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

 

1. 才士
2. 齋舍
3. 고구려의 현자 극재사
4. 고구려의 왕족 고재사


1. 才士


'재주가 뛰어난 남자'를 뜻하는 말로 남성에게 쓸 수 없는 단어인 '재원(才媛)'을 남자에게 쓸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2. 齋舍


재사(齋舍)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건축물이다.
주로 안동예천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 많이 남아있으며, '태장재사', '희이재사', '서재지사', '송석재사', '남흥재사', '금계재사'등 유교건축으로서는 드물게 중층으로 지어진 건축물도 많이 존재한다.

3. 고구려의 현자 극재사


'''주군'''
동명성왕
'''의복'''
마의(麻衣)
''''''
극씨(克氏)
'''이름'''
재사(再思)
'''생몰년도'''
? ~ ?
克再思.
고구려 동명성왕 때에 고구려의 개국을 도운 현자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엄사수를 건너 부여를 탈출하여 모둔곡(毛屯谷)이라는 곳에 이르었을 때 만나는 세 명의 현인들 중 한명이다.
동명성왕과 만났을 당시에 재사는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으며,[1] 다른 두 명의 현인인 무골묵거는 각자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이들을 범상치않게 여긴 동명성왕은 세 사람에게 각기 성씨를 내려주고 신하로 삼고는 "나라의 기틀을 열 현인들을 얻었다."라고 말하며 무척 기뻐했다고 전한다.
재사는 이때 극씨(克氏) 성을 하사받았으며 , 재주에 맞는 직위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는 무골, 묵거 등과 함께 동명성왕을 따라 졸본천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의 건국을 도왔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확실히 묘사되지는 않으나, 동명성왕이 이들을 신하로 삼고 기뻐했다는 대목을 보아할때 단순히 현명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무골, 묵거 등과 함께 모둔곡의 세력가였다는 설도 있다.[2] 한편, 중국 측 사서에서는 이들의 인상착의만 언급될 뿐 이름과 성씨가 누락되어 있으며, 중실과 소실보다 먼저 부여된 것으로 추정된 대실이라는 성씨가 대무신왕 시기 추발소에게 부여되어 후대의 일이 상대로 투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주몽(드라마)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image]
차광수가 연기했다. 마리와 함께 고구려의 브레인 역할을 맡아서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 고구려의 왕족 고재사


'''작위'''
'''고추가(古鄒加)'''
'''성씨'''
고(高)
'''이름'''
재사(再思)
'''아내'''
부여태후
'''아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부왕'''
유리명왕, 대무신왕[3], ?[4]
'''생몰년도'''
? ~ ?
高再思
고구려의 왕족. 태조대왕의 아버지. 아내는 부여태후.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의 후임인 차대왕은 이 사람의 차남이라 한다. 하지만 이 학설의 경우 재사의 나이 문제와 겹쳐 논란이 있다. 참고로 후한서에서는 차대왕을 재사의 손자이자 태조왕의 장남이라 기록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3번 항목의 인물과는 이름의 발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아서 헷갈리기 쉬운 인물이다(...). 때문에 한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신빙성 없는 설도 나돌았던 것 같다. 고구려의 왕족이기 때문에 성은 고(高)씨이니 헷갈리지는 말자.
서기 53년, 폭정을 일삼던 모본왕두로의 칼에 살해당한 후에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당장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재사는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그 아들이 바로 태조왕이었다.
참고로 형인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당시 재사의 나이는 최대 4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만을 신뢰한다면 재사는 최대 40대 후반이 고령의 나이라면서 왕위를 아들에게 양보해놓고선 20년~40년 후까지 아들들(차대왕, 신대왕)을 낳고 그 아들들(차대왕, 신대왕)은 70대에 왕위에 오르는 앞뒤가 안 맞는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에 재사에 대한 기록은 의심을 받고 있다.

[1] 이 마의는 말 그대로 마로 지은 옷으로 여겨진다.[2] 그런데 이러면 대체 무얼 믿고 살던 곳을 떠나 동명성왕을 따라갔는지 의문이 생긴다.[3] 후한서 기준.[4] 조선상고사에서는 재사가 대무신왕의 3세손, 즉 손자라고 되어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동명성왕의 19세손이라고 기술된 것에 기인하나, 이 19세손이라는 호칭은 "동명성왕으로부터 제19대 왕"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다소 불확실하다.