 보여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고구마를 선사했다.
연기력 문제에 있어서는 고원희가 20살의 신인이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전태수와 함께 소울리스한 연기를 보여 양대 연기구멍이라며 까였지만 중반부로 가면서 차차 안정되더니, '''후반부에는 성량이 폭발하는 그야말로 일취월장의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6]
[1] 인목왕후 역시 어린 나이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아 화를 당했기 때문.[2] 원래는 기절하는 것도 연기로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기력이 다해서 기절하게 되었다고 후에 얌전이 말한다.[3] 사실 속내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다.[4] 이전에 얌전이 와서 "중전께서 세자를 구해주셔야 한다"고 이간질을 했고, 상궁은 "김소용의 모략이니 가만 계시라"고 했으나, 중전은 "세자를 구할 사람이 나 뿐이니 어쩌겠느냐"며 인조의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리했던 것이다.[5] 중전의 지지가 무슨 힘이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겠지만, 중전은 차기 왕대비로서, 임금이 승하하면 왕위 결정권을 가진다. 즉, 강빈과 경선군에게는 그 누구보다 필요했던 인물이 중전이었다.[6] 드라마 종영 후 "오히려 초반의 어색한 모습이, 궁에 입궐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왕비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재평가가 있었다.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50부까지 진행되는 동안 궁궐에서 풍파를 견디며 성장하는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모습이 공교롭게도 배우의 연기력 향상과 딱 맞아떨어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