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

 


'''조선 인목왕후 김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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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인목왕후(仁穆王后)'''
'''시호'''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
(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
'''출생지'''
조선 한성부 반송방 사저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근교)
'''사망지'''
조선 한성부 인경궁 흠명전
'''본관'''
연안(延安)
'''부군'''
선조(宣祖)
'''아버지'''
연흥 부원군 김제남
'''어머니'''
광산 부부인 노씨
'''자녀'''
정명공주, 영창대군 등 1남 1녀
'''생몰'''
'''기간'''
'''음력'''
1584년 11월 14일 ~ 1632년 6월 28일
'''양력'''
1584년 12월 15일 ~ 1632년 8월 13일
(향년 47세)
'''재위'''
'''기간'''
1602년 ~ 1608년(왕비)
1608년 ~ 1618년(왕대비 재위 기간)
1618년 ~ 1623년(서궁 유폐 시절)
1623년 ~ 1624년(인조반정으로 복위)
1624년 ~ 1632년(대왕 대비)
[image]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1]
인목왕후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딸 정명공주도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1. 개요
2. 생애
2.1. 왕비(새 중전) 간택
2.2. 왕비 시절
2.3. 대비 시절
2.3.2. 폐모론
2.3.3. 서궁 유폐
2.3.5.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2.3.6. 죽음
2.4. 평가
2.5. 대중 매체에서
3. 가족 관계


1. 개요


조선 선조의 첫 계비이자,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어머니. 연흥부원군 김제남[2]과 광산 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이다.[3]
광해군인조 때까지 생존해서인지 흔히 인목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였다.[4] 그러므로 인목왕후나 소성대비라 불러야 맞다. 참고로, 인목대비는 잘못된 표현이지만 워낙 많이 쓰이는 탓에 인목대비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소성대비 역시 정식 명칭이기에 이 문서로 연결된다.

2. 생애



2.1. 왕비(새 중전) 간택


일단 법적 항렬상 광해군계모이긴 한데,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한참 어렸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의 나이는 19세, 남편 선조는 51세였다. 보통 왕비 간택의 대상이 되는 나이는 13세~16세[5]였으며, 일반적인 반가 처녀들도 17세~18세에 미혼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척 늦은 나이였다. 임진왜란의 혼란함 와중에 혼기를 놓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차피 선조가 재혼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던지라, 인목왕후의 나이가 많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조는 이미 50이 넘은 나이였고,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적자(嫡子)'''를 보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6]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는 견해도 있다.[7]
한편 선조와 인목왕후의 가례 당일 마른하늘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사람들이 새 왕비의 불행을 예측했다고도 한다.

2.2. 왕비 시절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왕이 재혼하는 일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관례였지만,[8] 많은 여인들 중 인목왕후가 선택받은 데에는 선조의 의중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무(無)당파적 인물인 데다, 연안 김씨 가문 자체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있어 지나치게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사돈 심엄[9]정원군동서[10]였고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11][12]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도 큰 충돌 없이 잘 섞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왕비였다. 다만 사대부 영애로 나고 자라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터라,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서 처세에 약했다는 점은 있었다. 선조의 총애를 반던 후궁 인빈 김씨가 처음에는 자기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암암리에 움직이다가 결국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엔 재빨리 광해군으로 갈아타 관계를 개선했던 것과는 달리[13][14], 인목왕후는 처세술이 모자랐다.
때문에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왕자를 세자(世子)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대군(大君)으로 부를 것인지"를 물어보는 경솔한 짓을 했으며, 선조에게 부탁을 해서 무려 400여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원래 광해군 처소에 있던 궁녀가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영창대군을 마치 세자처럼 차려입히는가 하면,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고,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목왕후의 나인들은 입궁한 지 얼마 안 된 인목왕후가 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정작 광해군이 임금이 되고 영창대군에 역모에 휩싸인 후에는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여 인목왕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또한 인목왕후 본인도 궁중의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입히는 등, 철없고 위험한 실책도 저질렀다.

