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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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莊烈王后 趙氏'''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새 중전).
본관은 양주. 초년엔 후궁 소용 조씨[2] 에게 밀려 숨죽여 살고, 중년엔 본의 아니게 예송논쟁의 요인이 되고, 말년엔 기센 손자며느리 명성왕후[3] 김씨에게 치이는 등 고생[4] 많은 삶을 산 여인.
권력 기반과 소생이 없는 왕실 웃어른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나마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죽은 뒤엔 내명부에선 왕실 큰어른(대왕대비)[5] 으로서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결국 1688년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렬왕후의 죽음 이후 숙종은 내명부 일에 아예 대놓고 간섭하고 이는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서인이 다수 숙청되는 '''기사환국'''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 왕실에서 '조 대비'라고 불리는 사람이 2명 있는데 이 중 한 사람이 바로 장렬왕후 조씨이다. 다른 조 대비는 신정왕후 조씨.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조 대비'라고 하면 이쪽보다는 후대의 신정왕후를 가리킨다. 아무래도 장렬왕후는 대비로써의 존재감이 희미했기도 하고, 신정왕후가 왕비 이후로 왕대비-대왕대비 테크를 타는 등 대비로써의 면모를 훨씬 많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6] 그래서 장렬왕후는 조 대비라는 별칭 외에도 대비로서의 공식명칭인 자의대비로도 많이 불리는 편이다. 여담으로 두 조 대비 모두 4대의 왕을 모시거나 왕실의 어른으로 있었다.[7] 게다가 두 조씨 대비의 호적상 손자며느리와 며느리의 시호가 '명성'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며[8] 공교롭게도 명성왕후나 명성황후나 기가 세기로는 막상막하였다. 다만 자신도 나름 못지 않은 여걸이었던 신정왕후에 비해 장렬왕후의 삶은 상당히 안습하다.
전란(戰亂)이 끝난 직후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왕의 계비가 됐다는 점에서 인목왕후와 흡사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의 좋은 본보기이나, 인목왕후는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은 반면 장렬왕후는 슬하에 소생이 없어 다른 면도 있다.
2. 생애
2.1. 왕비 시절, 인조의 계비
인열왕후 사후, 1638년(인조 16) 음력 12월 3일 14세의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정식 책봉되었다. 인조는 43세였으니, 인조와 무려 29살 차이였다.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더 어렸고, 손자인 현종과도 겨우 16살 차이였다.
장렬왕후가 새 중전(계비)으로 입궁했을 때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인 소용 조씨가 악녀같이 모략을 일삼으며 궁중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조 소용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인조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고, 왕비 자리는 그냥 허울 뿐이었다. 왕비 시절 소생이 없고 권력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이후 그녀가 대비 - 대왕대비 자리에 올랐을 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2.2. 왕대비 시절
인조가 승하하고 자연스럽게 대비가 되었다. '''20대 중반'''에 왕실의 할머니가 된 것을 보면, 인조가 얼마나 어린 사람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거의 궁중의 안방마님을 차지하던 소용 조씨가 정작 몰락한 것은, 장렬왕후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장렬왕후가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었다. 조씨가 며느리인 신씨(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내)를 박대하고 여종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자 신씨가 자신의 이모인 장렬왕후에게 하소연하였다. 이에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가 저지른 모든 짓(만행)들을 자복해버린 것.
그러나 장렬왕후가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그녀의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조에게는 이미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등 장성한 적자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왕후를 보면 알겠지만 그 자리가 더욱 위험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붕당(後.일당독재화 현상을 부추기는 꼴을 야기하는) 대결을 더 격화시킨 점은 흡사하다.
그래도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에게 어머니 소리를 듣고, 효도를 받으며 비교적 나은 생활을 했으나...