여기에는 인목왕후의 경솔함 뿐 아니라 남편 선조 탓도 있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선조의 위신은 크게 하락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백성들을 버리고 요동(명나라)으로 망명할 계획을 추진하거나 시기심에 눈이 멀어 멀쩡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하여금 수군을 통채로 궤멸시키고 삼남[15] 지역을 통째로 내줄 뻔하는 등의 행위로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보다못한 류성룡 등의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려다 차마 말 못하고 물러가는, 다른 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선조의 총신이었던 이항복이덕형의 경우에는, 당현종안록산의 난을 피해 피난 간 사이 분조를 이끌던 태자가 제위에 올라 당숙종이 된 고사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먼저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를 치고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나라에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 광해군임진왜란 기간 동안 적극적인 분조 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을 통해 대북, 청소북은 물론 재야 유림까지 광해군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고 민심도 두루 사고 있었다.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어리지만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과 어심을 읽은 줄 알고 부화뇌동하는 탁소북 유영경을 이용했다.

2.3. 대비 시절


선조 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20대 중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선조 40년 10월에 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유영경이 천부당 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유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

성상(聖上)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성상의 전교(傳敎)를 따르지 않으면 환후(患後)가 더욱 위중(危重)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傳攝)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

라고 언문으로 명을 적어내,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다.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의 정통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주장은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다뤄진 바 없으며, 2000년대 광해군 옹호 바람이 불면서 나온 인터넷발 설이다. 어차피 광해군은 탁소북을 제외한 전 당파와 재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광해군은 16년에 달하는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분조를 이끈 경력의 소유자였다. 영창 대군보다 '''31살'''이나 많았고 종법해석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결국 영창대군왕비 소생이란 점도, 광해군의 넘사벽 스펙 앞에선 결정적인 고려 대상이 못되었다.

2.3.1. '''계축옥사'''


문제는 조선 국왕 중에서 최다 친국(고문) 기록을 가진 광해군편집증적인 의심병. 조작된 옥사에 크게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이유도 따지지도 못한채로 사사당하고[16]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17] 또한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특유의 '분위기 다 조성해 놓고 자기는 슬쩍 빠지는 방법'을 써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서궁(경운궁 석어당)에 5년 동안 강제로 '''유폐(遺廢)'''되었다.[18]

2.3.2. 폐모론


인목왕후의 입장에서 광해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19] 비록 인목왕후가 처신에 실수는 했지만 광해군을 밀어내려는 망상을 품진 않았고,[20] 대놓고 부화뇌동하며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원해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인의 정통성이 탄탄해[21] 별 위험도 되지 못하는 영창대군을 경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오빠, 남동생들,[22]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었다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에게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인목왕후 폐비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참가한 인원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는데, 실록에조차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 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여론 조사는 그 당시 대북이 얼마나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대북 독재 정권을 만들어 준 광해군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고, 왕인 광해군이 대놓고 대북을 비호하니 대북에 더 힘이 실리고 대북파들은 죽자살자 폐모론을 주장하니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배은망덕,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이 인목왕후를 무척 증오해서 폐모론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암살 기도'''까지 획책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더욱이 허균은 "영창대군선조와 인목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의 아이를 주워다 왕자로 꾸며낸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도 폈다. 이는 그의 교유 관계 때문이었는데,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의 주인공인 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 7명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목왕후를 밟아야 했다.

2.3.3. 서궁 유폐


이때 인목왕후의 딸이자 선조의 유일한 적녀(嫡女)인 정명공주가 함께 유폐되었다. 정명공주가 옹주로 낮춰졌다는 기록은 없다. 정명공주 참조.[23]

2.3.4. 인조 반정


선조인빈 김씨의 5남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군 서인과 힘을 규합하고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서궁의 문이 열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정군을 의심하여 "공주[24]는 죽었다."며 반정군을 믿지 않았지만, 능양군이 오자 그제야 믿었다.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지방 사림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대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대비의 폐위 교지를 받고 폐위되었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목왕후는 서인의 추대로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광해군의 처분에 대한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적개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인조실록 인조 1년 4월 11일 경오 3번째 기사의 기록을 보면 "폐인(광해군)은 천지 사이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을 하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대신과 조정은 '폐주(廢主)'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을 폐주로도 취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목왕후는 인조를 만나보고는 그 전에 "이혼(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세요. 그 머리를 씹겠습니다. 그 '''살점'''을 씹고 전교를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인은 쿠데타에 성공한 뒤 광해군을 한동안 궁에 가두고 남겼으나, 인목왕후는 처음엔 "광해군을 사사시켜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이후 "2번 절하며 청한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먼 곳으로 광해군을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다.
인조실록 첫페이지와 이를 참고로 기록한 승정원일기에서는 인목왕후의 발언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베겠다"'''고 더 과격하게 쓰여 있다.