생애 6번이나 '상복(喪服)'을 입었다. 남편(인조), 아들(효종), 며느리(효종비 인선왕후), 손자(현종), 손자며느리(현종비 명성왕후), 증손자며느리(숙종비 인경왕후)(...) 상복을 입은 일이 많다 보니, 현종 시절에는 효종과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논란이 인 적도 있는데, 이것이 그 조선 역사에서 정말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2.3. 대왕대비 시절
세월이 지나, 혈통상으로 증손자(인조의 증손자)[9] 가 되는 숙종 이순이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 마침내 대왕대비가 된다.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 조씨가 한 궁녀를 총애하게 되어 처소로 들였는데 이 궁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이다. 장씨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 장씨의 행동이 매우 방자한데다 출신도 미천하기까지 해[10] 남인 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대비 김씨(명성왕후)가 곱게 보지 않았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담대해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못 뒀다(...)는 말이 있고, 정사(政事)에 관여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를 거론하며 명성왕후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현종비 명성왕후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 장씨를 가차없이 내쫓아버렸다. 21세기에 봐도 무례한 행동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 시대에 그랬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궁녀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왕후 사후의 일이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평생 자식도 없이 정쟁과 궁중의 암투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고, 젊은 시절 앓은 풍증(風症, 후유증)으로 거동도 불편했던 그녀는, 1688년 9월 20일 창경궁 내반원(來般院)에서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내반원은 내시들의 처소였다. 조선 왕실의 최고 어른(대왕대비)인 왕의 '''증조모'''[11] 인 대왕대비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이유는 전혀 없다. 즉 이를 통해, 아마 그녀가 내반원에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러한 일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능은 동구릉 안에 있는 휘릉(徽陵)[12][13] 이다.
3. 여담
효종 항목에도 있는 '숙명신한첩'처럼 효종의 딸이자 의붓 손녀들인 숙명공주나 숙휘공주와 한글로 편지를 교환한 자료가 남아 있는데, 자의대비의 편지를 보면 예법 상으로 자의대비와 두 공주는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이지만, 실제로는 효종보다도 5살이 어리기 때문에 딸뻘인[14] 두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라체가 아니라 하게체를 써서 편지를 쓰고 있다. 이 역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미묘한 입지를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장렬왕후의 친정언니가 신익전이라는 인물과 결혼하는데 신익전의 형의 부인, 즉 형수가 바로 인조의 고모인 정숙옹주이다. 장렬왕후 언니와는 동서지간인데 장렬왕후에게 정숙옹주는 시고모인 동시에 사돈이기도 한 셈이다.
신익전의 질서(조카딸 사위)인 강문두는 법적 며느리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이다. 물론 장렬왕후와는 직접적으로 엮이는 호칭은 없지만 이미 친정쪽에서 인척관계에 있었다는데에 의의가 있다.
4. 대중 매체에서
주로 사극에서는 장희빈을 다루는 사극에서 장희빈의 조력자로서 노년의 장렬왕후가 등장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2013년에 JTBC에서 방송한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소용 조씨와 대립하는 젊은 시절의 장렬왕후(배우 고원희)를 볼 수 있다. 장희빈 드라마를 보다가 이걸 보면 장렬왕후에 대한 이미지가 확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배우는 아시아나항공 제8대 모델인 고원희.[15]
사실 1987년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 - 남한산성》 마지막회에서 어린 나이에 인조와 혼례를 올리는 모습으로 아주 잠깐 등장하나 대사도 없고 비중도 공기라 사람들이 잘 기억을 못한다. 이 때 장렬왕후 역을 맡은 배우는 전미선. 후속작인 《인현왕후》에서는 정혜선이 맡아 연기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제외한[16] 드라마 특히 1995년 SBS판 장희빈과 2002년 KBS판 장희빈에선 명성왕후가 죽고 환궁한 장희빈이 점점 방자하게 굴자 대왕대비로서 이를 제지하고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를 중재하려 애쓰기도 한다. 이때 대왕대비로서 "중전과 잘 지내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결국 장희빈의 악행들을 정리하려다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든든한 지원자였던 왕실 어른을 모두 잃은 인현왕후는 결국 폐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두 드라마 다 최후가 안습이었던 게, SBS판에선 장희빈이 명령을 어기고 대들다가 이에 빡쳐서 죄를 지은 장희빈의 궁녀를 혼내려다 말도 잘 못하고 천둥번개가 치는 밤에 사망하고, KBS판에선 장희재의 끔찍한 만행을 지켜보고 이에 분노하다 쓰러져 만행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전(慈殿, 대왕대비)이 중궁 민씨(인현왕후)와 장씨(희빈 장씨)를 대놓고 차별한다"는 기록만 있지, 장렬왕후가 희빈 장씨의 환궁 후에도 인현왕후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자의대비가 살아있었다면 기사환국, 하다못해 인현왕후가 폐위될 일 만큼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워낙 명분이 없어서 남인들도 반대하는 판국에 왕실어른인 자의대비 입장에선 장희빈이 아무리 예뻐도 사실상 자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나라의 국모이자 정실 왕비(중전)를 내쫓으려는 국왕을 편들 수는 없기 때문. 