不共戴天之讎, 忍之已久, '''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幽囚十餘年, 至今不死者, 蓋待今日耳, 願得甘心焉。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오. 참을 만큼 오래 참았으니, '''내가 친히 부자의 목을 잘라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려서였소. 통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

-<인조실록> 인조 1년 계해 (3월 13일)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년) 3월 13일(계묘)


2.3.5.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는 광해군 대에 혼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서궁에 쥐죽은듯이 유폐되어 있다가 21살이 되어버렸는데, 당시 기준으로 아무리 왕의 딸이자 일국의 공주일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 가뜩이나 늦은 혼사를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 만큼, 인조반정 사흘 만에[25]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부마감들은 죄다 이미 결혼까지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 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수준이고, 약혼조차 안 되었을 정도면 남자 쪽에서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다. 이미 결혼한 사람더러 무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 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도 없으니,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없이 부마 단자를 내도록 했고, 그 중 집안의 초상 문제로 혼인을 미루고 있던 홍주원의 약혼을 물려버린 다음 부마로 삼았다고 한다.
소성대비는 노처녀 딸이 겨우 얻은 사위를 예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위에게 오직 임금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줬다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 정통성을 세워주는 대의 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공주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는 등 후대하였다. 일제강점기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이 당시 정명공주가 받은 땅의 일부로, 이게 현대로 치자면 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공짜로 준 셈이라 당연히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정명공주와 왕실에 내리는, 개인적인 일에 집착할수가 있습니까. 정히 주고 싶으시다면 왕 개인 자산에서 주십시오"'''라고 말할정도로 크게 비판받았음에도 정명공주 모녀를 크게 대우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는데, 정명공주에 대한 우대도 그중 하나였다. 전술했듯 정통성 문제로 소성대비에게 숙여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2.3.6. 죽음


소성대비(인목왕후)의 건강이 날로 좋지 않자, 인조는 소성대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홍주원의 품계를 한~두단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성대비는 아이러니하게도 1632년(인조 10년)에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다. 사망 2년 전부터 더운 날씨면 병이 악화되었음과 병세를 종합하면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악화되어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걸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손자뻘인 인조와 증손자뻘인 소현세자가 번갈아가며 소성대비의 간병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성대비 사후 무리하게 초상을 치루던 인조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데, 인조는 이것을 정명공주의 저주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정명공주는 인조 재임 기간 중 납작 엎드려 조용히 살게 된다.
사실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저주는 핑계에 불과하다.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장통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성대비에게 굽혀야 했다. 그래서 소성대비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대비의 하나밖에 없는 딸 정명공주에게도 온갖 특혜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성대비가 사망하자 이용가치가 떨어진 정명공주를 압박하기 위해, 저주를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2.4. 평가


인목왕후 본인은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왕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욕심이 많다는 것은 대놓고 드러난 바 있다. 상기한대로 이미 세자가 있는 상황에서 나이 많은 왕이 세자를 멀리한다는 이유로 아들을 왕세자로 만들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욕심에 반해 인목왕후에겐 이전의 문정왕후 윤씨나 뒷날의 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은 없었고, 그렇다고 처세가 썩 좋은 편도 아니었다. 물론 유영경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한 점에서 보이듯 폐비 윤씨처럼 말도 안 되는 야심을 품진 않았었다.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렸던 탓에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진 않았다.
선조가 인목왕후 소생의 아들인 영창대군광해군 견제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조성한 살벌한 공안 정국이 아니었다면 그냥 어른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터였는데, 남편과 (종법상의) 아들을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목왕후가 허물 하나 없는 성인 군자는 아니었고 처세술에서도 미숙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아버지와 형제, 아들까지 잃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은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
임진왜란 이래 선조광해군은 왕위를 둘러싸고 정적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선조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 첫 번째 불행이었고, 조정과 재야의 지지를 두루 받으며 권위가 막강했음에도 끝없이 옥사를 일으킨 광해군의 의심병이 2번째 불행이었다.[26]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늙은 왕에게 시집 가 당쟁에 휘말려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선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온몸으로 받아 실제로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려려는 야심이 있었다느니,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은 다음부턴 인목왕후에 대한 일방적인 재평가도 진정되는 중.[27]
한마디로, 결혼 한번 잘못했다가 과분한 욕심을 품긴 했지만, 그 욕심에 대한 댓가로 의붓아들의 손에 친정 가문과 하나 뿐인 아들을 전부 잃고 겨우 살아남아 과 함께 모진 유폐 생활을 견뎌 다시 복권돼 일생을 왕실의 대왕대비로 살았지만, 그토록 증오하던 의붓아들보다 일찍 죽은 참으로 애석한 인생을 산 여인이었다.

2.5. 대중 매체에서


인목왕후나 또는 그 밑의 나인, 혹은 딸 정명공주가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고전 소설 계축일기에서는 완벽하게 선량한 피해자로 등장, 악당 광해군과 교활한 김개시의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대비의 자리를 되찾는 인생 드라마를 찍는 듯이 묘사된다. 계축일기는 소설이라 궁중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혜경궁 홍씨한중록처럼 당대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낮다.

2.6. 사극


  •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회천문, 남한산성) - 권재희
  • 서궁 - 이보희
  • 허준 - 홍은희
  • 천둥소리 - 이현경
  • 왕의 여자 - 홍수현[28]
  • 구암 허준 - 서이안[29]
  • 왕의 얼굴 - 고원희
  • 화정 - 신은정[30]
  • 오하늬 - 조선로코 녹두전

3. 가족 관계


  •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
    •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
      • 언니 : 심정세에게 출가.[31]
      • 동생 : 김규[32]
  • 남편: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
    • 적녀: 정명공주
      • 부마: 영안위 홍주원[33]
    • 적자: 영창대군 이의 (1606년 ~ 1614년)