선조 대 의인왕후의 선례도 있고 본인조차 자식이 없으므로, 숙종 편을 들면 자폭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숙종 입장에선 증조모 뻘되는 자의대비가 두눈 뜨고 살아있었다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손자며느리인 명성왕후 김씨와의 대립 구도 또한 빠뜨릴수 없는 요소이다. 2002년 KBS판에서는 강부자가 열연했는데, 명성왕후(김영애)와 대면할 때 상석에 못 앉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명성왕후에게 훈계(?)당하는 등 취급이 매우 안습하다. 물론 각색이겠지만 대왕대비가 대비전에 납시었는데 당연히 비켜서 상석을 내 드려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현대에도 손자며느리가 시할머니보다 상석에 앉으면 버릇없다고 취급 받는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조선시대에, 그것도 왕실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숙종의 처지가 가장 난감했을 것이다. 일단 엄마가 증조할머니한테 대든 것부터 백성들이 알면 망신이고, 명성왕후한테 죄를 묻자니 상대는 그러잖아도 기 세기로 유명한 무서운 엄마, 그냥 넘어가자니 유교의 나라에서 왕이 증조할머니를 무시하는 불효가 된다. 이런 정도이니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곳에 최소 한 줄은 기록이 남아야 정상이다. 본래 이런 사이에선 아무리 세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서열이 낮은 쪽이 어느 정도 예의는 차려 주는 게 상식적이니[17] 실제로 장렬왕후가 명성왕후와 대면할 땐 명성왕후가 좋건 싫건 상석을 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1] 現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2]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이후 귀인으로 첩지의 품계가 올랐지만 여러가지 구설수와 저지른 악행(만행)이 드러나 효종 때 폐서인이 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했다. 훗날 귀인 조씨로 다시 복권되었기 때문에 소용 조씨나 귀인 조씨로 검색해도 다 같은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3] 다들 '명성왕후'라고 하면 명성황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꼭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의 한자가 서로 다르며(明聖/明成), 최종 격식도 '''왕후'''와 '''황후'''이니 헷갈리지 말자.[4] 산전수전, 볼거 안볼거 다보고 이리저리 치이고 다니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5] 왕실의 큰어른으로 있을 당시 장렬왕후는 혈통상 증손자가 되는 숙종 이순의 치세라서 인조 시절의 대신들도 거의 다 죽고 없는 상황이였다. 장렬왕후가 그때 당시 유일하게 인조 때부터 효종, 현종 그리고 숙종 때까지 살아있던 이유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늙었던 인조가 딸뻘되는 여성을 새 중전(계비)으로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아무튼 인조 대부터 숙종 때까지 살아 있는 왕실 어른은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유일하다시피 했다.[6] 그래서인지 장렬왕후의 대비명 자의대비는 많이 알려져있지만 신정왕후의 효유대비라는 대비명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7]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로 들어와 효종 - 현종 - 숙종을, 신정왕후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들어와 헌종 - 철종 - 고종 시절의 대왕대비로 있었다.[8] 앞에서도 말했듯 한자는 서로 다르다.[9]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10] 아버지가 역관 장형이었고, 어머니는 일반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서 희빈 장씨는 중인 신분이긴 하나 출신은 어찌되었든 간에 미천하다고 볼 수 있다.[11] 숙종의 증조부, 인조의 계비임을 상기하자.[12] 동구릉에서의 휘릉 위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에서 20~30m 왼쪽에 장렬왕후 조씨의 무덤, 단릉 형식의 휘릉이 있다.[13] 동구릉 휘릉 신도문에는 ''' '朝鮮國 莊烈王后 徽陵'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이라고 단촐하게 써져 있다. 그만큼 계비인 장렬왕후에 대해서 소홀한 대접이 아닐 수 없다.[14] 숙명공주는 1640년생, 숙휘공주는 1642년생이고, 장렬왕후는 1624년생이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혼인적령기를 생각하면 16~18살이면 모녀 관계다.[15] 인조 역의 이덕화와 42살이나 차이가 난다. 하긴, 역사 속에서도 16살이 되는 조창원의 딸을 새 중전으로 맞았으니 하는 건 어찌보면 배역에 정말로 잘 뽑힌 것이다.[16] 사실 여기서는 아예 승하 장면이 없고 몸져 누웠다가 거처하는 곳을 옮기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는 암시만 나온다.[17] 세력 강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핍박했다는 게 실록 같은 기록에 남는 건 그만큼 비상식적인 일이니까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