[1]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소장.[2] 중종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권신 김안로의 종손이다. 더 위의 조상 중에는 이름을 말하기 곤란한 분도 있다.[3] 장녀는 심정세에게 시집가는데 심정세는 심강(청릉부원군, 명종비 인순왕후의 아버지)의 손자이다. 즉 인순왕후와 인목왕후는 서로를 본 적이 없지만 법적으로는 (조카)며느리이며 친가로도 연결이 된다.(친가쪽으로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돈? 어차피 직접 만난 적이 없었기에 호칭문제는 별개다. 인척관계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4] 이전의 문정왕후도 대비 존호는 성렬대비(成烈大妃)지만, 문정대비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5] 당시의 세는나이 기준[6] 당시에는 소녀들의 발육이 그리 빠르지 않아, 일반적인 왕비 간택 나이에 간택된 왕비들은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7] 인목왕후는 혼인한지 일년이 되기도 전에 첫 임신으로 1602년 6월 27일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11월 24일 둘째 왕녀(이름 미상, 요절), 1606년 3월 6일 적통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출산했다[8] 왕이야 승하하면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그만이지만, 내명부 수장인 왕비는 세상을 떠나면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니 후궁들의 권력암투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새로 들여야 했다.[9] 심인겸(인순왕후의 친동생이자 동서분당의 시초인 심의겸의 형)의 아들, 심엄의 아들 심정세의 부인이 김제남의 장녀다.[10] 정원군의 부인인 연주부부인(추존 인헌왕후) 구씨와 심엄의 부인이 자매다.[11] 류희발의 부인이 심엄의 고모다.[12] 이렇게 되면 광해군과 인조 역시 실제로는 숙질간이었으며 광해군의 처가와 인조의 외가 쪽이 서로 엮여있었단 의미다.[13] 그 덕분인지 인빈 김씨는 광해군 즉위 후 괜찮은 대접을 받았고, 인빈 김씨의 자손들도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제외하고는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 다만 정원군은 그 일로 상심해 죽었다.[14] 임진왜란 이전 세자 책봉이 유력했던 아들 신성군을 무반 명가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시키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룬 무반 명가 능성 구씨 집안과 혼인시켜 배경을 든든히 하고, 정철을 쳐내려는 이산해와 연합하는 등, 인빈 김씨는 자기 소생을 차기 왕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엔 자신의 외조카를 광해군후궁으로 들이고, 선조와의 사이에서 광해군 편을 많이 들어주는 등,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래서 의심 많은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庶母)의 공이 컸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졌다.[15]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16] 김제남이 치부를 일삼은 부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인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 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3자리 수는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바로 광해군과 그 측근들이었다. 광해군 및 측근세력은 '''방납(傍納)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 관리들이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는 것을 비호했다.[17] 영창대군이 죽게 된 것(증살, 방에서 쪄죽음)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18] 정확히는 인목왕후를 서궁으로 보내 유폐시킨것이 아니라 재건 된 창덕궁으로 왕실이 이어 한 것이다. 이 때 함께 머물던 인목왕후만 경운궁에 남기고 광해군 일가는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이후 경운궁을 서궁으로 격하시키고 감시병 정도만 둔 채 방치하였다.[19] 이 증오가 어느 정도였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반정 수뇌부들에게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父子)의 머리를 가져오라. 그들의 살점을 뜯은 뒤에야 비로소 전교(傳敎)를 내리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20] 광해군 저주 건은 계축옥사 당시 고명 대신으로 끌려온 박동량이 살기 위해 한 증언이다. 이후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을 고문해 목릉, 즉 선조의 능에 저주의 뜻을 담은 물건을 묻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사실 확인을 위해 목릉을 파헤쳤을 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정황상 영창대군에 이어 인목왕후까지 끝장내려는 북인의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21] 세자로 16년, 게다가 그 사이에는 전시에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문종의 대리 청정 못지않은 플러스 요소다.[22]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23] 당시 정명공주는 16세였고 이미 혼인하고 남을 나이였으나, 광해군이 출궁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혼인할 수 있었다.[24]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 당시 21살로 노처녀였으나 혼인하지 못하고, 인목왕후와 같이 서궁에 유폐당해 있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마저 죽일까봐, 광해군에게 정명공주가 죽었다고 알렸다.[25] 공신 책봉은 그렇다치고 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다. 광해군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26] 10년 넘게 세자위에 머무르며 전란 때 훌륭하게 분조를 이끌었다는 훈장 달고 부왕이 위협을 느껴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명나라의 승인까지 거론하며 견제했던 세자가 권위가 약할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막강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자기 살 까먹고 조정의 균형을 문너뜨리는 행동을 재위기간 내내 저질렀다. 엄밀히 말해 정략에선 다음 왕 인조보다 못했다. 인조는 이괄의 난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재위 후반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데는 성공했다.[27] 여담으로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란 부제와 달리 3분의 1 정도는 영건 사업과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28] 광해군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29] 이 작품에선 적통대군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위태(상상임신)를 하였고, 이를 허준이 정확히 파악했다. 이에 인목왕후는 "내가 강건하니 언제든 회임을 할 수 있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소"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고, 선조 또한 안타까워한다. 이로부터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30] 이 작품에선 시종일관 자신의 자식들인 정명공주영창대군을 걱정한다. 다만 광해군에 의해 친정 가문과 아들을 전부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올라 딸인 정명공주와 달리 인조반정을 찬성하는 모습도 보인다.[31] 심정세의 고모할머니가 명종 왕비 인순왕후 심씨이다. 심정세의 어머니가 구사맹의 장녀인데 구사맹의 5녀가 정원군과 결혼한다. 즉 심정세와 인조는 이종사촌이며 인목왕후와 인조는 법적으로는 조손관계이며 친정쪽으로는 이종사촌 형부가 된다.[32] 동생의 부인 즉 올케가 되는 달성 서씨의 친정 어머니가 정신옹주,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이다.[33] 헌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5대조 직계조상으로, 홍주원정명공주의 5대 후손이기때문에 영조와는 12촌, 혜경궁과 사도세자는 13촌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